[샘터찬물 497번째 편지]
아내에겐 마침표가 없다!
자기 변화는 최종적으로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기술을 익히고 언어와 사고를 바꾼다고 해서 변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최종적으로는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바뀜으로써 변화가 완성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변화가 개인을 단위로 완성될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 변화는 옆 사람만큼의 변화밖에 이룰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자기 변화의 질과 높이의 상한입니다. 같은 키의 벼 포기가 그렇고
어깨동무하고 있는 잔디가 그렇습니다.
“변화는 결코 개인을 단위로,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변화는 잠재적 가능성으로서 그 사람 속에 담지되는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은 다만 가능성으로서
잠재되어 있다가 당면의 상황 속에서, 영위하는 일 속에서,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자기 개조와 변화의 양태는 잠재적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한 변화와 개조를 개인의 것으로, 또 완성된 형태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근대적 사고의 잔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 『담론』 중에서
“누구야!”
방금 들어온 아내 목소리다. 심상치 않은 소리에 놀란 남자 넷은 후다닥 뛰쳐나온다.
거실 한가운데 널브러진 양말 두 짝. 누구 하나 치우는 사람은 없고, 서로 얼굴만 쳐다본다.
‘자기가 오늘 신은 양말도 몰라! ’ 아내의 일성一聲이 있고 난 뒤에야 가장 자신 없는 아이가 양말을 집는다.
아들 셋을 키우는 아내 얼굴에서 망연한 표정이 읽힌다. 나까지 합세해 아들이 넷이 되면 아내는 망연茫然을
넘어 자실自失의 경계를 넘나든다.
아빠는 발뒤꿈치, 큰아이는 엄지발가락 부위가 닳는다. 농구를 좋아하고 많이 뛰는 둘째는 뒷발 바닥
오른편이 닳는다. 무슨 이유에선지 양말을 당겨 신는 막내는 속이 비칠 만큼 앞부위가 늘어진다.
빨래를 개던 아내가 지나가는 말로 하는 얘기다. 각자 브랜드를 달리하지만,
아내는 닳은 부위만 보고도 누구 양말인지를 알아본다.
아내는 물건 하나하나의 의미와 놓여야 할 자리를 정확히 안다. 쓰고 나서 아무 곳에 방치하는 남자들하고
다르다. 남자 넷은 하루 종일 아내에게 묻는다. 차 키, 카드, 지갑, 이어폰, 오늘 입을 옷, 오늘 무얼 먹는지
끊이지 않는다. 그러니 아내는 아프면 안 되는 사람이다. 사물의 쓰임과 자리를 꿰뚫고,
사람 마음마저 꿰뚫는 자. 아프지 않고, 물음에 답을 주는 자. 내가 알기론 신이 유일하다.
집에서 아내의 위치는 신이다. 더 오를 곳이 없다. “당신은 신이야.” 내 말에 아내 표정이 순간 굳는다.
“당신이 원해서 된 자리가 아니라는 걸 알아. 내가 노력할게.” 지금 아내가 선 자리는 절벽 끝이다.
여기서 밀리면. 그다음은 상상할 수 없다. 아내의 자리는 괜찮으면 지키고, 괜찮지 않으면 지키지 않아도 되는
곳이 아니다. 그런 아내에게 “괜찮아?”라는 질문은 금기다.
아내가 선 자리는 어떤 모습일까. 아니 내가 선 자리는 어떠한가. 내 일정은 물 위에 우아하게 떠 있고,
아내 일정은 물밑에서 쉬지 않고 발을 젓는 중이다. 내 일정은 진짜 내 일정이고, 아내 일정은 가족 일정이다.
아이들 학원 일정은 나는 모르지만, 아내는 꿰차고 있다. 나는 주도적 학습을 말하며 피해 가지만,
아내는 아이 일정과 학습 진도를 아이보다 잘 안다. 내 일정엔 마침표가 있고, 아내 일정엔 마침표가 없다.
가끔 아내는 내게 묻는다. 이거 어때? 이렇게 하면 될까? 그중에는 답이 딱 보이는, 하나 마나 한 물음도 있다.
마치 아내 자신도 누군가에게 묻고 답을 듣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것처럼. 한 사람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필연적 관계에 있는 동반자가 마음을 고쳐먹지 않은 한, 우리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지금은 “당신 괜찮아?” 묻기 전에 뭐라도 하려고 노력한다. 아내가 준 기회를 지렛대 삼지 못하면
아내는 나에게 기대를 거둘지도 모른다. 그 무엇도 차마 하는 진짜 신이 되어서.
- 더불어숲 회원 강태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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