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샘터찬물 502번째 편지] 기다림의 미학 - 김정진 2026. 09. 18. |
[샘터찬물 502번째 편지]
기다림의 미학
서삼독書三讀은 책을 읽을 때는 세 가지를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필자를 읽고 최종적으로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독서는 필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탈주脫走입니다. 독서는 자기가 갇혀 있는 문맥,
우리 시대가 갇혀 있는 문맥을 깨뜨리고, 드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자유의 여정입니다.
어떤 책이든 그것이 고뇌와 성찰의 작은 공간인 한 언젠가는 빛나는 각성으로 꽃피게 마련입니다.
언약言約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날 것입니다.
독서는 만남입니다. 성문城門 바깥의 만남입니다. 자신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서는 자신의 확장이면서 동시에
세계의 확장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각성이 모이고 모여 어느덧 사회적 각성으로 비약할 것입니다.
지식을 넓히는 독서보다 생각을 높이는 사색에 더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어제의 반성과 성찰 위에서 오늘을
만들어내고 오늘의 반성과 성찰 위에 다시 내일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사색의 갈무리가 우리를 아름답게 키워줍니다.
과거를 다시 체험하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재구성하는 사색의 시간은 자기와의 대면 시간이며 자기 해방의
시간입니다. 사색은 새로운 것을 획득하려는 욕심이 아니라 일상에서 잊고 있는 약속들을 찾아서 챙기는
‘약속의 이행’입니다.
<성찰편 5> ‘독서와 사색’ 중에서
더불어숲 학당 명강사 강태운 선생님은 신영복 선생님의 서삼독을 기초로 그림을 읽고 작가를 만나고 나를 성찰하는
법 '화삼독'을 제안하였다. 그림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각성과 자기성찰로 연결하는 독특한 감상법이다.
더불어숲에서 이 화삼독 강좌를 노무현센터와 연계 개설하여 참여하고 있다. 신영복 선생님의 사상과 그림 사랑
그리고 서삼독에 기초한 화삼독을 명쾌하게 설명하여 귀와 눈이 열리고 호기심이 충만해졌다. 다양한 화가들의
작품을 보여주며 작가의 생애와 그림을 연결하여 심층적 이해를 돕고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며 화삼독으로 이끈다.
그림을 단순히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성찰적으로 만나면서 조응되는 나의 이야기로 들어가는 화삼독을 격려한다.
강의실을 벗어나 화랑을 찾아가기도 한다. 화삼독으로 그림을 보려고 노력하니 만남의 깊이가 다르게 느껴진다.
지난 8월에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이대원 작가의 70년 화업을 조명하는 회고전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를 관람하였다. 관람 후 화삼독을 토대로 후기를 작성하였다.
이 대원은 '화단의 신사' 또는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운다.
미술하고 싶어 하는 그를 아버지는 기어이 법대로 진학시켰다고 한다. 아버지는 입학 기념으로 파주에 과수원을
사주었다. 그림에 재능있는 아들의 뜻을 꺾은 미안함이었을까 짐작해 본다. 이대원은 아버지와 충돌하지 않고
그림에 대한 소망을 유예하는 인내와 지혜를 보여준다. 청소년기부터 신사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타고난 재능이 번뜩이는 이대원은 법대 졸업 후 기업에 근무하다가 좀 늦게 그림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법대를 진학하며 그림을 전공하진 못했고, 경복고등학교 재학 시 일본인 미술 선생님의 지도가 전부였다고 한다.
사토 구니오 선생은 인상주의, 야수파, 아방가르드의 영향을 받았고, 특히 조선 공예품의 독창성과 우수성에
주목하도록 교육하였다고 한다. 우리의 산과 기와를 놀라운 선과 색채로 표현한 유영국, 우리 나무와 새,
가족을 독창적으로 그려낸 장욱진과 함께 우리 자수에서 영감을 받아 색감을 살려낸 이 대원까지 모두 이 선생님께
배운 동창들이라니 놀랍다.
이 대원의 그림들은 도리화 같이 과수원 꽃들을 아주 큰 화폭에 담아 독자들을 과수원으로 초대한다.
그 풍요로움을 혼자 누리지 않는 넉넉함이 느껴진다. 과수원 곳곳에 숨어있는 연꽃들, 풀들도 빠뜨리지 않고 따뜻한
시선으로 마치 수를 놓듯 영롱하게 자태를 표현한다. 북한산을 비롯한 인왕산 등 산들도 독특하게 표현한다.
어디서나 눈을 들면 만나는 우리의 산들이다. 뾰족하게, 높다랗게 혹은 둥글게 겹겹이 산을 그리며,
산속의 꽃들도 잎사귀도 뭉뚱그린 듯 도드라지게 보여준다. 또 우리의 돌담도 많이 그렸다. 담 너머 산과 나무들을
크고 작은 화폭들에 담아내었다.
이 대원의 그림들을 보며 그의 따뜻하고 섬세한 시선에 매료되었다. 구상과 추상의 경계가 모호한 융합적 표현방식이
참 좋다. 추상처럼 난해하지 않고 사진처럼 그대로 전하지도 않는다. 우리 자연과 전통예술의 특성을 녹여낸 특유의
점과 선의 채색으로 어느 순간의 한 장면을 집요하게 재창조한다. 그래서 그림을 감상할 때 뿌듯한 마음이 퍼지는 것
같다. 어쩌면 강압적이었던 아버지와 일제시대의 숨 막힘, 외적 압력과 내적 욕망 사이의 갈등을 긴 호흡으로 견뎌낸
기다림의 품격을 보여준 삶이 표현되어 더 감동을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화합하며 받은 것을 소중히 하되
기꺼이 나누었고 그래서 풍성해졌던 그 삶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진다.
나의 삶을 돌아보며 그렇게 진지하게 나의 일과 사람을 사랑하고 집중했는가 자문하게 된다.
일희일비하며 조급했고, 타인의 시선에 흔들렸던 시간을 반성한다.
앞만 보며 달려왔던 시간 들, 성적에 연연하여 자녀들에게 상처 주었던 시간이 부끄럽게 다가온다.
더 소중한 것들을 놓친 것 같아 아쉽다. 지금이라도 긴 호흡으로 주변을 아끼고 기다리고 사랑해야겠다.
오래 남는 향기 있는 삶을 살아가리라 다짐해 본다.
- 더불어숲 회원 김정진
|
| [샘터찬물 501번째 편지] 공부란 ‘두 발 걸음’을 얻으려는 노력 -노병준 2026. 09. 11. |
[샘터찬물 501번째 편지]
공부란 ‘두 발 걸음’을 얻으려는 노력
오늘 함께 읽은 「한 발걸음」은 변화와 자기 개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목발을 배우면서 이루어진 변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글에서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비단 감옥처럼 실천이 배제된 경우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란 근본에 있어서 한 발걸음이라는 자각을
갖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한 발로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걷고 있는 골목 자체가 특수한 골목입니다. 여러분 자신도 특수한 개인이기도 합니다.
결국 한 발걸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 발로 걸어가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공부란 ‘두 발 걸음’을 얻으려는 노력인지도 모릅니다.
- <담론> 중에서
올해 초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있었던 강태운 선생의 미술 강의에서 여러 배움이 있었지만,
그 중 실밥이 터지듯 풀려가는 깨달음을 준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예술의 본령은 사람의 무심함을 깨우치는 것’이라는
선생의 말씀은 비단 예술뿐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모든 것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특수한 자신의 조건 속에서
한 발걸음을 무심하게 내디디며 하루하루 나아가던 저에게 그 가르침은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우이 선생님께서 전해주신 ‘공부란 갇혀있는 생각의 틀을 깨뜨리는 것’이란 말씀처럼 한 발걸음은 우리를
무심하게 만드는, 당연하고, 익숙하고, 의심하지 않은, 완고한 틀입니다.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와 같은
문예사조의 변화도 결국 생각의 틀의 변화였고 금이 가고 깨진 틈으로 보였던 수많은 진실을 작가들이 포착하고
표현한 것이 예술 작품이었습니다. 비로소 낯설고 난해하고 불편하기까지 했던 시나 미술 작품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완고했던 생각의 틀을 깬다 해도 새로운 틀이 만들어지고, 다시 그 틀을 깨는 수많은 각성과 노력의 반복이 바로
공부이고 창조이고 삶입니다. 우리의 삶은 곧 예술이며, 그러한 삶은 우이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신 ‘1회 완료적인
변화란 없다’라는 부단한 노력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한 발걸음이나 1회 완료를 무시하거나 부정하고 폄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 또한 변화의 전체를 이루는 하나의 부분이고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숲 회원 노병준
|
| [샘터찬물-500번째 편지] 인문교양을 위한 공부 -이도환 2026. 09. 04. |
[샘터찬물 500번째 편지]
인문 교양을 위한 공부
공부는 한자로 '工夫'라고 씁니다. '工'은 천天과 지地를 연결하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夫'는 천과 지를 연결하는 주체가 사람(人)이라는 뜻입니다. 공부란 천지를 사람이 연결하는 것입니다.
갑골문에서는 농기구를 가진 성인 남자로 그려져 있습니다. 人文學의 文은 汶과 같은 뜻입니다.
자연이란 질료質料에 형상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人)이 한다는 뜻입니다.
농기구로 땅을 파헤쳐 농사를 짓는 일이 공부입니다.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세계는 내가 살아가는 터전이고 나 또한 세계 속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란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공부입니다. 자연, 사회, 역사를 알아야 하고 나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공부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키우는 것입니다. 세계 인식과 자기 성찰이 공부입니다.
- 『담론』 18쪽 -
우리는 지금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AI라는 거대한 기술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과 사회 전 영역에 깊숙이 스며들어 우리들의 사고·일·교육·문화·의사결정 방식까지 변화시키고
있으니, 이제는 ‘AI시대’라고 말합니다. 지식과 정보를 빠르게 제공하는 ‘AI시대’일수록 ‘인문 교양’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문 교양’을 영어로는 ‘Liberal Arts’라고 합니다. ‘리버럴 아츠’는 “나 자신을 좀 더 면밀히 알고 싶고,
더 깊이 사고하고 싶은 욕구를 통해 충실하게 배우고, 다시 그 배움이라는 행위를 통해 자기 자신을 자유로운
존재로 만들어가는 것, 기계적이고 노예적인 노동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해방시켜 나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나 스스로를 자유인으로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필요합니다. ‘나는 무엇에 쏠리어
얽매여 있는가?’, ‘무엇에 포박되어 있는지’, ‘어떤 사회구조 아래 붙들려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깊이 있게 성찰하는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나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들기란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내 몸을 바라보는 태도에 있어서는 더 그렇습니다. 최첨단 과학기술로 내 몸을 다스려주는 서양의학을
사람들은 더욱 신뢰합니다. 누구나 알듯이 서양의학은 분分과학이 대단히 발달했습니다. 가령 눈이 아프면
안과, 이가 아프면 치과, 내과 중에서도 소화기·순환기·감염 내과 등으로 세분화되어 치료를 합니다.
기술과 장비의 고도화로 급성질환이나 외상에는 탁월한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여기에 여러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약으로 인한 부작용, 나무는 보지만 숲을 놓치거나, 검사상 수치나
영상으로 미병未病 상태인데 아픔을 호소하는 경우에는 뚜렷한 치료법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이런 기관들 하나하나가 모여 내 몸이라는 전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른바 관계 속의 내 몸인 것입니다. 동양의학의 고전인 『황제내경』에 “불치이병不治已病
치미병治未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미 병든 몸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아직 병들지 않은 몸을 다스린다는
말입니다. 몸이 있어야 마음이 있고, 그런 마음은 내 몸을 가꾸어 나갑니다.
내 몸이 자유로워야 마음도 자유롭습니다. 양생養生의 의의는 여기에 있습니다. 사고로 다친 경우가 아닌
대부분의 병은 잘못된 식생활 습관에서 온다고 합니다. 내 몸을 미병未病의 상태로 유지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양생하는 삶, 곧 자연의 이치를 좇아서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나무를 보면서도 숲을
관찰할 수 있는 전체론적(Holistic)인 관점으로 내 몸을 바라보는 것이 인문 교양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 더불어숲 영남작은숲지기 이도환
|
| [샘터찬물 499번째 편지]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 꽃다운 님의 얼굴 -조희연 2026. 08. 28. |
[샘터찬물 499번째 편지]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 꽃다운 님의 얼굴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 희망봉에는 이름과는 달리 거센 바람이 쉴 새 없이 몰아칩니다.
바람에 밀려온 이랑 높은 파도가 암벽에 부딪혀 자욱한 포말로 일어섭니다. 세상을 하직하러 ‘지구의 끝’을 찾아온
노인 관광객들이 거센 바람에 밀려 발을 떼어놓지 못합니다. 이곳을 ‘폭풍의 곶’ 대신 희망봉이라고 이름 붙인 까닭이
궁금합니다.
희망봉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절망의 섬’이 있습니다. 해안에서 약 6km, 뱃길로 30~40분 거리에 있는
로벤섬이 그곳입니다. 로벤섬에는 넬슨 만델라가 구속 기간 27년 중 17년 동안 갇혀 있던 감옥이 있는 섬입니다. ……
희망봉과 절망의 섬이 서로 지척에 있었습니다.……화이트와 블랙은 단순한 색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선과 악,
희망과 절망의 대명사였습니다. 당신의 말처럼 희망은 절망의 땅에 피는 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희망이 다른 누군가의 절망이 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희망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하네스버그에는 환희의 동상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최초로 금광을 발견한 조지 해리슨이 금광석 움켜쥔 손을 높이
쳐들고 환호하는 모습입니다. 전 세계 금의 60%, 다이아몬드의 70%를 공급하고 있는 남아프리카를 생각한다면 그가
치켜들고 있는 돌멩이의 무게와 그 돌에 담긴 환희의 크기를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골드리프시티 광산에서는 다시 이 환희의 반대편을 목격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용암이 솟아오르지 않을까 두려워지는 지하 3,300m. 나는 길고 어두운 갱도에 묻힌 그 엄청난 매장량에 놀라기에
앞서 섭씨 60도의 뜨거운 열 속에서 암벽을 깨뜨리고 있는 흑인 소년들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환희의 동상과 어둠 속의 흑인 소년을 함께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누군가의 환희가 다른 누군가의 비탄이
되고 있는 경우에도 우리는 그것을 환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어두운 지하 갱도에서 마음이 돌처럼 무거워집니다.
(중략)
아프리카 대륙에서 당신의 피아노 연주를 듣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지만 내게는 참으로 뜻깊은 일이었습니다.
……피아노는 우리에게 반음의 의미를 가르칩니다. 반(半)은 우리에게 절반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반(伴)을 의미합니다.
동반(同伴)을 의미합니다. 모든 관계의 비결은 바로 이 반(半)과 반(伴)의 여백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반의 환희는
절반의 비탄과 같은 것이며, ‘절반의 희망’은 절반의 절망과 같은 것이며, ‘절반의 승리’는 절반의 패배와 다름없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절반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절제할 수만 있다면 설령 그것이 희망과 절망, 승리와 패배라는
대척의 언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동반의 자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반(半)은 절반을 뜻하면서 동시에 동반(同伴)을 뜻합니다 『더불어 숲』 중에서
궁금했습니다. ‘더불어 숲’의 근원이
찾고 싶었습니다. 우리를 모으는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
너무 큰 화두가 마음을 짓눌러 갈피를 잡지 못한 날이 여러 날입니다. 글자가 천방지축 아이처럼 뛰어다녀 붙잡지
못하고, 덤덤해지려 하면 할수록 어지러운 마음은 검게 칠한 나무처럼 아득히 빠져들어 갑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더불어 숲을 이루기까지 무엇이 나를 붙잡고 우리를 불러세워 관계의 집을 짓게 하는가,
그 시작의 주춧돌이 선생님이었다면 집의 완성은 절반과 절반의 만남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영해 바닷가 마을 오솔길에서 만난 할머니가 있습니다. 세월에 휜 허리와 굽은 다리로 돌길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계단에서 반을 덜어낸 높이가 휘청거리는 다리에도 편안히 올라가게 하고 있었습니다.
걷는 내내 낮은 반 계단이 고맙고, 돌 놓은 이의 마음이 반음의 높이로 지친 마음을 토닥여 주었습니다.
온전히 갖고 싶은 욕심을 덜어내니 그 자리에 다른 반쪽이 채워졌습니다. 대척점에 있는 다른 것들이 비로소 설 자리를
찾은 듯 의미가 생겼습니다. 그 경험을 시로 쓴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의 글에서 그 생각을 만났습니다.
먼 남아프리카에서 울리는 피아노 소리로.
‘누구도 온전한 섬이 아니다’라는 시구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희망 저편에 있는 누군가의 절망을 마주하고,
환희 너머의 비탄과 만나 이루는 연대의 힘이 우리를 오롯이 걷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어주는 마음이 있어 서로 함께 견디고 웃게 하는 힘이 됨을 깨닫습니다.
가끔 그런 마음이 뒤뚝이며 멈출 때가 있습니다. 타인의 성공과 환희 앞에서 절망의 힘도 커져 나의 신념이 넘어질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끝에 이는 바람처럼 태풍의 곶에서 희망의 봉우리가 함께 일어섬을 봅니다.
그것이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은어 떼의 힘으로, 때로는 쉬지 않고 솟아오르는 샘물이 아로새긴 감각으로 숲을
이루게 하는 힘임을 압니다. 동반에는 동심이 있습니다. 동심은 각자의 생각과 다양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마음에는 사람에서부터 뒹구는 돌멩이 하나까지도 함께 놓아주는 애틋한 마음이 다함없이 솟아납니다.
동심은 희망 저편의 절망을 나누어 갖는 마음입니다.
입추, 처서가 지나고 여름이 선물처럼 찾아왔다는 지인의 웃음에 8월 때늦은 폭염을 쉬이 지나고 있습니다.
늦은 비에 잠자리가 알 낳을 물을 찾는지 낮게 날고, 웃자란 풀들 사이 작은 나비 홀로 분주히 짝을 찾아다닙니다.
낮과 밤 사이에 풀벌레 소리는 더 높아지고, 그네들도 저마다 짝을 찾는 듯 소리가 더욱 애잔히 들립니다.
사랑이 눈멀고 귀먹게 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이 작은 풀벌레들에도 집 한쪽을 다 내어 주고 싶습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한용운 군말 중- 저마다의 마음 속 ‘기룬 것’들이 구름처럼 아득히 멀어 더
그립고 안쓰럽고 애처롭습니다. 어쩌면 글 속에 기룬 선생님의 마음도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우리들 속에 살아 있어 함께하는 힘이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더불어 숲 회원 조희연
|
| [샘터찬물 498번째 편지] 강화도의 강과 바다에서 띄우는 파란 엽서 한 장 - 배기표 2026. 08. 21. |
[샘터찬물 498번째 편지]
강화도의 강과 바다에서 띄우는 파란 엽서 한 장


얼마 전, 더불어숲 벗들과 함께 한홍구 선생님을 강사로 모시고 강화도로 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이번 기행은 더불어숲의 청소년 프로그램을 모색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무더위 속에서도 철산리 강화평화전망대에서 북녘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해 고려궁지와 성공회성당, 광성보를 거쳐 정제두 선생과 이건창 선생의 묘역을 참배하고, 하일리 바다를 마주하는 꽉 찬 일정이었습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켜켜이 쌓인 시간의 지층이 느껴졌습니다. 남과 북의 강물이 경계 없이 섞여 바다로 흘러드는 곳, 손 뻗으면 닿을 듯 북녘땅이
건너다보이는 이 분단의 최전선에서 강화의 풍경은 참으로 복잡한 감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또한 이번 기행은 조선 말기 격변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사람들의 생애를 만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광성보의 성곽과 강화해협의 빠른 물살을 바라보며 신미양요 당시 민초들의 고난과 투쟁을 되새겼고,
시대의 아픔을 꼿꼿하게 통과해 낸 강화학파 정제두, 이건창 선생의 묘역 앞에서는 오늘을 사는 지식인과 시민의 책무가 무엇인지 다시금 묻게 되었습니다.
그 격랑의 현장들을 지나 우리의 발걸음이 마지막으로 머문 곳은 하일리 바닷가였습니다.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둘러앉아 작은 엽서 한 장씩을 꺼내어 각자의 마음을 적어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쇠귀 선생님께서
『나무야 나무야』의 맨 마지막에 남겨두신 글귀를 이번 기행에 동행한 두 명의 학생이 낭독했습니다.
"당신에게 띄우는 마지막 엽서를 앞에 놓고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엽서 대신 파란 색종이 한 장을 띄우기로 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이 언젠가 이곳에 서서 강물의 끝과 바다의 시작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중략)
나는 마지막 엽서를 당신이 내게 띄울 몫으로 이곳에 남겨 두고 떠나갑니다. 강물이 바다에게 띄우는 이야기를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 남겨두신 마지막 엽서는 우리가 바다에 띄울 이야기를 적어 보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이 굽이쳐 마침내 하나의 바다로 섞여드는 이곳 강화도야말로 강물의 끝이자
바다의 시작을 생각하기에 가장 어울리는 자리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철책이 가로막고 서로를 향한 적대감으로 날을 세우고 있는 현실이지만,
우리는 그 바다 앞에서 엽서에 평화와 연대의 다짐을 꾹꾹 눌러 담았습니다. 과거 외세의 충격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던 아픈 기억을 넘어,
분단이라는 현실의 장벽 앞에서도 우리가 마주 잡은 손을 놓지 않아야 할 이유는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강물의 본성은 오히려 보다 낮은 곳을 지향하는 겸손과 평화인지도 모릅니다. 강물은 바다에 이르러 비로소 그 본성을 찾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며 가장 평화로운 물이기 때문입니다."
(『나무야 나무야』, '철산리의 강과 바다' 중)
앞으로 청년, 학생들과 함께 이 강화도의 여정을 다시 걷고 싶습니다. 이 역사의 현장에서 선생님의 글을 함께 읽고,
각자의 작은 엽서에 시대의 고민과 희망을 적어 내려가며 ‘최후의 목적’으로서의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가 이곳 강화도의 강과 바다에서 만나 띄운 엽서들이 모여, 언젠가 가장 낮고 가장 평화로운 바다에 가닿을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 더불어숲 회원 배기표
|
| [샘터찬물 497번째 편지] 아내에겐 마침표가 없다! -강태운 2026. 08. 14. |
[샘터찬물 497번째 편지]
아내에겐 마침표가 없다!
자기 변화는 최종적으로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기술을 익히고 언어와 사고를 바꾼다고 해서 변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최종적으로는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바뀜으로써 변화가 완성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변화가 개인을 단위로 완성될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 변화는 옆 사람만큼의 변화밖에 이룰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자기 변화의 질과 높이의 상한입니다. 같은 키의 벼 포기가 그렇고
어깨동무하고 있는 잔디가 그렇습니다.
“변화는 결코 개인을 단위로,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변화는 잠재적 가능성으로서 그 사람 속에 담지되는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은 다만 가능성으로서
잠재되어 있다가 당면의 상황 속에서, 영위하는 일 속에서,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자기 개조와 변화의 양태는 잠재적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한 변화와 개조를 개인의 것으로, 또 완성된 형태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근대적 사고의 잔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 『담론』 중에서
“누구야!”
방금 들어온 아내 목소리다. 심상치 않은 소리에 놀란 남자 넷은 후다닥 뛰쳐나온다.
거실 한가운데 널브러진 양말 두 짝. 누구 하나 치우는 사람은 없고, 서로 얼굴만 쳐다본다.
‘자기가 오늘 신은 양말도 몰라! ’ 아내의 일성一聲이 있고 난 뒤에야 가장 자신 없는 아이가 양말을 집는다.
아들 셋을 키우는 아내 얼굴에서 망연한 표정이 읽힌다. 나까지 합세해 아들이 넷이 되면 아내는 망연茫然을
넘어 자실自失의 경계를 넘나든다.
아빠는 발뒤꿈치, 큰아이는 엄지발가락 부위가 닳는다. 농구를 좋아하고 많이 뛰는 둘째는 뒷발 바닥
오른편이 닳는다. 무슨 이유에선지 양말을 당겨 신는 막내는 속이 비칠 만큼 앞부위가 늘어진다.
빨래를 개던 아내가 지나가는 말로 하는 얘기다. 각자 브랜드를 달리하지만,
아내는 닳은 부위만 보고도 누구 양말인지를 알아본다.
아내는 물건 하나하나의 의미와 놓여야 할 자리를 정확히 안다. 쓰고 나서 아무 곳에 방치하는 남자들하고
다르다. 남자 넷은 하루 종일 아내에게 묻는다. 차 키, 카드, 지갑, 이어폰, 오늘 입을 옷, 오늘 무얼 먹는지
끊이지 않는다. 그러니 아내는 아프면 안 되는 사람이다. 사물의 쓰임과 자리를 꿰뚫고,
사람 마음마저 꿰뚫는 자. 아프지 않고, 물음에 답을 주는 자. 내가 알기론 신이 유일하다.
집에서 아내의 위치는 신이다. 더 오를 곳이 없다. “당신은 신이야.” 내 말에 아내 표정이 순간 굳는다.
“당신이 원해서 된 자리가 아니라는 걸 알아. 내가 노력할게.” 지금 아내가 선 자리는 절벽 끝이다.
여기서 밀리면. 그다음은 상상할 수 없다. 아내의 자리는 괜찮으면 지키고, 괜찮지 않으면 지키지 않아도 되는
곳이 아니다. 그런 아내에게 “괜찮아?”라는 질문은 금기다.
아내가 선 자리는 어떤 모습일까. 아니 내가 선 자리는 어떠한가. 내 일정은 물 위에 우아하게 떠 있고,
아내 일정은 물밑에서 쉬지 않고 발을 젓는 중이다. 내 일정은 진짜 내 일정이고, 아내 일정은 가족 일정이다.
아이들 학원 일정은 나는 모르지만, 아내는 꿰차고 있다. 나는 주도적 학습을 말하며 피해 가지만,
아내는 아이 일정과 학습 진도를 아이보다 잘 안다. 내 일정엔 마침표가 있고, 아내 일정엔 마침표가 없다.
가끔 아내는 내게 묻는다. 이거 어때? 이렇게 하면 될까? 그중에는 답이 딱 보이는, 하나 마나 한 물음도 있다.
마치 아내 자신도 누군가에게 묻고 답을 듣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것처럼. 한 사람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필연적 관계에 있는 동반자가 마음을 고쳐먹지 않은 한, 우리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지금은 “당신 괜찮아?” 묻기 전에 뭐라도 하려고 노력한다. 아내가 준 기회를 지렛대 삼지 못하면
아내는 나에게 기대를 거둘지도 모른다. 그 무엇도 차마 하는 진짜 신이 되어서.
- 더불어숲 회원 강태운 -
|
| [샘터찬물 496번째 편지] 주역, 인생은 미완성 -서기용 2026. 08. 07. |
[샘터찬물 496번째 편지]
주역, 인생은 미완성
다음으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꼬리를 적시고’, ‘이로울 바가 없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끝마치지 못한다’는 일련의 사실입니다.
나는 이 사실이 너무나 당연한 서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실수와 실수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러한 실수가 있기에 그 실수를 거울삼아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요. 끝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무엇하나 끝나는 것이라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이든 강물이든 생명이든
밤낮이든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마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64개의 괘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이 미완성의 괘를 배치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 『강의』 중에서
신영복 선생님의 이 글을 읽으며 이진관의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곡을 읊조려 봅니다.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그래도 우리는 곱게 써가야 해. 사랑은 미완성 부르다 멎는 노래.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불러야 해. 사람아 사람아 우린 모두 타향인걸.
외로운 가슴끼리 사슴처럼 기대고 살자......’
요즘 주역을 다시 꺼내 읽으며 깨달은 것은 우리 모두는 각자의 여정을 만들고 있고
또한 자기만의 주역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삶의 여정을 돌아봤을 때 가장 와 닿는 주역 구절을 말하라면 重水坎卦중수감괘입니다.
“習坎습감이라도 有孚維心유부유심이면 亨형하리라. 行有尙행유상이라.
구덩이(역경)에 거듭 빠지더라도 굳은 믿음이 있고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면 형통하리라.
행함에 숭상받음이 있으리라.”
인생을 살아가며 몇 번의 구덩이에 거듭 빠지고 그 속에서 갈 길을 헤맬 때
나를 올바로 세워주고 갈 길을 나침반처럼 가리켜 준 것이 주역이고 신영복 선생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앞으로도 90리를 백 리 여정의 반으로 생각하고 유유왕有攸往(가고자 하는 바가 있음),
유부有孚(확고한 믿음이 있음), 정貞(꺾이지 않는 마음)한 삶을 만들어가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 더불어숲 나무 서기용 -
|
| [샘터찬물 495번째 편지] 별 앞의 부끄러움 - 김정진 2026. 07. 31. |
[샘터찬물 495번째 편지]
별 앞의 부끄러움
"활을 쏘아서 과녁에 적중시키지 못했을 때는 적중하지 못한 원인을 자기한테서 찾아야 합니다(反求諸己).
자기의 활 쏘는 자세를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하여 그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찾는가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반구저기의 자세란 우리를, 나를, 내부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운동의 원인은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자기반성(自己反省)이 자기 합리화나 자위(自慰)보다 차원이 높은 생명 운동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자위는 생명이 괴로움으로부터 자기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기존 상황을 합리화하고 전체 구도를 보수화하는 자위보다는 자기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자기비판이
서바이벌의 가능성을 더 높여 줍니다. 중요한 것은 작은 실패를 간과하지 않는 자기비판의 자세입니다.
실패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패의 발견이 필요한 것이며, 실패가 값진 것이 아니라 실패의 교훈이 값진
것입니다. 실패와 그 실패의 발견은 우리의 삶에 튼튼한 뼈대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안이나 결론이라기보다는 우리들의 반성적 자세입니다.
무슨 일에서건 항상 최선의 결론을 얻으려 하는 안이한 자세를 반성해야 합니다.
각자의 처지에서 부단히 고민하며 하나하나 쌓아가는 매일매일의 노력, 그 이상의 최선은 없습니다.“
『담론』과『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신영복 선생님은 반성의 본질을
'반구저기(反求諸己)'에서 찾으신다. 이는 맹자 『이루편』의 '행유부득자 개반구저기(行有不得者 皆反求諸己)에서
온 말로,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원인을 먼저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라.'라는 가르침이다.
선생님은 이를 궁사에 비유한다. 화살이 과녁을 벗어났다면 그 원인을, 활을 쏜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구저기의 정신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대한민국 양궁이다.
우리나라는 1984년 LA 올림픽 양궁대회 우승 이후 세계 최정상의 자리를 유지해 왔다. 경이로운 기록이다.
그 비결은 어떤 환경에서도 과녁을 맞힐 수 있는 집중력과 체계적 훈련에 있다고 한다. 실패를 분석하고
반복훈련을 이어가는 반성적 자기 훈련이 어떤 상황에도 과녁의 정중앙을 맞힐 수 있는 자세의 밑거름이다.
환경적 요인을 탓하는 것은 자위에 그치고 더 나은 다음을 위한 반성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반성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른 시가 윤동주의 <서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은 '코람데오(Coram Deo)'를 연상시킨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의 라틴어다. 시인의 이 마음은 종교를 넘어 인간이 지녀야 할 가장 순결한
윤리의식처럼 느껴진다. 잎새에 이는 바람과 같은 작은 흔들림에도 괴로워하는 시인의 자세야말로
자기반성의 극치다. 마치 코람데오의 삶의 태도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양한 욕망 속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라캉의 명제처럼, 타인과 비교하며 만족을 모르고 부끄러움을 놓아버린 채 비루해지는 것이 우리의 민낯이다.
이러한 현대인의 속물적인 무감각을 아프게 드러내는 소설이 박완서의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이다.
부끄러움에 민감한 주인공은 어떤 식으로든 실리만을 추구하는 남편과 허영심 가득한 동창들에게 환멸을
느끼곤 한다. 어느 날 일본 관광객 앞에서 지나치게 비굴한 태도를 보이는 여행 안내원을 보며,
부끄러움을 잊은 사회가 부끄럽다고 각성한다. 정말 이 시대에 필요한 교육은 '부끄러움 수업'이 아닐까 싶다.
맹자는 인간에게는 네 가지 선한 마음인 '사단(四端)'의 본성이 있다고 하였다. 그 가운데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羞),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惡) 마음이다.
반성조차도 자기 성공을 위한 잘못의 시정 정도로 단세포화된 요즈음, 이러한 본성을 깨우는 교육이
필요해 보인다.
반성은 성찰로 이어지는 길목이다. 반성이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자기 점검이라면,
성찰은 자신을 넘어 타인과 사회, 삶의 의미까지 사유를 확장한다. 엄혹한 일제 강점기 속에서
시인은 옳음을 선택하고, 쓰러져가는 민족에 아파하며 나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한다.
반성과 성찰을 넘은 결단의 자세이다.
인간에게 별은 현실을 이겨낼 이상과 꿈을 의미한다. 칸트가 『실천이성비판』 말미에 남긴 유명한 문장인
"내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 생각난다. 윤동주에게 '별'은 칸트의 '별'처럼 인간을
이상으로 이끄는 표상일 것이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는 별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는
결기로 느껴진다. 타인을 의식하는 의협심이 아니라 시인이 세운 옳은 길에 비추어 사는 진실한 삶이 아리게
다가온다.
부끄러움은 반성과 성찰의 출발점이다. 부끄러움이 착함만큼이나 미덕에서 멀어지고 있는 요즈음,
우리는 부끄러움, 수오지심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교육의 주요 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부끄러움은 인간을 작아지게 하는 감정이 아니라 더 나은 존재로 일으켜 세우는 양심의 힘이다.
오늘 밤, 윤동주 시인이 별을 보며 걸었을 부암동 시인의 언덕에 오르고 싶다. 별 앞에 서서 나의 부끄러움을
마주하련다. 그 부끄러움이 나의 삶을 더 나은 길로 이끌어줄 것이라 믿는다.
-더불어숲 회원 김정진
|
| [샘터찬물 494번째 편지] 더불어 숲을 만들자 -김한식 2026. 07. 24. |
[샘터찬물 494번째 편지]
“뿌리는 혼자가 아니다. 뿌리와 뿌리 사이로 균사의 실타래가 스며들어 지하의
그물망-숲의 넓은 웹-이 만들어진다. 이 지하의 인터넷을 통해 나무는 당을 보내고, 미네랄을 받고,
해충의 소식을 전하며, 그늘 속 어린나무에 한 계절을 버틸 설탕을 살짝 쥐여 준다.
쓰러진 뿌리마저 곧장 사라지지 않는다. 그 안의 물과 탄소가 천천히 흘러나와 주변의 호흡을 오래오래 지탱한다.”
- 남효창, 『우리는 모두 씨앗이다』 중에서
올해 지인으로부터 받은 책 속에서 건진 내용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말씀하신 더불어숲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라 무척 반가웠습니다.
관련 내용을 좀 더 검색해 보니 균근 네트워크 이론(Mycorrhizal Network)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균근 네트워크는 1997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의 산림생태학 교수인 수잔 시마드(Suzanne Simard)가
발견하였습니다. 식물의 뿌리와 토양 속 곰팡이의 균사가 결합해 땅속에 형성한 거대한 생태적 연결망을 구성한다고
합니다.

나무 혼자서는 숲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나무와 나무가 같은 공간에 모여 있다고 해서 숲이라 부를 수도 없습니다.
숲이 되기 위해서는 나무와 나무가 서로 도움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정보를 공유하는 연대의 관계로 함께해야
합니다. 땅속 곰팡이의 균사로 연결된 생명의 통로가 있어야 합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
기성세대와 미래세대 사이에 소통과 이해의 관계가 가능해야 더불어숲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영복 선생님께서는 지배 담론, 기득권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작은 숲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2.3. 내란을 극복하면서 사회의 많은 부분이 정상화되어 가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기득권 세력의 힘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차별과 혐오가 교묘하게 사회 곳곳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숨통을 틔우는 작은 숲이 더욱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직장에서, 내 생활 주변에서 영양분과 정보를 공유하면서
작지만 건강한 숲을 가꾸는 일이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내 주신 마지막 숙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더불어숲 회원 김한식
|
| [샘터찬물 493번째 편지] 기억하기, 진실 말하기 -허병철 2026. 07. 15. |
[샘터찬물 493번째 편지]
기억하기, 진실 말하기
“묵가가 진단한 당대 사회는 무도하고 불안한 사회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며,
강자는 약자를 억압하고, 다수는 소수자를 겁박하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고,
귀족은 천한 사람에게 오만하고, 간사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속인다.
세상은 화찬(禍篡)과 원한으로 가득 차 있다. ..(중략)...
근본적 해결 방법은 서로 차별 없이 사랑할 때 평화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묵자의‘겸애’ 사상입니다. 겸애는 기본적으로 계급철폐의 평등사상입니다”
“묵자는 천하를 이롭게 하려면 겸상애(兼想愛) 교상리(交相利)의 법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중략)..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롭게 하는 법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묵자는 오늘날의 당면 과제인 연대와 상생을 일찌감치 내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담론』‘이웃을 내 몸같이’에서
배재고 교문 앞에 놓인 화환을 보면서 어째서 우리 사회가 이토록 분열의 언어, 혐오와 증오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혐오와 무시, 조롱과 차별, 억압과 폭력의 언어들이 습기 가득한 지하에서
어느새 지상으로 올라와 거리낌없이 확산하고 있습니다. 한번 내뱉어진 ‘혐오와 증오’가 다시 ‘혐오와 증오’를
부르고 있는 이 현실이 매우 충격적입니다.
주지하듯 ‘혐오와 증오’는 민주와 인본주의의 적이며 창의와 다양성을 무시하는 일방주의 문화의 산물입니다.
단순히 ‘네가 싫다’라는 감정이 아니라, 이성적 사고를 차단하고 조직화하여, 타인을 배척하고 차별을 조장함으로써,
사회의 안전망과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인간성을 훼손하는 반사회적 언어이자 행동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묵자의 ‘겸애’ 사상이 기본적으로 계급 철폐의 평등사상이고, 묵자가‘연대와 상생’의 과제를
일찍 세상에 내놓았다고 평가하십니다. 인류사는 묵자와 같은 사상가들이 변혁의 맹아를 싹틔우고, 대중이 많은
희생을 감내함으로써 불평등과 차별에 대항하여 민주와 인권의 개념을 정착시켜 온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불평등성은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그 아류로서 신자유주의와 트럼피즘,
이에 기반한 ‘혐오와 증오’ 문화가 세상을 빠른 속도로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독일의 저널리스트 겸 작가 카롤린 엠케는 우익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소수자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진보적 가치관을 물리치기 위한 수단으로 ‘혐오와 증오’를 이용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차별주의자, 우익들은) 사회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능력이 없이 사람들의 감정을 증폭시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용하고 있다. 자신들은 안무가일 뿐이며 춤을 추는 것은 남들에게 맡긴다.”(카롤린 엠케 『혐오 사회』 2026)
혐오와 증오의 언어들은 맥락 없이 특정 주장을 연결하여 단순히 반복하는 것(프레임,밈)으로 상대의 정서를 왜곡,
장악하여 정치적, 금전적 이익이나 쾌락을 취하고자 하므로 악(惡)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극우에 맞서 진보 역시 ‘프레임’을 전략적으로 활용할 것을 주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코끼리는 생각하지마!』 2015). 이에 비해 카롤린 엠케는 증오에 증오로 맞설 순 없다며 이럴수록
‘기억하기’와 ‘진실 말하기’를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혐오와 증오를 방관하거나 침묵할 때 사실을 기억하고 진실을
말하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꺼지지 않는 우리 사회의 희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기억과 진실에 기반한 ‘연대동맹’을 이야기합니다.
누구나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는, 빠르고 편리한 세상이지만 제한된 시각으로 제한된 정보만을 취득하고,
타인의 생각을 자기 생각인 양 착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을 왜곡하고 수정하지 않으며,
잘못된 정보를 신념화하고 그것을 혐오와 증오로 표현하며, 단단한 벽을 세워 스스로를 그 안에 가둡니다.
(물론 나 역시 스스로 그러한 지도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벽들을 부수는 망치가 필요합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관계론에 기반해 보면 ‘연대’란 힘을 모아야 할 사람들의 ‘관계’이며, ‘상생’은 그 관계를 만드는
힘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마도 선생님께서는 저희에게 더욱 ‘연대와 상생’의 망치로 ‘혐오와 증오’의 벽에
과감히 맞서라고 하실 것만 같습니다.
- 더불어숲 회원 허 병 철
|
| [샘터찬물 492번째 편지] 되돌아보는 일에 대하여 -최훈 2026. 07. 09. |
[샘터찬물 492 번째 편지]
되돌아보는 일에 대하여
신영복 선생님의 학문과 삶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키워드는 ‘관계론’입니다.
선생님은 서구 중심의 근대성이 가진 ‘개인주의’와 ‘존재론’적 한계를 극복할 대안으로
동양 고전의 지혜를 빌려 관계론을 제시했습니다. 서구의 근대 철학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처럼
독립된 개개인의 '존재(Being)'를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선생님은 '관계(Relationship)'가 존재를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나'라는 사람은 고정된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내가 부모, 친구, 사회, 자연과 맺고 있는
관계의 총합이라는 뜻입니다. 한자 인간(人間)을 예로 들면 사람은 홀로 서 있는 '人'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間)'에 존재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본 것이지요.
이러한 ‘관계성’을 깨닫는 한 방법으로 ‘성찰(省察)’을 강조하셨습니다.
“성찰이란 나와 다른 사람, 나와 세계의 관계성을 깨닫는 것이고, 현재와 과거, 현재와 미래가 맺고 있는
관계성을 각성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배타적인 존재성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더 넓게 다른 것과의 관계성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닫는 것이 성찰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관계성에 대해 깊이 통찰하고 있는 인디언의 예를 들기도 합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말을 멈추고 달려온 길을 되돌아봅니다. 영혼이 따라오기를 기다립니다.
공부는 영혼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처음처럼>
한국은 구한말 세계사의 흐름에 뒤처지면서 이후 일제 강점 시기와 전쟁으로
우리 역사상 가장 비참한 시절을 겪었습니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해방 이후 가장 빠르게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이루어 내었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오는 우를 범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가 마주치고 있는 사회경제적 양극화, 물질만능, 경쟁과 능력주의, 생명 경시,
인륜 도덕의 피폐화입니다. 인디언처럼 한 번씩 말을 멈추고 우리가 가는 길이 맞는지 되돌아볼 여유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영혼이야 따라오든 말든 물신을 섬기고 잘만 살면 된다는 천박한 사회를 만들어 낸
것이지요. 최근의 스타벅스와 쿠팡 사태도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사전에서 성(省)자는 ‘적을 소(少)’와 ‘눈 목(目)’의 결합으로 나옵니다.
작고 세세한 부분까지 눈으로 살펴보는 것이 성이라는 말입니다. 또 갑골문에서는 目자 위로
‘날 생(生)’자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초목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본래 省자는 작물이 자라는지를 살펴본다는 의미였던 것이지요. 작물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거름은 잘 주었는지, 뿌리는 견고한지, 잎을 보고 앞으로 문제가 없겠는지 늘 고심합니다.
한 해의 열매를 보고도 내년에는 무엇을 고쳐야 할지 고민합니다. 그것이 성찰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제대로 성찰하고 있을까요?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질주하는 사회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열심히 뛰어가고 있지만 방향이 잘못되어 있다면 갈수록 목표와는 더 멀어집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붓글씨로 자주 쓰신 고 민영규 선생님의 글 ‘떨리는 지남철’도 그러한 위험을 경계한 것입니다.
방향이 맞는지 살피지 않고 기존의 방식만 고수한다면 결코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붓글씨를 가르치는 저는 초심자들에게 기본 필법의 하나로 삼절법(三折法)을 가르칩니다.
획을 한번 그을 때 세 번(사실 횟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만) 끊어서 전진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중간중간에 붓이 중봉을 유지하고 정렬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저는 이 삼절법이 인생살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삼절법은 뒤돌아보는 것입니다.
붓끝이 획의 중앙에 제대로 위치해 있는지, 붓이 너무 눕거나 눌려있지 않는지,
획이 제대로 전진하고 있는지 등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문제의 소지가 보이면 잠시 가던
붓을 멈춰 세우고 다시 정리하고 바로 세운 다음에 또 나갑니다. 사람의 일생에서도 이런 과정과 순간들이
필요합니다. 내가 제대로 살아오고 있는지, 지금 내 자세는 바르게 되어 있는지 뒤돌아보고,
성찰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붓글씨를 통해서도 삶을 배웁니다.
뒤돌아본다는 것은 바쁜 현대 사회에서는 비효율 혹은 뒤처짐으로까지 인식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비록 늦게 가는 일이 있더라도 때때로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더디 가도 함께 가야 합니다.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써 보았던 붓글씨의 글귀로 마무리합니다.
“성찰과 각성,그 자체로서 이미 빛나는 달성입니다.”
-더불어숲 서여회원 두메 최훈
|
| [샘터찬물 491번째 편지] 수승화강(水昇火降)으로 가는 길 -이도환 2026. 07. 03. |
[샘터찬물 491번째 편지]
『주역』은 난해합니다. 나도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읽었을 리가 없습니다.
한 권으로 오래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동양고전을 제대로 읽어 보자는 각오도 없지 않았습니다.
내가 『주역』에서 찾은 것이 『주역』 독법의 관계론입니다.
『주역』의 독법이란 괘를 읽고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그 독법이 관계론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독법이 사실은 『주역』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괘를 읽는 독법 자체가 보여주는 사유의 틀이 중요합니다.
- 『담론』 62쪽
수승화강(水昇火降)으로 가는 길
주역에서 화수미제(火水未濟) 괘는 감하리상(坎下離上)으로 물이 아래에 있고
불이 위에 있는 형국을 말합니다. 이 괘가 나왔을 때는 흉한 괘로 일을 도모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운동성이 없는 죽은 괘라는 것이지요. 한의학에서는 이런 경우를 상열하한(上熱下寒)이라고 말하며,
몸이 병든 상태를 뜻합니다. 위로는 열(熱)이 치성(熾盛)하고, 아래로는 한(寒)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
문제가 크다고 봅니다.
우리 몸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면, 가슴 위로는 심장과 폐가 활동하는 공간으로 상초(上焦)라 하고,
비위가 활동하는 가슴과 배꼽 사이를 중초(中焦)라 하고, 신장과 방광이 활동하는
배꼽 아래를 하초(下焦)라고 합니다. 위에서 말한 상열하한(上熱下寒)은 상초에는 열(熱)이 많고,
하초는 냉(冷)하다는 것입니다. 하초가 차가우면 수(水)의 기운이 상초로 올라갈 수가 없고,
거기에다가 상초의 열을 하초에 내려오게 할 수도 없습니다.
이른바 수승화강(水昇火降)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수승화강이 원활(圓滑)하게 이뤄져야 오장육부가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아래에 있는 수 기운이 올라가서 머리를 차게 만들고, 위에 있는 화 기운이 내려와서
발을 따뜻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 이른바 두한족열(頭寒足熱)이라고 하지요.
이를 주역의 괘상(卦象)으로 나타내면 수화기제(水火旣濟) 괘입니다.
이 괘의 상은 리화감상(離下坎上)으로 물이 위에 있고 불이 아래에 있는 형국입니다.
길한 괘로 살아있는 상(象)이며, 운동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배탈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계절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거나 물을 마실 때, 체질에 상관없이 더운 것을 먼저 먹고
차가운 것을 나중에 먹으면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여름날 날씨가 덥다고 찬 것을 먼저 먹으면, 특히 장이 차가운 사람들은
죽음의 길로 조금씩 다가간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옛날 화롯불이 있던 시절, 겨울에 차가운 막걸리를 주전자(酒煎子)에 데워서 먹던
어른들의 지혜를 떠올려 봅니다. 건강한 몸으로 가는 길은 내 몸에서
수승화강이 잘 이뤄지도록 하는 것임을 마음속에 새겨야 합니다.
- 이도환(더불어숲 영남작은숲지기) -
|
| [샘터찬물 490번째 편지] 마망과 어머니 -강태운 2026. 06. 26. |
[샘터찬물 490번째 편지]
마망과 어머니
'나는 항상 경계에 서고자 한다'라고 선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진영 논리를 배격한다는 뜻입니다만 그것은 세계가 분절. 대립 되어 있다는
세계관을 전제로 하는 사고입니다. 세계는 분절되어 있지 않습니다.
분절되어 있는 것은 우리의 인식 틀입니다. 결정론과 환원론은 단순 무식한 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고가 이러한 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 좌우상하의 그림을 굽혀서 원으로 만들어 보기를 권유합니다.
원으로 만들면 사실과 진실, 좌와 우가 서로 맞닿습니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하기도 합니다.
극좌와 극우는 같다고 합니다. 나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같은 것이라는 주장이 그렇습니다.
둘 다 동(同)의 논리이고 패권론입니다.
『주역』사상의 특징으로 소개했던 대대 원리에 의하면 물속에 불이 있고 불 속에 물이 있습니다.
자기의 반대 물을 자기 집으로 모시는 것이 바로 호장기택(互藏其宅)입니다.
동양적 사유는 결정론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모순과 대립의 통일과 조화가 세계 운동의 원리입니다.
<담론> 중에서
고즈넉한 미술관 길목에서 거대한 거미와 마주쳤다.
용인 호암미술관 입구에는 높이 9미터가 넘는 거미 작품이 서 있다.
잔뜩 웅크린 채 거미줄에 매달린 거미와 달리, 여덟 개의 다리로 땅을 굳게 딛고 서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알을 품은 듯 불룩한 배와 넓게 펼친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여성 조각가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는 거미를 통해 어머니라는 존재를 표현했다.
작품의 이름은 《마망(Maman)》이다. 프랑스어로 엄마라는 뜻이다.
거미는 자신이 만든 거미줄 안에서 움직이고, 기다리고, 살아간다.
거미줄은 외부의 위험을 피하면서 동시에 외부와 연결되는 독특한 세계다.
거미에게 거미줄은 자신을 지켜주는 세계다. 그래서 거미줄을 벗어나는 순간은 특별하다.
새로운 생명을 위해 땅 위로 내려가 알집을 만들 때가 그렇다.
거대한 거미의 위용에 취해 미처 알지 못했지만, 지금 마망은 자신을 보호하던 거미줄 밖에 서 있다.
더 이상 안전한 공간 안에 머물지 않는다. 보호 장치로부터 떨어져 나온 몸은 가장 취약한 상태가 된다.
포식자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마망의 여덟 다리는 단순한 신체가 아니다.
불안과 상처를 품은 존재가 그럼에도 자신보다 먼저 지켜야 할 존재를 향해 뻗은 울타리다.
인간 세상으로 돌아오면 이 울타리는 언제든 다른 얼굴을 가진다.
극좌는 극우와 같듯이, 보호가 지나치면 자식을 가두는 철창이 된다.
자식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마음은 본능에 가깝다.
그러나 부모가 살아낸 시간은 그 울타리의 모양을 바꾸기도 한다.
어떤 경험은 울타리를 더 촘촘하게 만들고, 어떤 기억은 그 높이를 지나치게 높인다.
그렇게 내가 세운 울타리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보지 못하면, 보호와 구속의 경계도 흐려진다.
내가 지키고 있다고 믿는 대상은 정말 누구일까. 혹시 나 자신은 아닐까.
- 더불어숲 회원 강태운 -
|
| [샘터찬물 489번째 편지] 논물 속 구름 들추고 -조희연 2026. 06. 18. |
[샘터찬물 489번째 편지]
논물 속 구름 들추고
담천이라 아직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는 일 없이 앉아서 땀만 흘리는 이곳의 여름이 몹시 부끄러운 것입니다만
아무리 작고 하찮은 일이더라도, 새 손수건으로 먼저 창유리를 닦는 사람처럼,
무심한 일상사 하나라도 자못 맑은 정신으로 대한다면
훌륭한 ‘일’이란 징심(澄心) 도처에서 발견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형님께서도 어려움이 많으시리라 생각됩니다.
저녁에 등불을 켜는 것은 어려운 때 더욱 지혜로와야 한다는 뜻이라 믿습니다.
우용이·주용이에게 그림 그렸습니다.
-저녁에 등불을 켜는 것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첫 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다시 펼쳐 읽기 시작한 지 두 달이 지났습니다.
누렇게 바랜 책의 모퉁이를 접으며 글 속 시간을 더듬고 있습니다.
‘영호’의 책이 어떻게 제 책장과 인연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1988년 9월 1일에 인쇄되어 5일에 발행된 햇빛출판사의 책, 3,500원 너무 헐한 값에도 아랑곳없이
세월의 무게가 더해져 묵직한 힘으로 압도됩니다. 말은 정갈하고 몸가짐은 꼿꼿하며, 정은 낮은 곳을 향하고,
생각은 매 순간 깊이를 더해 허투루 책장을 넘기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는 동안 아꼈던 민들레는 다문다문 잎사귀만 덩그러니 남고,
논물 맑은 곳에 벼들은 제법 굵어져 녹색이 더욱 짙어갑니다.
피고 지고, 가고 오는 계절 속에 책과 나만 있는 듯합니다.
깊은 울림은 파문이 일어 멈추지 않고 물무늬를 새깁니다.
사방이 벽, 꿈조차 징역살이인 삶은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혀 옵니다.
그러나 자신의 슬픔보다 타인의 수많은 비참함을 보듬던 갇힌 곳에서의 한 생이 척박한 땅에서
온전히 뿌리를 내리고 강인한 힘으로 걸어 나와 휘지 않는 근원의 힘을 바라보게 합니다.
논물 속 여름 저녁이 깊어 갑니다.
낮게 깔리는 구름에도 뻐꾹새 소리, 개구리 소리는 목을 곧게 세워 맑은 생각을 깨우고,
이 저녁 집집마다 켜는 불빛에서 어둔 밤을 밝히는 지혜를 배웁니다.
벌레 먹은 사과를 깎다가 문득,
꽃은 바람 끝에 길 내고
나방은 어둠 속에 길 내고
애벌레 한 마리
햇살을 달고
사과 속에 갇힌 어둠 밝히고 있었다
사과 한 알 온몸으로 길 내어주고 있었다
좁고 어두운 길
구부러져 휘어가도
중심은 늘 너를 기다리고
길 아닌 길
길 없는 길에
칡덩굴 하나 휘고 있었다
둥근 허공
텅 빈 어디에 길 있는지
냇바람 흔들며
어둠 속에 꽃을 달고 있었다
나뭇가지 홀로 뻗는 곁에
덩굴손 허공에서 길 잃어도
이내 이끌리는 중심의 중력
휘어도 휘지 않는 건
날고 있어도 나는 줄 모르는
익숙한 날갯짓 같은 것
갈 길 잃고 머뭇거릴 때
솔가지에 내려앉는
저녁 새 소리
뻗어가는 모든 것에 길 있다고
온몸으로 길 내어 주고 있다고
- 더불어숲 회원 조희연
|
| [샘터찬물 488번째 편지] 씨뿌리는 사람 - 서기용 2026. 06. 12. |
[샘터찬물 488번째 편지]
씨뿌리는 사람
그간 어머님, 아버님께서 강령하시오며 가내 두루 평안하시리라 믿습니다.
열여드레나 내리 비닐 창에 상화(霜花)가 만발하더니 어제,
오늘 얼음 한 점 없는 창밖으로 밝고 이른 새벽이 있습니다.
어머님께서 염려하시는 겨울 추위도 이제 큰 고비는 넘긴 듯합니다.
고중장구와족제 양춘부래답곤기
(庫中藏具臥足齊 陽春復來踏閫起)
창고 속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 농기구들도 머지않아 봄이 오면
문 열고 일어서서 들판으로 나갈 것입니다. 자(字) 모둠 해본 절구 한 짝 적었습니다.
오늘이 우수, 경칩을 넘기고 나면 헛간에 누운 농구(農具)도 손질하고 봄볕에 겨울 옷가지를 널 때입니다.
그 흔한 엑스란 내의 한 벌 없이 밤중에 찬물 먹으며 겨울을 춥게 사는 사람들 틈새에서 해마다
어머님의 염려로 겨울 따뜻이 지내는 저는 늘 옆 사람에게 죄송합니다.
봄은 내의와 달라서 옆 사람도 따뜻이 품어줍니다. 저희들이 봄을 기다리는 까닭은
죄송하지 않고 따뜻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읽고 영치시킨 책이 상당하리라 짐작됩니다.
자동차로 접견 오시는 걸음이 있으시면 차하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농구(農具)들이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삶의 간절함이자 희망입니다.
우리의 삶은 절망보다는 희망이 늘 많기에 살아갈 만한 것이고 또한 즐거운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염청서소(染靑書巢)에는 빈센트 반 고흐의 씨뿌리는 사람(The Sower, 1888년) 실물 크기의 영인본이 있습니다.
매일 아침 서실 창문을 열고 고흐의 그림을 보는 것은 하루를 더욱 희망적으로 시작하기 위한 저만의 루틴입니다.
처음에는 그림의 계절이 이른 봄의 아침인 줄 알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배경에 밀이 익어 수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는 초여름을 뜻했습니다.
고흐의 편지를 읽다 보니 고흐가 이 씨뿌리는 사람을 저녁나절에 그렸다고 합니다.
결국 이 그림은 밀이 익어가는 초여름 저녁나절 찬란하게 지는 태양 빛을 등지고 농부가
대지에 씨를 뿌리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고흐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풍경을 사실적으로 기록하는 것을 넘어,
생명의 순환(죽음과 탄생)이라는 거대한 시간의 흐름을 자신의 강렬한 색채와
그 두께감(임파스토 Impasto)으로 표현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역경과 희망, 빈센트 반 고흐의 절망과 희망을 한참 동안 생각해 보았습니다.
희망과 절망은 마치 꽃과 그 꽃받침이 함께 존재해 씨앗을 영글게 하듯 우리의 삶을 이루는
기본적인 음양(陰陽)적 요소라 생각했습니다. 주역(周易)의 이치와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 더불어숲 나무 서기용 -
|
| [샘터찬물 487번재 편지] 연천 태풍전망대에서 쇠귀 선생님의 〈베를린의 장벽〉을 떠올리며 -배기표 2026. 06. 05. |
[샘터찬물 487번재 편지]
연천 태풍전망대에서 쇠귀 선생님의 〈베를린의 장벽〉을 떠올리며

얼마 전, 함께하는 연구회 선생님들과 연천으로 평화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남과 북이 가장 가까이 마주하고 있다는 태풍전망대에 올랐습니다.
철책 너머 가까운 곳에서 작업 중인 북한 군인들의 모습도 육안으로 보였습니다.
북녘의 산하와 사람들을 바라보며, 새삼 우리가 딛고 선 이 땅의 허리가 잘려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흐르는 임진강과 불어오는 바람에는 아무런 경계가 없건만,
우리의 발걸음은 차가운 철책선 앞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었지요.
태풍전망대에서 철책과 마주하는 동안,
쇠귀 선생님께서 독일의 통일과 우리의 분단을 비교하며 두 나라의 '분단선'이 지닌
공간적 차이를 짚어주신 글귀가 떠올랐습니다.
"베를린에서 느끼는 첫 번째 감회는, 분단 독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은 우리의 판문점과는 달리
독일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독일의 수도 베를린의 한가운데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이목이
쏠렸던 곳에 세워져 있습니다. 산골짝의 판문점과 녹슨 기찻길을 먼 곳에 두고 있는 우리와는 달리
독일의 장벽은 독일인들의 가슴에서 일상의 아픔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독일의 통일은 독일인들의 가슴에서 한시도 떠날 수 없었던 절실한 과제였습니다."
독일의 베를린 장벽은 도시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었지요.
사람들은 매일 아침 출근길에, 창문을 열 때마다 일상에서 그 장벽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분단이 이처럼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 안에 있었기에, 그것을 극복하고 허물코자 하는 열망 역시
삶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 우리의 분단선은 일상생활의 공간과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분단이라는 엄혹한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일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철책선이 눈앞에서 멀어진 만큼 분단에 대한 아픔도, 평화에 대한 절실함도,
통일에 대한 고민도 우리 삶의 바깥으로 밀려나 버리는 것은 아닌지요.
어떻게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분단을 우리의 일상 속으로 불러올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이 현장이든, 영상이든, 사진이든 철책을 한 번이라도 더 눈으로 보고,
관련된 글을 읽으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 일상에서의 작은 노력이
서로를 잇는 첫걸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쇠귀 선생님은 같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직도 분단의 고통을 조금도 벗지 못하고 있는 우리 처지로서는 통일 독일에서 확인하는 활성과 약진은
부러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통일에 앞서 먼저 이산과 증오를 청산해야 할 뿐 아니라,
막대한 분단 비용을 청산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선진국 진입이 가능하다고 믿는 허상을 깨트리는 것이
먼저이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우리의 통일이 이데올로기 대립이라는 낡은 모순을 넘어서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면서 "독일의 통일, 그것은 분명 우리가 모델로 삼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꾸준한 교류와 협력을 통하여 먼저 민족적 신뢰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사실만은
배울 수밖에 없는 모델임이 틀림없습니다."라고 하셨지요.
최근 북한이 수십 년간 이어온 '우리 민족끼리'라는 통일 노선을 폐기하고,
남북 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로 공식 규정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또 태풍전망대에서는 남북 교류의 상징이었던 노래 '반갑습니다'가 북한에서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는
씁쓸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우려 장벽을 높여가는 지금, 가만히 '반갑습니다'를 흥얼거리고,
'비둘기야 높이 날아라'를 듣는 것. 이런 작은 행동이 바깥으로 밀려난 분단의 현실을 내 일상 속에 불러오는
나만의 일상의 실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올해는 더불어숲 벗들과 함께, 일상에서 길러낸 평화의 마음들을
나눠가면 좋겠습니다. 분단의 철책을 마침내 녹여낼 그날을, 오늘 여기서 미리 불러봅니다.
- 더불어숲 회원 배기표
|
| [샘터찬물 486번째 편지] 학교 놀이터에서 - 김한식 2026. 05. 28. |
[샘터찬물 486번째 편지]
학교 놀이터에서
"오늘은 5학년하고 1학년이 노는 날인데, 6학년이 왜 들어왔어?"
"지난번에 우리 노는 날에 5학년도 와서 놀았다고요."
"그럼 5학년들이 잘못한 거네. 선배들이 모범을 보여주면 어떨까?"
"저기 여자애들도 나가야 해요. 왜 우리한테만 뭐라 그러세요? 공정하게 해야죠."
"알았어. 쟤들한테도 나가달라고 얘기할 거야."
얼마 전 새로 생긴 학교 놀이터가 인기가 많아서 요일별로 사용 학년을 나누어서 운영하던 중에 있었던
6학년 남학생들과 대화한 내용입니다. 모두가 매일 같이 놀면 이런 일이 없었겠지만,
한정된 공간에 많은 학생들이 몰려서 위험할 수도 있어 규칙을 정해서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기르는 것이 학교의 중요한 목표임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서 그런 태도를 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아이들의 욕망이 집중된 곳일수록 이런 갈등은
자주 일어납니다.
아이들은 흔히 공정에 대해 민감합니다. 문제는 공정 뒤에 있는 자신의 이익을 감추는 일입니다.
"다른 애들도 그랬는데, 왜 우리한테만 그래요?"
"여자애들한테는 뭐라 안 하고 남자한테만 그러잖아요."
공정을 내세우면서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부분, 공동체에 피해를 주는 잘못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외면하려는 태도를 보여서 마음이 아픕니다.
"이처럼 무사(無私)하기 때문에 공평(公平)할 수 있고
공평하기 때문에 이치가 밝아질(天理明)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집단이기주의와 이해관계 집단의 주장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그 주장과 논리가 사사로운 것이기 때문이지요."
- 신영복 고전 강독 《강의》 논어 편 중에서
6학년 남자아이들 모습에서 20대 남성들이 겹쳐 보이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공정을 내세우면서 상대방의 어려움을 살피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우는 어른으로 자랄까
걱정이 앞서게 됩니다. 놀고 싶은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주면서 좀 더 부드럽게 이야기 나눴다면 어땠을까?
규칙을 세우는 과정에서 아이들과 충분히 이야기하면서 규칙을 정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학교는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곳이어야 하고, 학생은 민주적인 절차를 경험하면서
나의 권리와 상대의 권리가 부딪힐 때 어떤 과정을 거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배우며 성장해야 합니다.
이런 고민이 학교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에서 함께 해 나가길 바랍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가르침처럼 보다 무사(無私)한 구성원들이 공평(公平)을 이야기하면서
사회가 좀 더 밝아지길 희망합니다.
- 더불어숲 회원 無愁 김한식
|
| [샘터찬물 485번째 편지] 타인의 행복은 자신의 행복의 조건 - 노병준 2026. 05. 22. |
[샘터찬물 485번째 편지]
타인의 행복은 자신의 행복의 조건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무지와 질병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오랜 역사를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과 방향에 있어서 우리는 실패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더 많은 자유는 언제나 더 큰 구속과 불평등을 동반함으로써 자유의 의미를 회의하게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소비하고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이러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예술과 문화소비마저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고 있을 뿐 아니라
욕구 그 자체를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자본운동 속에서 우리의 자유는 언제나 더 큰 욕구 앞에서
목마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발전의 원리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자유와 행복의 원리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는 현실이
그것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그런 점에서 평등이 자유의 최고치라는 당신의 말을 믿습니다.
생각하면 이것은 ‘타인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평범한 양식(良識)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등은 자유의 실체이며 내용입니다. 자유는 양적 접근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일 뿐입니다.
<나무야 나무야> 중에서
지울 수 없는 시대의 아픔이자 민주공화국의 정체성을 각성시킨 5․18 광주민주항쟁(이하 5․18)이
올해로 46주년입니다. 새삼 어느새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생각하던 5․18의 의미를 돌아보면서 선생님께서는 5․18에 대해 어떤 말씀을 남기셨는지
가진 책들을 뒤적여 보기도 하고 보도기사들을 살펴보았습니다만, 여기에 언급할 만한 구체적인 내용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아마도 5․18 기간 수감 중이셨기 때문에 5․18이 가진 역사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는
언급하시되 구체적인 내용의 언급은 삼가시지 않았나 추측할 따름입니다.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학생들을 시작으로, 계엄군이 일반 시민들까지 가혹하게 탄압하자,
당시 광주 시민들은 무차별적인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맞섰습니다. 그것은 피로 얼룩진 학생들과 죄 없이
폭행당하는 시민들의 고통을 자신의 불행의 조건으로 받아들인 시민들의 평범한 양식으로 만들어진 연대입니다.
저는 우리 민주공화국의 정신이 정치적인 민주화나 방임적 자유주의를 넘어, 이제 1980년 광주 시민들이 보여준
그리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자유의 최고치인 평등을 지향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K-민주주의를 말하는 우리의 현실은 열악한 현장의 외국인 노동자, 방치된 아동 등 우리의 불편과 고통을
전가시켜 불행한 결말을 맞는 사회적 약자들의 소식을 쉽게 접하는 것입니다.
최근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이 또다시 정치적 이해관계로 좌절되었습니다.
반세기를 넘기기 전에 헌법 전문 수록을 통해 민주공화국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보편적 가치로서
5․18 정신을 새기는 것은, 시대의 소명이자 K-민주주의 시대를 누리는 우리들의 의무일 것입니다.
- 더불어숲 회원 노병준 -
|
| [샘터찬물 484번째 편지] 스승의 날에 ‘스승’을 생각하며 -허병철 2026. 05. 15. |
[샘터찬물 484번째 편지]
스승의 날에 ‘스승’을 생각하며
“모든 존재는 인과 과의 관계에 있으며, 동시에 과와 인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배우는 제자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또 가르치는 스승의 입장에 서있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은 스승이면서 동시에 제자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강의』 ‘나비 꿈’에서
“사람은 스스로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 ‘스스로 도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음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아라공의 시구를 좋아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983.3.29.에서
학창 시절을 떠올릴 때면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가 생각납니다.
80년대 학교는 반공과 병영화 교육(교련)이 필수였고
체벌과 폭력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참 이상한 공간이었습니다.
교권은 체벌권이었고, 학생 인권이란 말은 듣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존경스러운 선생님도 계시긴 했습니다만,
대개는 시류에 체념하거나 편승하시는 분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스승’과 ‘제자’라 할 만한 관계 형성은 어려웠으며,
저의 인생의 ‘스승’을 만나고 싶었던 어릴 적 꿈도 막연한 공상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생전의 신영복 선생님을 뵙지 못한 저로서는 선생님과 직접 친분이 있었던 많은 분을 부러워하면서
그나마 남아있는 자료를 통해 여러 상상을 해 보곤 합니다. 과연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어떤 스승이셨을까. 관련된 여러 이야기가 많지만, 그중 최근에 읽은 탁현민의 책
(『사소한 추억의 힘』 2023. ‘나의 스승, 나의 친구’ 편)에서 선생님의 진면목을 일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 ‘스승’이란 “병아리가 알 속에서 우는 소리를 낼 때, 밖에서 껍질을 쪼아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어미”와 같은 분, 또는 “그 병아리에게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분”이 아닐까,
바로 그분이 선생님이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스승’이란 말에 참 어울리는 분 같습니다.
책에서 나오는 구절 중에 ‘엄밀한 의미에서 스승은 목표가 될 수 없어요.
다만 참고될 뿐이에요. 그러니 각자가 부단히 새로운 길과 방법을 찾아가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제자이면서 누군가의 스승으로 살아갑니다’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일방적인 ‘교육-피교육의 관계’가 아니라 실체성, 존재성의 바탕에서
상호 긍정적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라 생각됩니다. 물론 스승의 역할은 우선 무언가를 ‘가르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만,
가르치는 것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고 ‘함께 비를 맞는 것’이 되니
이러한 ‘스승’의 상은 매우 중요한 인식의 전환이며, 삶의 통찰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스승의 날에 ‘스승’으로서 다시 선생님을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남기신 ‘가르침’에서
나는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가, 과연 잘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합니다.
우리 더불어 숲에서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라 저마다 서로에게 스승과 제자이면서
함께 연대와 희망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안한 삶,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인생이란
벽을 끝없이 넘어가야만 하는 우리에게 현명한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불어숲 회원 허 병 철
|
| [샘터찬물 483번재 편지] 한송이 팬지꽃 - 최 훈 2026. 05. 08. |
[샘터찬물 483번재 편지]
한송이 팬지꽃
바야흐로 5월입니다. 나무 가득 흰 밥풀을 붙이고 있는 이팝나무가 달밤 아래 하얗게 빛납니다.
포슬눈으로 시작하다 어느새 함박눈으로 변해 내리는 겨울의 하얀 풍경은 동화 속의 순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역시 사람들은 추운 겨울보다는 따뜻한 봄을 더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2월의 흰 눈 속에 벌써 노란 얼굴을 내미는 복수초를 시작으로 봄까치와 노루귀가 수줍게 피어나면 새봄이 왔다는 반가움에 마음은 설레기 시작합니다. 이어 자연이 마련해 둔 꽃차례대로 매화에 살구꽃 복사꽃 피고 산수유와 개나리 진달래가 연이어 피어나면 봄 들판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우리들의 마음은 싱숭생숭 바깥을 향하게 됩니다. 마침내 흐드러진 벚꽃이 허파에 한껏 바람을 불어넣는 4월이 오면 명자꽃, 황매화에 수선화, 라일락까지 꽃향기에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잡기 어려워집니다. 다행히 작고 하얀 여러 종류의 조팝나무꽃들이 마음을 가라앉혀주어 이제 곧 여름이 오리라는 걸 눈치채게 해 줍니다. 그렇게 5월이 우리 앞에 왔습니다.
5월에는 내가 좋아하는 쪽동백꽃도 오롱조롱 피어날 것이고, 아카시꽃과 찔레꽃 인동초꽃 등 향기가 더 진한 꽃들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누구나 만나고 싶은 꽃을 때맞춰 기다리기만 하면 언제나 만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로 어딘가에 갇힌 사람들입니다.
신영복 선생님도 20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감옥은 외부와 단절된 공간이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제한되어 있지만 자연의 동식물을 접하기도 어려운 곳입니다.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바뀌는 자연의 풍경을 마주하는 것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일 수도 있지만, 내가 땅 위를 밟고 서 있다는 사실과 대지와 맺고 있는 유대감과 안정감을 확인시켜 주는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감옥은 실천이 배제된 외발걸음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자연과의 연결성마저 최소한으로 억제된 공간인 것입니다.
감옥 생활 10년이 지나서야 선생님은 조금씩 자연의 일부분과 조우하게 됩니다. 1978년 선생님은 개미 한 마리가 물어다 주었을지도 모르는 작은 풀씨 한 알이 옥창 좁은 곳에서 한 뼘도 넘게 자랐음을 발견합니다. 그 이듬해에는 어디선가 날아든 민들레씨 하나를 언급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1980년 5월의 엽서에서는 작은 비닐화분에 담아 온 팬지꽃이 여남은 개의 꽃을 피워낸 것을 보고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한 줌도 채 못 되는 흙 속의 어디에 그처럼 빛나는 꽃의 양식이 들어 있는지… 흙 한 줌보다 훨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내가 과연 꽃 한 송이라도 피울 수 있는지"
세상을 이루는 기본 요소로서 우리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을 말하곤 합니다. 땅과 물과 햇빛과 공기입니다. 한 송이 팬지꽃이 몸담은 작은 비닐화분 안의 얼마 되지 않는 흙 속입니다. 꽃이 피기 위한 조건인 수화풍도 지(地)가 있은 연후의 일이고 보면, 우리가 늘상 밟고 다니는 땅과 흙이 모든 생명의 어머니라고 하는 말이 절대 상징적인 비유에 그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웬만한 절에 모셔져 있는 지장보살(地藏菩薩)도 바로 이 대지에 감사하고 든든하게 생명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발현된 것일 겁니다. 흙을 들여다보던 선생님은 곧바로 나는 과연 꽃 한 송이라도 피울 수 있는지 스스로를 되돌아봅니다. 팬지꽃 한 송이를 들여다보며 부끄러워하고 겸손해하시던 선생님은 우리가 알다시피 출소 후 많은 꽃송이를 피워 내십니다. 가족이라는 관계에서, 학생들과 동료 선생님들과의 관계에서, 서도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우리 사회의 낮은 곳과 연대하면서..
감동적인 팬지꽃과의 만남 한 달 후, 이번에는 작업장에 메리골드 한 포기를 데려왔습니다. 물이 부족해 목을 걸치고 죽어 가던 꽃을 장송의 의례에 가까운 심정으로 흥건히 물을 뿌려 쓰레기통 옆에 치워 두었는데 얼마 후 놀랍게도 힘차게 팔을 뻗고 일어서 있는 꽃을 발견합니다. 선생님이 그 힘든 감옥생활을 이겨내는데 작은 풀씨 한 알과 팬지꽃과 메리골드와의 만남이 얼마간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저 혼자만의 생각일까요. 이 꽃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선생님의 핵심적인 사유라고 할 수 있는 ‘관계론'이 더 굳건해졌다고 생각한다면 저의 과한 상상력일까요.
선생님은 이미 70년대 중반 서예에 매진하면서 ‘서도의 관계론'이라는 우이 서예의 기본 철학을 이미 정립하고 있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만, ‘서도의 관계론’과 ‘사람의 관계론’을 넘어 ‘자연의 관계론’으로 확장할 수 있었던 데는 자연과의 만남에서 느낀 생명의 경이에서 일정 부분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이후 선생님은 ‘잡초를 뽑으며(1984.9)’에서 잔디만 남기고 잔디 외의 풀은 사그리 뽑으며 육군사관학교 시절과 남아연방과 운디드니의 인디언에게까지 사고를 확장합니다. 단지 인간이 그 이름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잡초로 규정한 풀을 뽑으며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으로 쇄도합니다. 이미 1968년에 잡초로 규정되어 뿌리까지 뽑힐 뻔했던 당신의 상황을 거시적으로, 역사적으로 되돌아보고, 날 때부터 이미 지니고 있었던 천부의 인권과 당당함으로 당신을 힘차게 세우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그 후에도 선생님은 ‘입장의 동일함'이 관계의 최고 형태임을 확인하시고(1984. 11), 출소 후 세계를 주유하면서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히말라야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남겨 주셨습니다. 히말라야 사람들은 정상을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사실과, 히말라야의 어둠과 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궁극적으로 자연이 허락하는 문명의 크기를 생각하기를 권유합니다. 또 아마존 지역을 방문하신 후에는 ‘인간적인 사람’이라는 말이 이제는 더 이상 칭찬이 못 되며 차라리 ‘자연적인 사람’이 칭찬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시게 됩니다(더불어숲, 1998). 선생님은 이미 ‘사람의 입장’을 넘어 ‘생명의 입장’에서 관계론을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일찍이 신라의 최치원 선생이 풍류도의 핵심 이념으로 ‘접화군생(接化群生)’을 말했듯이, 생명의 원리는 관계성과 순환성, 다양성에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물과 무생물을 막론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순환하고 변화하지 못하면 썩게 되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획일화되면 굳어지고 진화하지 못하게 됩니다. 나만 따르라고 겁박하는 것은 관계를 무너뜨리고, 변화를 거부하고 다양성을 배제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생명이 자라날 공간은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가 약자에 더 관대해져야 하는 이유와 세상을 더 다양하고 평등한 곳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도 드러납니다.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5월, 들판으로 나가 꽃들에 눈길을 주어 보세요. 들판의 꽃씨 하나에서 우주의 비밀을 발견해 내는 기쁨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내가 우주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 찾아보시기를 권합니다. 지상의 꽃 하나가 피어나면 밤하늘의 별 하나도 반짝이고, 그 별빛은 지구의 어느 곳에서건 우리의 머리 위에서 똑같이 빛납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듭니다.
-더불어숲 회원 최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