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터찬물 489번째 편지]
논물 속 구름 들추고
담천이라 아직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는 일 없이 앉아서 땀만 흘리는 이곳의 여름이 몹시 부끄러운 것입니다만
아무리 작고 하찮은 일이더라도, 새 손수건으로 먼저 창유리를 닦는 사람처럼,
무심한 일상사 하나라도 자못 맑은 정신으로 대한다면
훌륭한 ‘일’이란 징심(澄心) 도처에서 발견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형님께서도 어려움이 많으시리라 생각됩니다.
저녁에 등불을 켜는 것은 어려운 때 더욱 지혜로와야 한다는 뜻이라 믿습니다.
우용이·주용이에게 그림 그렸습니다.
-저녁에 등불을 켜는 것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첫 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다시 펼쳐 읽기 시작한 지 두 달이 지났습니다.
누렇게 바랜 책의 모퉁이를 접으며 글 속 시간을 더듬고 있습니다.
‘영호’의 책이 어떻게 제 책장과 인연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1988년 9월 1일에 인쇄되어 5일에 발행된 햇빛출판사의 책, 3,500원 너무 헐한 값에도 아랑곳없이
세월의 무게가 더해져 묵직한 힘으로 압도됩니다. 말은 정갈하고 몸가짐은 꼿꼿하며, 정은 낮은 곳을 향하고,
생각은 매 순간 깊이를 더해 허투루 책장을 넘기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는 동안 아꼈던 민들레는 다문다문 잎사귀만 덩그러니 남고,
논물 맑은 곳에 벼들은 제법 굵어져 녹색이 더욱 짙어갑니다.
피고 지고, 가고 오는 계절 속에 책과 나만 있는 듯합니다.
깊은 울림은 파문이 일어 멈추지 않고 물무늬를 새깁니다.
사방이 벽, 꿈조차 징역살이인 삶은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혀 옵니다.
그러나 자신의 슬픔보다 타인의 수많은 비참함을 보듬던 갇힌 곳에서의 한 생이 척박한 땅에서
온전히 뿌리를 내리고 강인한 힘으로 걸어 나와 휘지 않는 근원의 힘을 바라보게 합니다.
논물 속 여름 저녁이 깊어 갑니다.
낮게 깔리는 구름에도 뻐꾹새 소리, 개구리 소리는 목을 곧게 세워 맑은 생각을 깨우고,
이 저녁 집집마다 켜는 불빛에서 어둔 밤을 밝히는 지혜를 배웁니다.
벌레 먹은 사과를 깎다가 문득,
꽃은 바람 끝에 길 내고
나방은 어둠 속에 길 내고
애벌레 한 마리
햇살을 달고
사과 속에 갇힌 어둠 밝히고 있었다
사과 한 알 온몸으로 길 내어주고 있었다
좁고 어두운 길
구부러져 휘어가도
중심은 늘 너를 기다리고
길 아닌 길
길 없는 길에
칡덩굴 하나 휘고 있었다
둥근 허공
텅 빈 어디에 길 있는지
냇바람 흔들며
어둠 속에 꽃을 달고 있었다
나뭇가지 홀로 뻗는 곁에
덩굴손 허공에서 길 잃어도
이내 이끌리는 중심의 중력
휘어도 휘지 않는 건
날고 있어도 나는 줄 모르는
익숙한 날갯짓 같은 것
갈 길 잃고 머뭇거릴 때
솔가지에 내려앉는
저녁 새 소리
뻗어가는 모든 것에 길 있다고
온몸으로 길 내어 주고 있다고
- 더불어숲 회원 조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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