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터찬물 481번째 편지]
콜럼부스의 달걀
콜럼부스의 달걀은 발상전환(發想轉換)의 전형적 일화입니다.
발상의 전환 없이는 결코 경쟁에 이길 수 없다는 신자유주의의 메시지로 오늘날도 변함없이 예찬 되고 있습니다.
아무도 달걀을 세우지 못했지만 콜럼부스는 달걀의 모서리를 깨트림으로써 쉽게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발상 전환의 창조성이라고 하기보다는 생명 그 자체를 서슴지 않고 깨트릴 수 있는 비정한 폭력성이라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감히 달걀을 깨트릴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달걀이 둥근 모양인 것은 그 속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모(角)지지 않고 둥글어야 어미가 가슴에 품고 굴리면서 골고루 체온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타원형의 모양으로 만들어 멀리 굴러가지 않도록 하거나, 혹시 멀리 굴러가더라도 다시 돌아오게 한 것 모두 생명을 지키기 위한 고뇌의 산물입니다.
그러한 달걀을 차마 깨트리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과 그것을 서슴없이 깨트려 세울 수 있는 사람의 차이는 단지 발상의 차이가 아닙니다.
인간성의 차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은 콜럼부스 개인의 이야기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그것을 천재적인 발상 전환이라고 예찬하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콜럼부스가 도착한 이후, 대륙에는 과연 무수한 생명이 깨트려지는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생명이 무참하게 파괴되는 소리는 콜럼부스의 달걀에서부터 오늘날의 이라크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곳곳에서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처음처럼』 - “콜럼부스의 달걀”
우리는 절대적 진실이 무너진 시대를 산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세상을 본다. 같은 사건도 누구의 자리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진실이 된다.
식민지 지배를 ‘근대화’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폭력과 수탈’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재개발을 ‘발전’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에게 그것은 ‘파괴’다. 절대적인 진실은 없다. 저마다의 진실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진실이 다르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데미안 허스트: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 전시가 논란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죽음의 진실에 다가가려는 성찰보다, 죽음을 소비 가능한 대상으로 보이게 하는 작품 방식, 개별 존재의 고유함이 아니라,
시각적 아름다움을 가진 오브제로 읽히게 만드는 구성. 이 전시를 둘러싼 불편함에는 이유가 있다.
진실이 없다는 말이, 모든 것을 허용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사람마다 진실이 다르다고 해서,
인류가 어렵게 지켜온 보편적 가치를 해치는 일까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약자를 짓밟는 일,
말 못 하는 동물을 수단화하는 일, 강자에게 아첨하는 일, 손길이 필요한 곳을 외면하는 일까지 ‘나의 진실’이라는 말로 덮을 수는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분별이다. 사랑도 분별이 먼저다. 내가 하려는 일이 이 시점에서, 이 상황에서, 우리 사회에 정말 유익한가.
내가 내민 손은 시간과 맥락, 도덕과 가치에 맞게 닿고 있는가. 현실을 직시해야 할 자리에서 미래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은지,
미래를 지향해야 할 자리에서 현실에만 머물고 있지는 않은지. 손길이 필요한 곳에서는 주저하고, 잡지 말아야 할 손은 덥석 잡고 있지는 않은지.
그렇게 약자에게는 엄하고, 강자 앞에서는 한없이 너그러워지고 있지는 않은지.
진실은 다를 수 있다. 다만 그 진실은 분별이라는 대지 위에 뿌리내릴 때만 의미를 가진다.
지금은 콜럼버스의 시대가 아니다. 선을 넘어도, 우리는 너무 많이 넘었다.
- 더불어숲 회원 강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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