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터찬물 480번째 편지]
차가운 땅도 생명을 품고
당신은 유적지를 돌아볼 때마다 사멸하는 것은 무엇이고 사람들의 심금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를 돌이켜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새로이 읽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라고 하였습니다,
‘과거’를 읽기보다 ‘현재’를 읽어야 하며 ‘역사를’ 배우기보다 ‘역사에서’ 배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는 강과 산이 절묘하게 조화된, 이른바 산수대우의 땅입니다.
남한강 상류의 맑은 물이 유유히 흘러오다 갑자기 물길을 돌려 뼘으로 그린 듯 동그랗게 남겨놓은 솔숲과 백사장이 그림 같습니다.
산과 강이 서로를 아끼며 벗하는 자연의 우정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산수의 아름다움보다 단종의 유배와 죽음을 먼저 봅니다.
어린 유배자가 시름을 달래던 소나무가 500년 풍상에 늙어있고 그리움을 연으로 띄우던 노산대에는 단종의 한이 서려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청령포는 유괴되고 살해된 한 어린이의 추억에 젖게 합니다. 무고한 백성의 비극을 읽게 합니다.
역사의 응달에 묻힌 단종비 정순왕후의 여생이 더욱 그런 느낌을 안겨줍니다. 궁중에서 추방당한 그녀는 서울 교외의 초막에서 한 많은 생애를 마칩니다.
그녀의 통곡이 들려오면 마을 여인들도 함께 땅을 치고 가슴을 치며 동정곡을 하였다고 합니다.
핏빛보다 더 진한 자줏빛 물감을 들이며 가난한 한 포기 민초로 사라져 갑니다.
동정곡을 하던 수많은 여인의 마음이나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체를 수습했던 영월 사람들의 마음을 ‘충절’이란 낡은 언어로 명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동정은 글자 그대로 그 정이 동일하였기 때문입니다. 같은 설움과 같은 한을 안고 살아갔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후략)
『나무야 나무야』 ‘역사를’ 배우기보다 ‘역사에서’ 배워야 합니다 - 중에서
만화방창, 봄이 지천입니다. 겹겹이 벚꽃은 아쉬워 떨어져 내리고, 동백 붉은 꽃잎은 뚝뚝 화단에 마른 흙먼지를 덮습니다.
여기저기 민들레의 심장이 샛노랗게 뛰고, 봄에 찾아든 새 소리에 모란은 자주 꽃 색을 피우느라 분주합니다.
웅크린 나뭇가지에 내민 초록 잎이 나무의 날갯짓처럼 자유로워 더불어 저도 설렙니다. 들썩이는 마음에 집 안 산세베리아 화초를 베란다로 옮겼습니다.
봄볕을 잎 가득 채우려니 싶어 덩달아 흥성거렸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하얗게 변해버린 잎에 대해 알았습니다.
그늘이 제 집이구나……. 응달의 눈이 꾀죄죄한 몰골로 봄의 한낮에도 남아 있던 이유,
사내아이의 오줌 자국처럼 눈 녹은 자리에 늦된 나무가 꽃을 피운다는 시 한 구절, 차가운 땅도 생명을 품고 길러냅니다.
천만 관객을 모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인기는 여전히 식을 줄 모르고 사람들을 불러 모읍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말에 꼭 봐야 한다는 애정 어린 진심이 정겹게 들립니다.
청령포가 멀리 보이는 도롯가에 길게 늘어선 줄이 영월 사람들이 놓았다던 섶다리로 보임은 무슨 까닭인지,
긴 기다림의 끝에 가 닿는 곳이 어디일지 생각해 보게 합니다.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것은 왕의 서사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왕과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울고 웃습니다.
비운의 왕에게서 모두를 잃은 어린아이의 외로움을 봅니다. 흘리지 않는 눈물에서 내 아이의 울음을 봅니다.
그리하여 그 곁을 지키던 사람들의 마음과 하나가 됩니다. 어떤 이는 오르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내려놓으며 살아가는 생의 단편,
부서짐에도 견뎌야 하는 시간을 무엇이라고 명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서져 반짝일 수 있음은 또 어쩐 일일까요.
본질은 같고 형태만 다를 뿐, 이 시대에도 정이 같나 봅니다. 영화 한 편에 실린 사람들의 이야기에 너나없이 변을 쏟아내고 맛깔스러운 사투리에도 인정이 푸집니다.
정이 동일하다던 님의 말이 새삼스레 다가옵니다. 동정, 같은 설움과 같은 한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네 삶에 그늘진 응달에서 봄이 늦도록 녹아든 눈처럼 힘이 되는 말입니다.
오래도록 생각하던 청령포에 몇 해 전 다녀왔습니다.
강으로 에둘러진 외딴섬처럼 그대로 그곳에 있었습니다. 강으로 내려가는 비탈진 언덕과 둥글게 흐르는 강,
강 위를 오가는 배와 사람들, 빗물에 쓸려온 듯 여기저기에 놓인 돌들이 노을 진 백사장 대신 손을 맞았습니다.
책 속 사진은 온데간데없이 상전벽해 속에 여전히 시간은 흐르고 강물 위로 출렁이던 윤슬, 그 너머 솔숲은 그늘 아래 고요했습니다.
주인 없는 집 마당을 걸으며 잠시 출타한 주인을 기다리듯 앉아 쉬었습니다.
노산대에 올라 절벽 아래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잠시 고단함을 덜었습니다. 와류와 냉수대가 숨은 음지의 땅이기 전에 그곳도 사람을 품고,
숲을 길러내고, 새소리를 불러 고요를 벗해주는 땅이었습니다.
태초로부터 생명을 길러낸 대지의 너른 가슴이었습니다. 사람을 살게 하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었습니다.
우문현답을 이제야 보냅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새로운 시작의 문을 엽니다, 선생님. 당신이 쓴 글에서 님을 만나고 읽고 생각을 배웠습니다.
실천의 장에 서지 못하는 소심함에도 내 이웃과 온정을 나누며 통정하리라던 마음은 변함없이 강을 타고 흐릅니다.
생명을 품고 길러내는 일이 사람에게 고작 백 년이라면 이렇듯 자연은 태초의 시간부터 오늘,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까지 흘러가겠지요.
청령포 엽서가 오늘 사람들에게 가 닿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 또 한 사람의 손에서 한 구절 한 문장이 숨을 쉬듯 읽히기를 희망합니다.
이곳에서 바름과 균형의 정치를 바라며 쓴 당신의 혜안이 오랜 세월을 돌아 돌아 님의 가슴 울리기를 바랍니다.
낡은 언어와 낡은 생각에서 벗어나 같은 설움과 같은 한을 나누기를 꿈꿔 봅니다.
그리하여 그늘진 땅이 생명을 품고 길러내는, 더디고 지난한 시간이 봄 싹을 틔우고 있음을 전해 봅니다.
- 더불어숲 회원 조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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