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터찬물 476번째 편지]
변화의 유니폼
“수의는 ‘변화의 유니폼’과 같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나 자신의 변화에 대한 확실한 자부심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0여 년 만에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변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과연 내가 변한 것이 사실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내가 갖고 있는 변화에 대한 생각이 아직도 근대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변화는 결코 개인을 단위로,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변화는 잠재적 가능성으로서 그 사람 속에 담지 되는 것이다.”
『담론』 ‘사일이와 공일이 편’에서
수형생활 17년째에 어머님의 병환으로 6일간의 휴가를 나오신 선생님은 수의를 입은 채 지인들을 만나십니다.
감옥에서도 자기 단련을 쉼 없이 다져오신 터라 스스로는 변화가 많이 되었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만,
오히려 지인들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그분들의 말씀은 젊은 시절의 모습을 추억하고자 ‘하나도 안 늙었구나,
예전의 멋진 모습 그대로구나’ 하는 반 농담성 말이 아니었겠는지 생각됩니다만
여기서 선생님은 이런 가벼운 농담조차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셨습니다.
“변화와 개조를 개인의 것으로 또 완성된 형태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근대적 사고의 잔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라는 깨달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변화란 무엇일까요. 선생님께선 변화란 “개인 차원에서는 가능성으로서 잠재되어 있다가 당면의 상황이 되었을 때,
함께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라 하십니다. 전혀 새로운 시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1회 완료적인 변화는 없습니다. 설령 일정한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계속 물 주고 키워내야 합니다”로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가끔 “매일이 똑같구나, 내 삶은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하면서 자조(自嘲)하곤 합니다.
실제로는 매일, 매 순간 변화하고 있음에도 말이죠. 티베트의 스승 달라이 라마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
‘나’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본래부터 ‘나’는 없다. 무아(無我)다”라고까지 합니다.
불교의 무아 사상을 제가 잘 알지 못하나 ‘변화’라는 것은 자연의 질서이자 궁극의 원리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주 만물은 항상 나(生)고 움직인다는 생동(生動)의 원리도 변화가 있어야 가능하겠지요.
문제는 어떻게 변화하는 삶을 살 것인가입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개인이 혼자일 때 변화는
그 안의 가능성으로 존재합니다. 변화는 자신이 능동적 주체로 나설 때 두드러집니다.
그러다 어떤 상황에서는 외부적으로 발현됩니다. 역사의 반역인 계엄 사태에서 우리 국민은
변화의 가능성을 나타냄으로써 위기를 극복해 내고 있습니다.
더불어 숲에서 우리는 하나의 나무로 화(化)하여 숲을 이루면서 다시 새로운 변화를 이루어 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내게로 와서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킵니다.
모든 순간, 순간들이 이어지고 모아져서 작거나 큰 변화를 이루어 내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를 위해 ‘부단한 노력’과 ‘공부’를 강조하십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자신을 채근하길 하실 수 있을까 생각도 듭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살아가는 이유를‘하루하루의 깨달음’이라 하신 말씀이 생각나면서
저는 삶이란 그 (변화하는) 순간의 기쁨을 체득하는 과정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평생 삶의 결정적 순간을 찍으려 발버둥 쳤으나,
삶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었다”라고 회고합니다. 매 순간이 변화의 순간이요,
그 찰나의 순간조차 삶의 결정적인 변화입니다. 그 변화를 누리기 위해 이 삶을 사는 것인지 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대장정에 우리는 지금 함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 더불어 숲 회원 허 병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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