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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샘터찬물 453번째 편지] 유수봉하해(流水逢河海) 허 병철 2025.09.192025-09-19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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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찬물 453번째 편지]

                              유수봉하해(流水逢河海)

                           “흐르는 물은 바다를 만난다”

 

 

징역살이에서 느끼는 불행 중의 하나가 바로 한 발 걸음이라는 외로운 보행입니다.

실천과 인식이라는 두 개의 다리 중에서 ‘실천의 다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실천 활동을 통하여 외계의 사물과 접촉함으로써 인식을 가지게 되며

이를 다시 실천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그 진실성이 검증되는 것입니다.

실천은 인식의 원천인 동시에 그 진리성의 규준이라 합니다.

이처럼 ‘실천→인식→재실천→재인식’의 과정이 반복되어 실천의 발전과 더불어

인식도 감성적 인식에서 이성적 인식으로 발전해 갑니다.

그러므로 이 실천이 없다는 사실은 거의 결정적인 의미를 띱니다.

그것은 곧 인식의 좌절, 사고의 정지를 의미합니다.

흐르지 않는 물이 썩고 발전하지 못하는 생각이 녹슬 수밖에 없는 이치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한 발 걸음’중에서 (1984.3.1.)

 

 

항상 실천의 문제를 고민하셨던 선생님으로부터 다시금 그 말씀의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

‘실천’이 어려운 엄혹한 감옥에서도 선생님은 ‘그럼에도’ 실천이 되어줄 ‘한발 목발’ 을 찾으셨습니다.

선생님이 처음 목발로 삼은 것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 즉 ‘과거의 실천’ 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감옥이라는 실천 부재의 공간은 선생님에게 오히려 훌륭한 성찰과

실천이 있는 배움의 공간으로 승화될 수 있었습니다.

 

인식과 실천의 변증법은 ‘관계’와 더불어 선생님의 주요한 사상을 이루는 핵심 중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 스스로를 돌아보면 현상을 직관으로 보고, 감성으로 받아들이며 선험적인 이성과

지성의 사용은 더디 하면서 실천에는 게으르지 않았나 반성하게 됩니다.

한나 아렌트는 자유로운 인간의 근본적 활동을 ‘활동적인 삶’ 에서 찾고 있으며,

이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인간의 '조건’ 이 됩니다.

실천이 없는 삶이란 고립될 수밖에 없으며,

가장 회피해야 할 습성이란 점에서 두 분의 견해는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인식하는 ‘행위’ 자체도 쉬운 일은 아니므로 인식을 위한 ‘실천’으로서

유의미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만, 여기서 선생님은 ‘인식→인식→인식...의 과정은

현실의 튼튼한 땅을 잃고 공중으로 지극히 관념화해 간다’라고 지적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선생님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인식과 실천을 함께 하면서 서로 만나는 관계성 속에서

더 높이 고양해 나가는 것이 진리성을 찾는 올바른 태도라는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멈춰있는 데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인식이 자신의 목발(실천)을 찾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하며,

물은 반드시 ‘흐르는 물’ 이어야 쓸모없이 버려지거나 증발하지 않고 바다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드넓은 바다에서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더불어숲 회원 허병철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