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 푸른 보리밭과 생명 ‘푸른 보리밭’은 지금도 내게는 그때의 기억과 함께 ‘생명’의 벌판입니다. p.214
더불어숲 교실3에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여러 나무님들과 함께 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숲 교실 세 번째 시간에는 청구회 추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청구회 추억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생님이 이 글을 쓰시던 시기를 함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담론의 푸른 보리밭을 함께 읽게 되었습니다. 푸른 보리밭을 읽던중 제게도 푸른 보리밭과 생명에 관한 추억이 있어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지난 봄 더불어숲 교실2에서 담론을 함께 읽었는데 당시 푸른 보리밭을 읽을 때는 떠오르지 않았던 추억이 이번에 떠오르는 것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제 나이 스무살적 약 30년전인 지난 1987년 6월 전국적으로 민주화운동이 뜨거웠던 시절의 일입니다. 저는 공고를 졸업하고 사회 2년차에 영등포구 양평동 오목교 인근에 있는 조그만 ‘영일금형’이라는 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플라스틱 제품을 사출하기 위한 금형을 제작하는 곳으로 8명이 함께 일하는 작은 곳입니다. 공고에서 기계를 전공했기에 앞으로 이 분야의 기술을 익히면 밥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다는 전망때문에 일하게 되었습니다. 8명중 막내로 자전거타고 영등포까지 가서 공구나 재료를 사오는 등의 심부름이나 하고 다른 사람이 일할 수 있도록 준비해주고 기초가공 정도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사장의 이름은 김영일이었으며 때문에 영일금형입니다. 골목입구에 영일약국이 있었는데 그분도 동명이라며 이야기 한 적이 있어서 잊지 않았습니다. 사장이 낚시를 좋아해서 직원 야유회는 항상 낚시터로 갔었습니다. 87년 6월 어느날 1박 2일 일정으로 직원 야유회를 경기도 화성에 있는 기천지저수지로 사장의 지인까지 10여명정도 갔었습니다. 낚시하고 고기구워서 술과 함께 식사를 하고 텐트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식사를 하고난 후의 일입니다. 다같이 모여 아침식사를 하고 있을 때 낚시에 걸린 물고기가 저수지 한복판까지 낚시대를 끌고간 것입니다. 아침식사후 이를 본 동료중 한 명인 김희정이 자신이 가서 가지고 오겠다며 누가 말릴 겨를도 없이 수영을 하며 저수지로 뛰어 들었습니다. 김희정은 저하고는 동갑인 친구지만 중학교 졸업후 바로 사회생활을 했기 때문에 저보다는 3년이상의 기술력을 보유한 중간기술자 였습니다. 일을 할 때는 제가 보조를 하는 입장이니 자신이 먼저 나선 모양입니다. 저라면 낚시대를 포기했을 것입니다. 수영하는 것을 뒤에서 보니 개구리 헤엄으로 나보다도 수영실력이 못하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습니다. 어느덧 낚시대가 있는 저수지 한복판까지 가더니 이내 맥주병이 되어서 물속으로 오르락내리락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제가 곧장 윗옷만 벗고 뛰어들어 자유형으로 전속력으로 빠르게 헤엄을 쳐서 희정이가 있는 곳까지 와서 순간적으로 어떻게 끌고 나가야 할지 고민하며 주변을 맴돌고 있었습니다. 이때 공장장이었던 이광석 형님이 제 뒤를 따라서 들어왔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형도 도착해서는 맥주병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제 앞에는 두 사람이 약간의 사이를 두고 나란히 맥주병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하는 사이 먼저 빠졌던 희정이가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입니다. 일단 다른 생각할 겨를없이 잠수를 해서 희정이의 다리를 잡아 물위로 끌어올린 상황에서 제가 뒤에 있었으므로 허리를 양손으로 잡고 앞으로 밀어보니 3~4M 정도 쭉 밀려나갔습니다. 다시 광석이형의 허리를 잡아 밀어놓으니 두 사람이 나란한 위치에 섰습니다. 됐다 이렇게 계속 나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글을 쓰면서 드는 생각이지 당시는 아무 생각이 없었을 것입니다. 광석이 형을 밀고나면 희정이는 또 물밑으로 가라앉고 있어서 저는 다시 잠수를 해서 아래서부터 잡아서 물위로 올려놓은뒤 허리를 잡고 밀어놓고 광석이형을 밀고 이렇게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릅니다. 여러번 반복해서 두 사람을 잡아 밀어서 마침내 낚시대가 닿는 곳까지 이르러서야 낚시대를 잡고 두 사람이 물밖으로 나가고 난후 나는 물속으로 들어올 때 윗옷만 벗고 들어왔는데 어느새 흰색 운동복 바지가 벗겨져 나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스무살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여직원(누나들이지만)이 있는데 팬티바람으로 나가는 것이 약간은 망설여져서 바지를 찾아서 건져서 나갈까 하는 생각도 들어서 주변을 돌아보다가 빨리 나오라는 호통에 저도 물밖으로 나갔습니다. 나와서 저수지를 바라보니 내가 어떻게 두 사람을 밀고 나왔는지 저도 믿어지지 않았고 커다란 나무가 선채로 잠겨있는 깊은 물속을 보니 두려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희정이는 어느 정도 물을 토해내는 등의 응급조치를 하니 의식은 있었습니다. 본인은 병원에 안가도 된다고 했지만 사장이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가고 광석이형은 병원에 안가도 괜찮다며 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두 사람에게 들었지만 자신들이 빠졌을 때 저한테 덤비면 안된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비록 몸은 말을 안들었지만 정신까지 잃지 않았기 때문에 저를 잡으려고 하지 않았고 제가 하는데로 가만히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의 일이지만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도 정신까지 잃고 저를 잡으려고 했으면 아마 세 사람 모두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정말 천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술을 마신 상태에서 자신의 체력이나 능력을 과신하고 물에 뛰어든 것이 화근이 되었던 것인데 저도 술을 마셨지만 그 두 사람보다는 덜 마셨던 모양입니다. 다음날 공장장인 광석이형이 출근해서 하는 말이 어제 집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다가 두 딸이 아빠를 부르며 달려오는데 그만 눈물이 쏟아져 한동안 넋놓고 울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하마터면 저 아이들을 두고 죽을뻔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겁니다. 이때 일부는 눈물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아마 고맙다는 인사의 표현인듯 했습니다. 그후 제가 군대에 가면서 헤어지고 나서는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제대후 공장이 있었던 곳에 가보았으나 도심이 개발되어 흔적도 없었습니다. 당시 희정이는 고향친구인 경숙이와 사귄다고 했는데 결혼해서 잘살고 있겠지요. 광석이 형은 70대의 할아버지가 되어 있겠네요. 마지막 사진은 전날 밤에 찍은 것으로 빨강모자가 저입니다. 왼쪽의 노란모자가 공장장인 이광석형(두 딸이 있었는데 유치원생인지 초등학생인지는 모르겠음. 나이가 스무살 정도 차이가 나는데 형님이라는 호칭이 맞는지도 잘 모르겠네요.), 제 오른쪽의 검정옷이 동갑내기 친구였던 김희정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 - 고교시절 마을 물놀이터에서 후배를 구한 사연
저는 전북 진안군 정천면에서도 한 시간(초등학생 걸음) 가량을 걸어가야 하는 곳입니다. 마을 이름은 ‘상조림’이지만 마을 중앙으로 냇물이 흐르고 있어서 마을 내부에서는 양지담과 음지담으로 구분해서 부르기도 합니다. 마을 중앙에는 엄청나게 크고 멋있는 느티나무(마을에서는 둥구나무라고 부름)가 있었는데 전기가 들어오면서 전기선이 바로 나무밑으로 지나가면서 생긴 비극으로 보는데 제가 고교시절에 벼락을 맞고 2등분으로 갈라져 결국 베어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우리나라 국토를 돌아본 경험으로는 그 나무보다 크고 오래된 나무는 보지 못했습니다. 안목있는 사람이 있어서 보호수로 지정하고 관리를 했더라면 나무 한 그루 때문에 전국의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나무였는데 아쉬울 따름입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보호수가 될 수도 있었는데 무지했던 사람들과 아무 생각없이 진행된 전기공사로 인해 생긴 일입니다. 지금은 용담댐이 만들어지면서 살아남은 첫 번째 마을이어서 면소재지의 역할을 하여 여러 관공서가 생겨나고 수몰민들이 대거 이주 정착을 하게 되어 옛마을의 모습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마을 중앙에는 운동장으로 쓰기 적당한 공터가 있어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보를 던져놓기가 바쁘게 뛰어나가 선착순으로 팀을 구성해 야구나 축구 등의 게임을 합니다. 야구는 방망이는 나무를 깍아서 만들고 포수 글러브는 비료포대를 접어서 만들고 심판앞에는 판자에 작은 구멍만 뚫어서 세워두고 테니스 공으로 합니다. 이렇게 공터에서 야구나 축구 그 외의 놀이로 땀을 흘리고 나면 물놀이터를 몰려가서 멱을 감곤 합니다. 우리들의 물놀이터는 마을의 끝지점으로 양지담의 마지막집을 지나서 있는데 한쪽벽은 모두 한덩어리의 거대한 바위절벽으로 되어있고 아래쪽은 논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 돌을 이중으로 쌓아서 인위적으로 만든 수로가 있어서 자연적으로 물의 깊이가 형성되는 곳입니다. 폭은 약10M 상하길이는 약20M 정도 되고 수심은 가장 깊은 곳이 성인의 가슴정도이고 평균적으로 허리 이하정도지만 초등학생 수준에서는 키가 잠길정도이기 때문에 놀기에 적당합니다. 물놀이터를 2등분해서 위쪽이 깊은 편이라 남자아이들이 주로 놀고 아래쪽은 수심이 낮아서 여자 아이들과 초등학교 저학년들이 주로 놀았습니다. 마침 바위벽위에서 자란 노송의 양가지중 하나가 수면과 거의 수평으로 뻗어있어 자연스럽게 경계를 만들어 줍니다. 한쪽에 있는 바위벽위의 작은터에는 정자가 있어서 낮잠이나 멱감다가 지치면 쉬기도 합니다. 우리들이 물에서 노는 방법은 바위벽위에 올라서 물로 뛰어내리기도 하고, 누가 빠른지 시합도 하고, 잠수로 멀리가기, 잠수로 오래버티기, 몇 명이서 편을 갈라 바닥의 돌을 파서 깊이파기, 가는 길에 딴 자두를 던져놓고 찾아서 먹기, 돌을 세워두고 돌을 던져 맞춰 떨어트리기, 물수제비 뜨기 등등입니다. 마을에 집집마다 자두나무가 참 많았고 여름이 적기이기 때문에 물놀이 갈 때면 항상 두둑히 따가지고 가서 던져놓고 찾아먹는 놀이를 했습니다. 제가 고2 여름 방학때의 일입니다. 산골에서는 비가 내리면 금방 냇물이 불어납니다. 때문에 비가 오면 우리들의 물놀이터는 비가 개고 3~4일 지나야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그날도 큰비가 오고 2~3일 지나서 평소보다는 물살이 세고 수심이 깊었으며 수온이 낮았습니다. 그러나 위험한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다수의 학생들이 모여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는데 평소와 다른 아이들의 외침 때문에 살펴보니 초등학교 여자애가 맥주병이 되어 물속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제가 곧장 아래쪽으로 수영으로 접근해서 물밖으로 구조를 했습니다. 당시의 제 수준에서는 그냥 서서 안고 나와도 될 정도의 깊이고 물가와는 폭이 7M정도이기 때문에 몇 번의 팔동작이면 물가로 나오기 때문에 구조랄 것도 없었습니다. 저보다는 두 살 아래지만 여자애의 친오빠가 제 위치보다 더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구조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움직임도 없었으며, 다수의 중 ․ 고생들도 있었는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제 판단으로는 중고생 남학생들의 경우 어렵지 않게 구조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물밖으로 구조한 직후 바로 옆논에서 일을 하던 6~7년 정도의 선배가 달려와서 거꾸로 세워서 물을 빼고 호흡도 시키는 등의 응급조치를 했습니다. 이때 마을로 달려간 아이들의 전달로 마을어른들과 여자애의 엄마가 울면서 달려왔습니다. 뱃속의 물을 모두 빼내고 여러 응급조치를 하니 의식이 돌아왔고 한동안의 시간이 흐른뒤 호출했던 택시(면에 한 대가 있어서 호출해서 이용함)가 도착하여 진안 병원으로 실고 갔습니다. 엄가가 달려올 때 응급조치를 선배가 하고 있어서인지 제가 물에서 구조한 사실을 모르는 듯 했습니다. 선생님의 푸른 보리밭을 함께 읽으면서 옛날의 추억에 젖어봅니다. 한번쯤은 보고도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