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활동] 두목특강 3회 김진업교수님 강의 기록및 정리2016-10-06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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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업 성공회대 사회과학부·NGO 대학원 교수 

 

 

 

신영복 선생님의 책이 사실 좀 어렵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 관계론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걸 쉽게 풀어보려고 애를 썼는데 선생님의 단어와 제가 가지고 있는 단어 체계가 달라서, 여러분한테 또 다른 어려움을 줄 것 같긴 합니다. 그런데 내용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말이, 단어가 어려운 것이니 여러분이 제 이야기를 듣다가 용어가 익숙지 않다 하면 언제든 질문을 하시면 최선을 다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우선 세계관이라는 단어에서 시작합니다. 세계관은 인생관, 가치관으로 불러도 좋은데,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할 때 판단하고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세계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갖고 있는 어떤 생각입니다. 실제 역사적으로 보면 옛날에는 학문이라고 하면 동양은 사서삼경(四書三經)입니다. 서양은 성경 해석입니다. 그 이전의 학문이라는 것은 어른들의 이야기로 전달되고 전달되는 신화였습니다. 학문이라는 것은 후배들에게 이런 세계관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다, 세상은 이런 것이다를 설명하는 것이 학문이었지요. 그래서 신화와 종교, 경전 그런 것들이 사람들한테 한결같이 가르쳤던 것이 세상을 움직이는 어떤 초월적인 힘이 있는 거야. 그걸 믿고 우리가 그걸 따라야 해.’ 그것을 우린 신의 섭리, 자연의 섭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철학자들은 이를 통틀어서 종교적 세계관이라는 말을 씁니다. 우리가 신의 섭리, 자연의 섭리를 잘 성찰을 하거나 명상을 하거나 계시를 통해서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옛날의 학문이었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근대 이후 핵심적인 단어는 과학입니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근대 세계 사람들의 세계관이 달라졌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이죠. 그래서 종교적 세계관이 과학적 세계관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 핵심적인 내용은 자연이라는 세계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연의 운동 원리를 이해할 수 있고 이를 이용할 수 있으므로 세계의 주체가 된다는 생각이 따라오는 것이지요. 이처럼 인간이 자연과 사회와 역사의 주체가 된다라는 생각을 인본주의(人本主義)라고 말합니다. 과학적 세계관으로부터 인본주의가 나오는 것이지요. 인본주의와 반대되는 말은 신본주의(神本主義)입니다. 종교적 세계관에서 과학적 세계관,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의 변화- 이것이 바로 전근대 사회와 근대 사회의 차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적 세계관 속에 있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가뭄이 들었어요. 그런데 누군가 우리 다 같이 모여서 기우제를 지내자고 하면 여러분들은 말도 안 돼라고 할 겁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믿고 있는 건 가뭄이 들면 댐을 만들어야 된다는 걸 알고 있고, 만약 댐이 환경파괴를 하면 다른 과학적인 방식으로 치산치수(治山治水)를 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 과학적 세계관이죠. 이래서 여러분이 믿고 있는 건 과학적 세계관이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서 의문부호를 가지고 있죠. 오늘날 과학에 근거한 근대 사회는 환경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도 파괴한 것 아니냐, 그래서 여러분이 과학 관두고 인문학하자 이런 얘기 한 것 아니에요?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과학에 대한 불만하고도 연결되어 있는 거죠. 그러나 과학 없이 여러분이 행동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여전히 해야 합니다. , 우리가 환경 파괴나 인간성 파괴 등의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 문제를 돌파할 수 있는 건 사실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지식, 과학밖에 없어요. 다만 과학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으로서의 과학과 그게 아닌 다른 과학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염두에 둔다면 공통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있거든요. 오늘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그것입니다.

 

과학은 여전히 우리에게 가장 믿을만한 지식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주관적으로 머릿속에서 또는 내 말로, ‘나는 00을 믿어이런 걸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뭔지 모르겠는데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이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거기에는 이러이러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했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만약에 과학을 믿는다고 하면서 기우제를 지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과학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기우제를 지내고 있는 사람은 신을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댐을 짓고 있는 사람은 과학을 믿는 사람인 겁니다. 여러분이 인문학에 관심이 있지만, 실제 낮에 행위를 할 때에는 과학을 믿고 있다는 겁니다. 역시 그래서 우리는 현재 과학 때문에 생겨난 문제점들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도 여전히 과학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단 새로운 과학이어야 합니다.

 

이젠 철학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제가 철학 전공자는 아니고 오히려 저는 부전공으로 철학을 했으므로, 그래서 철학을 더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대 철학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몇 사람이 있지요. 베이컨, 데카르트, , 칸트. 오늘날 근대 철학의 후예들이 주류철학을 만들고 있는데, 이 주류 근대 철학은 과학에 기초해서 세계를 다시 설명하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이전의 철학, 신학, 종교 경전, 신화 등은 초월자에 기초해서 세계를 설명하려 했었는데, 근대 철학자들은 과학에 기초해서 세계를 설명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과학적 세계관을 만든 사람들입니다. 이 과학적 세계관을 만들었다, 종교적 세계관을 과학적 세계관으로 바꿔놨다, 그러려면 전제 조건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걸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근대 철학은 학문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초기에.

그런데, 오늘날 근대 철학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오늘날 바라보고 있는 철학책들이 바로 그런 종류의 지침을 여러분에게 제공합니까? 제공하지 않습니까? 제공합니까? “그건 철학 얘기고 이건 과학 얘기야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현실은 과학을 따를 수밖에 없고 철학은 그저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거 아니야.” 이런 식의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은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나 담론을 어쩌면 철학으로 읽을지도 몰라요. 철학으로, 인문학으로 읽는다는 것은 사실은 어떤 뜻이 되는 것이냐 하면, 조금 나를 위로해주는 정도의, 그러나 현실에서는 썩 타당하지 않은 것 같은, 현실은 과학이죠. 철학이 이렇게까지 뒤로 물러났기 때문에 철학을 우리는 위기에 빠졌다고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철학은 기본적으로 세계관을 제시해주는 학문이었고, 그 덕분에 사람들의 실제 일상적인 삶에서 지침이 되었던 것들이거든요. 여러분 옛날 경전은 그 경전에 따라 행동해야 했던 것들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그럴 수도 있지 뭐, 근데 안 그럴 수도 있잖아?” 이렇게 되어 버렸잖아요. 이런 의미에서 주류 철학은 위기에 빠져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오늘날 주류 철학자들 중에 자신들이 위기에 빠져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요. 물론 있긴 있지만요. 어쨌든. 그래서 재밌는 말로 표현하자면, 철학은 낮에는 별로 쓸모가 없는 밤의 철학이 되었다, 마치 인문학처럼 저녁 7시 반 이후에 들어야 합니다. 우리를 위로해주기는 하지만 썩 그렇게 행위의 지침이 되진 않는다는 거지요. 이것은 분명히 초기 근대 철학으로부터의 후퇴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의 위기다라고 이야기 하는 거지요. 그런데 왜 이 근대 철학이 오늘날 주류 철학으로 넘어오면서 퇴보해 버렸는가, 밤의 철학이 되어 버렸는가?

제일 큰 이유는 당연히 학문을 통합하는 데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과학 따로 철학 따로입니다 지금 학문을 통합해야 된다는 요구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고 하는 게 어떤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이른바 인지부조화를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낮에는 이게 진리이고 밤에는 이게 진리이다, 이러면 여러분 느낌이 어떠세요? ‘이게 뭐야 나 이중인격자야 뭐야.’ 힘들어지잖아요. 그래서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려고 하는 경향이 굉장히 강해집니다. 둘 중의 하나를 제거해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신영복은 헛소리야 라고 하든가, 나는 비가 와도, 비가 안 와도 기우제를 지낼 거야. 이런 식으로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오늘날 사람들이 정체성 위기에 빠지고, 인간성 위기에 빠져있고, 상대주의가 판을 치고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지식이 서로 통합이 되어서 일목요연하게 우리에게 제공되지 않고 과학은 과학 따로, 철학은 철학 따로, 따로따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대철학 주류철학의 위기는 사실은 우리들 삶의 위기이기도 하지요. 어찌해야 좋을 줄을 모르게 되는 거예요. 너는 너대로 가라, 나는 나대로 간다,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누가 누구를 설득할 수도 없어요. 뭐가 좋은지를 모르니까요. 그러니까 우린 다양성이란 이름으로 아무것도 안 하는 겁니다. ‘OOO도 뭔가 사정이 있겠지 뭐 (웃음)-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학문 통합이 안 되면, 즉 철학이 자기 역할을 못하게 되면 대중들이 자기 삶의 의미 자체도 갖지 못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의미는 각자에게 주어져 버려요. 네가 알아서 너의 의미를 각자 찾아야 돼요. 못 찾으면 자살이에요. 이런 거예요. 사실은 옛날 사람들은 그 의미를 자기가 스스로 찾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주어졌어요. 그래서 그런 고민이 상대적으로 없었던 것에 비해서, 오늘날은 이것이 매우 커졌다, 철학의 위기, 학문통합이 안 되는 것, 과학과 철학이 서로 부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그래서 그렇다, 이런 겁니다.

 

철학이 왜 위기에 빠졌는가? - 학문통합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럼 왜 학문 통합에 대해서 아예 포기해 버렸느냐? 이건 간단하게 철학사를 살펴보아야 해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근대 철학이라는 것은 분명히 과학의 충격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과학의 충격이란, 지금까지 알려졌던 모든 경전의 말씀이나 모든 고대 철학의 말씀이 있었는데 물론 경전의 말씀들이 주였겠지만, 실제 과학이 설명하는 것과 충돌하게 되고 과학의 설명이 훨씬 더 우리한테 확실하다고 하는 확신을 줬던 것이지요. 그래서 근대철학자들은 이 과학이라고 하는 데서 출발해서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려고 애를 썼던 거지요. 자연과학의 확실성을 부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자연과학에 기초해서 철학 또는 통합 학문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것을 최초로 시도했던 유명한 사람이 베이컨입니다. 17세기 베이컨이 쓴 유명한 책이 이른 바 [Novum Organum 노바 오르가눔] - 무슨 뜻이냐 하면 <새로운 논리학> 직역을 하자면 그런 것입니다. 근데 여기서 논리학이라는 말은 여러분이 배웠던 논리학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방법론이라는 뜻입니다. 학문 방법론을 뜻합니다. 그 이전의 학문방법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Organum오르가눔]입니다. 그게 중세까지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는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바꿔나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걸 주장하는 것이 [신 논리학Novum Organum]이라고 하는 베이컨의 책입니다. 바로 이 베이컨이 근대 철학의 시조가 된 겁니다. 그래서 그 이후의 모든 철학자들은 과학에 기초해서 세계를 설명하려고 하는 노력들을 계속해 왔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연과학이라고 하는 것이 그 당시에 정신이나 생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一言半句)의 지식도 제공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당시의 자연과학은 명백하게 천문학에서 시작했고, 기껏해야 물질에 관한 지식이었어요. 굉장히 제한적인 지식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 제한적인 지식에 기초해서 학문을 통합하려고 하면 매우 머리가 아파질 수밖에 없잖아요. 그 제한적인 지식에 기초해서 그 당시에 모든 정신 생명 이런 것들은 물질로부터 나온 것이다라는 말을 오늘날엔 어느 정도 말할 수도 있지만, 17세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거의 미친놈 수준입니다. 무슨 근거로? 왜냐하면 과학 자체가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요. 이런 것들은 유물론이라고 불리우는 거지만 지나치게 자연과학을 확대해석한 것이다라는 비판이 당연히 따를 수밖에 없었지요. 반대로 자연과학이 명백하게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한테 자연과학은 굉장히 제한적인 지식에 불과한 것이고 실제 세계를 움직이는 건 여전히 신의 논리다, 또는 자연의 논리다라는 식으로 얘기했던 것을 우리는 관념론이라고 하죠. 이건 역시 자연과학을 너무나 많이 축소해 버린 것이죠. 자연과학의 가능성을 제한해 버린 것이죠. 반대로 유물론은 자연과학을 지나치게 확대한 것이라는 거죠.

근대 철학을 대표한다고 하는 데카르트나, 흄이나 칸트 같은 사람들이 유물론은 자연과학을 지나치게 확대했고, 관념론은 자연과학을 지나치게 축소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택한 방법이 이른바 이원론(二元論)입니다. 이원론이란 물질이나 자연은 자연과학으로 설명하고, 정신이나 인간은 철학으로 설명해야 된다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인 거죠. 그런데 모순인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은 인정하잖아요. 그럼 뭐에요 이게 도대체. 그럼 자연과학으로 해야 한다는 거예요? 철학으로 해야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런 모순 속에 빠져 있는 겁니다. 실제로 이원론(二元論)이라는 것은 당시의 근대 자연과학이 가지고 있었던 역사적 한계 때문에 불가피했을 수 있습니다. 당시에 유물론을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거죠. 당시에 관념론을 주장한다는 것은 퇴보죠. ‘이원론이 가장 합리적이다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도 그러하나라는 얘기에요. 오늘날의 자연과학이 어느 수준까지 와 있는지 여러분이 알고 있잖아요? 모르죠? (웃음, 몰라요.) 오늘날의 자연과학은 이원론을 유지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요. 오늘날 과학은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고 있잖아요. 공상과학 영화가 아니잖아요. 알파고 보셨잖아요. 가장 잘난 인간이 한방에 날아가잖아요. 상상하는 로봇도 있잖아요. 이 수준까지 와 있거든요. 실제로 최근엔 생물처럼 움직이는 기계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어요. 생물처럼 벌레처럼 제 맘대로 움직이는 기계를 만들어 놓는 것에 성공했어요. 그것이 기계에요,놀랍게도. 원래 기계는 예측할 수 있는데 이 기계는 예측할 수가 없어요. 어디로 튈지. 이런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고요. 오늘날 자연과학이라는 것은 당시의 자연과학과는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원론은 유지될 수 없는 것이고, 철학이 그걸 반영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위기에 빠진 겁니다. 사람들이 그래서 관심 없어 합니다. 오늘날의 주류 철학이 과학의 질적 변화라고 하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이원론에 머물러 있는 바람에, 사람들에게 적합한 세계관을 제공하는 데에 실패했다, 학문을 통합하는 데에 실패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주류철학이 근거하고 있는 초기의 근대 과학, 이른바 우리가 고전과학이라고 부른다면, 이 고전과학과 현대과학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봐야겠지요.

고전과학의 패러다임은 한 마디로 얘기하면 환원론과 결정론'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근대 초기의 자연과학은 천문학입니다. 천문학은 별들의 운동을 설명해 내는 데 성공한 것이죠. 여기서 중요한 말은 운동이라는 말입니다. 운동이라는 말은 죽어있는 물질들이 스스로 변화를 일으킨다는 뜻이거든요. ‘스스로 변화를 일으킨다’, 예전에는 변화라는 말은 항상 그 뒤에 뭐가 달라졌을 때에는 달라진 것의 원인을 초월적인 힘, 귀신같은 것으로 생각했어요(종교적 세계관). 예컨대 창문이 저절로 닫히면 귀신 아니야 이거’, 바로 이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운동이라는 말 자체가 고대 철학엔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신 없이도 바람이라는 것이 이러저러한 기압의 변화에 의해서 이렇게 창문을 닫게 만든다라고 설명하는 것이 운동이론이거든요. 운동이라는 개념이 신을 필요 없게 만든 겁니다. 예를 들어서 예전에 탈레스라는 사람이 만물은 물이다라고 얘기한 것을 오늘날의 의미로 물의 운동이 세상을 설명한다 - 라고 하면 고대철학을 완전히 오해하는 거예요. 고대 철학은 여전히 종교적 세계관 속에 있었기에 물의 신의 작용으로 이해해야지, 물의 작용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건 제가 하는 얘기가 아니라 거드리(W.K.C. Guthrie)라고 하는 유명한 그리스 철학 전문가가 한 얘기입니다. 그렇게 운동 개념으로 별들의 운동이라는 것을 설명해내는 데 성공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별들의 운동을 질량을 가진 모든 것들의 운동으로 확대한 것, 일반화시킨 것이 뉴튼의 만유인력입니다. 만유-즉 질량을 가진 모든 것들은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운동한다.

 

거기에 하나 더 나아가서 원자론이라는 말 들어 보셨지요 - 모든 물질들은 자연 속에서 100개 이하의 원소들로 더 분해될 수 있잖아요. 그리고 그 100개 정도의 원소들이 다 모든 물질들을 구성하는 거잖아요. 원소기호가 전부 다, 양성자라고 하는 것 하나가 원소기호 1이고 두 개가 2이고 이렇게 되는 것 알고 있죠? 그렇게 분해가 되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만유인력의 법칙의 적용을 받는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죠. 그러면 이 고전물리학, 또는 고전과학이라고 하는 건 제가 아까 환원론, 결정론이라고 했는데, 모든 물질은(존재하는 모든 것)은 원자로 환원되는 것이고, 세상의 모든 변화는 원자의 운동으로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운동은 만유인력의 법칙처럼 수학적 공식으로 딱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결정론이죠. 그래서 이 사람들은 만약에 우리가 우주의 초기 조건을 알고 있다면 공식에 집어넣어서 우주의 미래는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이게 바로 환원론, 결정론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제가 요약한 겁니다.

 

그럼 현대과학은 어떠냐? 현대과학은 이것과 전혀 다릅니다. 현대과학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환원론도 아니고 결정론도 아니에요. 정반대에요. 이른바 필연과 우연을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 현대과학입니다. 그 다음에 또 중요한 것은 발현적 속성이라는 단어에요. 발현이라는 말은 우연히 만들어졌다. 여기서 두 단어를 하나로 묶는다면 우연이라는 말입니다. 이 우연이라는 단어를 현대과학이 어떤 방식으로 해서 자기들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갖게 되었느냐, 크게 보면 양자역학과 현대 진화론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을 조금 더 발전시킨 현대 진화론입니다. 오늘날 현대 진화론의 핵심 개념은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라는 말입니다. 돌연변이는 문자 그대로 유전자들이 우연히 변한다는 말이에요. 유전자 변화는 절대로 예측할 수가 없다는 뜻이에요.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기 때문에 갑자기 나타나는 거예요. ? ‘묻지마 원래 자연이 그런 거야, 원래 그런 거야라고 말을 하면, 고전과학자들은 뭐라고 얘기하겠어요, ‘과학이 덜 발달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지’, 생물학자들은 아니야 자연 자체가 원래 그런 거야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또 한 가지, 자연선택이라는 말은 어때요? 우리는 흔히 자연선택이라는 말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고 말하잖아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건 정치 이데올로기 입니다. 생물학의 진화론에서 이야기한 자연선택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뜻이 아니에요. 우연히 살아남은 놈이 강한 자라는 거지요. 강자가 살아남아요? 그럼 필연이게? 자연선택이라는 말과 돌연변이라는 말은 둘 다 우연이라는 개념이 키워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화론은 목적론이 될 수가 없어요. 우연이기에 어디로 갈 지를 몰라요. 이건 생물학자들이 하는 얘기에요. 끝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겁니다.

똑같이 양자역학도 그런 얘기를 합니다. 양자역학의 핵심 개념 중의 하나는 양자도약이라는 말인데, 양자도약이라는 말이 굉장히 어려워요. 그래서 제가 비유로 설명하면 이런 거예요. 여러분들이 어떤 물질에 열을 가하면 그 물질에서 입자가 튀어 나오죠. 쇠를 달구면, 무엇이든 달구면 거기서 열이 나고 무언가 나오잖아요. 이걸 우리가 복사현상이라고 하거든요. 최초의 복사현상은 라디오, 방사능을 통해서 발견되었어요. 복사라는 말 - 레디에이션(radiation,輻射)이에요. 똑같은 말이에요. 방사능 물질만 저절로 뭐가 튀어나오는 게 아니라 모든 물질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이른바 절대온도 273 이 이상의 뜨거운 것들은 무언가 거기서 나와요. 그것이 복사현상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얼마만큼의 열을 가하면 거기서 어떤 입자가 나오는지는 절대로 예측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양자도약이라고 불러요. 비유를 들어 얘기하면 이런 거예요. 우리가 어떤 상자 안에다 구멍을 하나 뚫고 거기에 연기를 집어넣는다고 그러면 이것이 언젠가는 평형상태가 되어서 공기의 농도가 비슷해질 것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죠. 그런데 그 연기가 분명히 어떤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을 거잖아요. 그럼 그 각 입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일지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 고전과학이에요. 그런데 그 예측에 성공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예측할 수가 없어요. 각 개별 입자들이 어디로 갈 줄을 모른다고요. 다만 확률적으로 나중에 보면 골고루 퍼져 있게 되어 있다는 것이죠. 바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양자도약 개념이에요. 그럼 개별 입자들은 어떻게 간 거야? 필연적으로 간 거야, 우연히 간 거야? 우연히 갔다고 말을 해야 해요. 바로 이런 겁니다.

 

이 양자역학이나 진화론은 세계는 기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겁니다. 미래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거예요. 이걸 실험적으로 입증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과거에는 세계, 또는 우주는 운동한다고 표현했었지만, 오늘날은 과학자들이 우주의 진화라는 말을 씁니다. 진화라는 말은 두 가지 개념이라고 했지요-돌연변이와 자연선택, 두 가지를 합하면 우연이라는 것이지요. 우주는 어디로 갈지 모른다고요. 초기의 조건이 주어져도 우리는 우주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어요. 결정되어 있지 않아요. 진화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현대과학이에요.

그런데 우연이라는 말을 조금 더 설명해보면, 고전과학의 프레임으로 얘기하면 알려지지 않은 필연이에요. 아직 안 알려져서 그렇지 조금만 더 연구하면 알게 될 거야, 그럼 결정론으로 도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현대 과학이 이야기하는 우연이라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알려지지 않은 필연이라는 뜻이 아니라 자연 자체가 우연이라는 뜻이에요. 예를 들면, 주사위를 던지면 6분의 1의 확률로 1이 나타난다는 것을 우린 다 알지요. 이건 필연이죠. 자 그럼 지금 던지면 1일 나올 확률이 6분의 1이에요? 뭐가 나올지 아나요? 전혀 모르죠. 그런데 만약에 1이 나오면 세계는 저쪽 방향으로 가는 거구요, 6이 나오면 다른 저쪽 방향으로 가는 거지요. 그럼 세계의 미래가 정해져 있어요? 전혀 안 정해져 있는 거예요. 유전자가 그런 것이고, 양자도약이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우연은 알려지지 않은 필연이 아니라 자연 자체의 속성이에요.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이게 어마어마하게 달라진 얘기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지만 자연에는 수없이 많은 주사위들이 있다입니다.

이 말을 여러분이 오해하면 안 되는 게, 현대 과학은 고전 과학을 파괴한 것이냐 그건 아니에요. 현대 과학은, 고전과학이 굉장히 제한적인 것밖에 설명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고전 과학은 필연의 세계를 설명하는 데엔 성공했으나, 세계는 필연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필연 맞다 그러나 굉장히 많은 우연들이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된다, 이런 의미에서 고전과학은 현대과학의 일종의 부분집합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현대과학은 고전과학을 포함해서 더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다는 겁니다. 고전과학이 틀렸다가 아니고.

 

자 그 다음 현대과학을 설명할 키워드는 발현적 속성이라는 말입니다. ‘발현이라는 말이 우연히 만들어졌다이렇게 표현했던 것을 기억하실 거예요. 여러분 최근에 이런 책을 읽어보셨을지 모르는데, [자연은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혹시 들어보셨나요? 아우토포이에시스(Autopoiesis), 복잡계, 카오스(Chaos) 이런 말은 들어보셨나요? 다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최첨단의 과학들이 연구하고 있는 거지요.

이 사람들은 무슨 얘기를 하는가 하면 자연이 스스로 조직해서 새로운 어떤 힘들을 만들어낸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스스로, 진화로 생각해보면 아주 간단해요. 아메바에서 전혀 다른 인간이 나왔잖아요. 인간의 성질하고 아메바의 성질이 전혀 다르지만, 인간이 아메바에서 나왔잖아요. 이것을 물질세계까지 확대해석하고 있는 것이 발현적 속성이에요. 간단히 예를 들면 물은 수소와 산소로 이루어져있지만, 물의 속성-마시면 시원하고, 불에 부으면 꺼지는 이 속성이 산소나 수소의 속성과 관계있어요? 불에다 만약에 산소나 수소를 부으면 어떻게 돼요? 그런데 물을 부으면 전혀 달라지잖아요? 이러니까 물의 속성은 수소나 산소의 속성으로 환원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럼 물의 속성은 원자에서 나오고 수소나 산소에서 나온 거지만, 수소나 산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게 나타난 것이지요. 어떻게? ‘우연히, 저절로’ - 이 얘기에요.

발현적 속성이라는 말도 원래는 생물학에서 나온 것인데, 오늘날에는 물리학자들도 다 쓰는 겁니다. 발현적 속성이라는 말과 연결되어 있는 게 시스템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시스템이라는 것은 부분 시스템들로 이루어져 있지요. 또 부분 부분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고, 끝이 없지요. 계속 가는 거예요. 시스템의 특징은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 시스템들의 성격과 전혀 다른 속성을 갖게 된다는 것에 있어요. 예를 들면, ‘우리 회사에는 시스템이 없어이게 무슨 말이에요? 개인들을 통제하는 무언가가 없다는 것이죠. 개인의 성질에 의해 움직여지니까 아직 시스템이 안 된 것이죠. 발현적 속성이라는 것은 개인들이 모여 있지만 모이고 나면 개인과 전혀 다른 어떤 성질을 갖게 된다, 우리 회사는 어떤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이렇게 되는 거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훨씬 크다, 즉 물은 수소나 산소의 합보다 훨씬 크다, 이건 원래 철학, 사회학, 생물학에서 쓰던 말이에요. 생물학에서 유기체라든가 시스템이라는 말은 바로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쓰는 말이었어요. 세포는 분명히 분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분자의 성격과 전혀 다른 어떤 걸 가지고 있잖아요. 물이 그렇듯이. 바로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말이 나온 것이지요. 철학이나 사회과학에서는 개인들로 모여 있는 사회가 개인들과는 전혀 다른 속성을 갖게 된다. 이런 말을 하기 위해서 썼던 말이지요.

어쨌든 고전과학은 전체는 부분의 합이라고 주장합니다. 환원론, 결정론. 현대 과학은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고 하는 겁니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고 하는 말이 생각보다 굉장히 복잡한 말이에요. 우선 첫 번째, 고전물리학 패러다임 속에 있으면 우리는 아메바를 통해서 원숭이를 알아야 해요. 거꾸로 원숭이를 통해서 아메바를 알 수 있어야 돼요. 현대과학의 패러다임에서는 아메바를 통해서 원숭이를 알 수는 없어요. 몰라요. 그렇지만 나중에 나온 원숭이를 통해서는 아메바를 알 수 있어요. 무슨 뜻일까요? 이게. 우주의 진화라는 말 그대로에요. 나중에 나온 것들은 과거에 나온 것들과 달리 거기에 플러스 우연, 진화라는 것이 있기에 현재를 알면 현재를 만들어낸 필연과 과거의 어떤 우연들을 아는 거죠. 지금 나를 안다는 것은, 거기에서 우연을 제거하면 아메바의 필연성 때문에 내가 이리로 왔다, 그런데 아메바에 주사위 하나가 던져져서 지금 인간이 되었다. 이렇게 되는 거잖아요. 진화는 그런 거잖아요. 그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자연, 물질, 우주에 대한 과학도 마치 사회과학처럼 기본적으로 역사학이라는 겁니다.

 

고전 과학에는 시간이라는 물리 현상이 존재하지 않아요. 고전과학에서 시간이라는 말은 우리 안경처럼 인간이 만들어낸 세상을 보는 틀에 불과해요. 그런데 현대과학에서는 시간은 물리 현상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주는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하는 거지요. 첫 번째는 과학이, 자연과학 자체도, 사회과학 또는 철학, 또는 인문학처럼 기본적으로 시간의 과학, 역사학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물들은 이런저런 관계 속에서 발현적 속성을 갖게 될 수 있잖아요. 이런저런 관계 속에서 시스템을 형성하면 발현적 속성을 갖게 될 수 있잖아요. 과거의 이런 것들이 오늘날에 와서는 전혀 다른 기능과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과거에는 이런 거였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게 되어 버리는 거죠. 예를 들면 금이 옛날에는 이러이러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렸잖아요. 그래서 현재를 통해서 과거를 이해해야 제대로 이해되는 거라는 말은, 또 다르게 공간적인 측면에서 얘기해보면 부분을 알아야 전체를 아는 게 아니라 전체를 알아야 부분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현재라는 완성된 시간 속에서 과거가 이해되어야 되는 것처럼 전체를 통해서만 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현대과학에선 상식이 되었다는 것이죠. ‘단어만 보면 무슨 소용이 있어 맥락을 봐야지하는 인문학적 얘기가 자연 과학자들한테도 이미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 다음 세 번째로는 전체는 부분의 합으로 설명될 수 없는 어떤 새로운 속성을 갖고, 그것이 우연히 만들어진 속성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물질에서 생물이 나오고 생물에서 인간이 나오는 것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원자에서 원자와 전혀 다른 분자들이 나오고, 분자에서 분자와 전혀 다른 유기체가 나오고, 유기체에서 유기체와 전혀 다른 사회적 동물이 나오고, 사회적 동물 속에서 사회적 동물과 전혀 다른 정신을 가진 인간이 나온다.

고전과학은 이건 말도 안 되는 얘기에요. 고전과학자들은 그래서 생물학은 과학으로 취급하지를 않았어요. 놀랍게도. 생물학이 과학에서 시민권을 얻은 건 20세기 이후에요. 거꾸로 오늘날은 반대가 되었죠. 결국 그건 무슨 뜻이냐 하면, 전통적인 의미의 물질/정신 이원론이라든가, 인간/자연 이분법은 말도 안 되는 얘기가 되었다는 거지요. 초기의 자연과학은 철학자들로 하여금 이원론을 지지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고 얘기했었지만, 오늘날 현대과학의 패러다임에선 그 이원론이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오히려 과학은 인문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통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게 바로 현대과학의 패러다임이라는 거지요.

바로 그래서 현대과학이 학문통합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건데, 여러분들이 학문통합 그러면 혹시라도 오해할까봐 한마디 더 덧붙인다면, 굉장히 많은 학문통합 이론들이 있잖아요. 그 중에서도 오늘날 유행하는 학문통합은 유전자 가지고 다 설명할 수 있다그런 거 있잖아요. <이기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그리고 윌슨도 약간의 의심의 여지가 있는, 이런 종류의 학문통합 이론은 환원주의적인 것이에요. 이건 마치 원자를 가지고 모든 걸 다 설명하려고 했던 고전과학 패러다임이나 다를 게 없어요.

 

내가 여기에서 얘기하려고 하는 학문 통합의 가능성은 반환원주의입니다. 발현적 속성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말이에요. 그래서 인간이라는 것이 물질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만, 물질의 운동 방식과 인간의 움직이는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성질 자체가 다르죠. 이래서 환원적인 방식으로 학문을 통합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뒤집어서 얘기하면 현대과학의 학문통합이라는 것은 각각의 고유의 영역을 생물학, 화학, 사회과학, 인문학, 그 각자의 고유 분야를 다 인정하면서 통합하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 보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잖아요. 그걸 고전과학의 패러다임에선 문학적 서술로 생각했지만 이것이 현대과학적 패러다임에선 진짜로 과학적 서술이에요. 여러분은 과학 그러면 여전히 고전과학을 생각하기 때문에 매우 돌리기 어려울 거예요.

제가 너무 많은 얘기를 한 거 아니에요? (웃음)

 

우리 제목이 인간이란 무엇인가이잖아요. 시작도 안했는데, 자 이젠 우리 얘기로 조금 가보겠습니다.

 

근대 철학의 뿌리는 고대 철학이 아니라, 근대 과학에 있습니다. 근대 사회과학의 뿌리는 근대 철학에 있다고 얘기하지만 더 뿌리는 결국 근대 과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근대 사회과학이라는 것이 오늘날 고전 과학의 프레임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짐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근대 이후의 철학, 그로부터 분화되어 나온 사회과학, 정치학, 경제학 이런 것들도 다 고전적 과학에 기초하고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실제로 그렇죠.

가장 대표적인 증거가 어떤 거냐하면, 오늘날 주류 사회과학 그 중에서도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경제학, 경제학의 주류 - 뭐라고 얘기합니까? 인간은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다 라고 딱 정의를 해버리잖아요. 불변의 존재에요. 인간은 경제인이라고 하는 불변의 존재이다. 그리고 이 불변의 존재들이 시장이라고 하는 사회를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불변의 존재만 잘 알면 우리는 경제현상 전체를 알 수 있다. 이런 얘기입니다. 오늘날 경제학은 다른 말로 심리학이라고 부른다는 것 알고 있죠?

 

여러분 게임이론 같은 거 알고 있잖아요. 게임이론이 뭐에요? 모든 사회 현상을 게임을 통해서 만들어 내는 거죠. 죄수의 딜레마니 뭐니 하는 것들이 다 뭐예요? 이기적인데 더 이기적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러려면 이타적이기도 해야 한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근본적으로는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정확하게 고전과학의 프레임을 그대로 담고 있는 거죠. 주류 경제학과 주류 사회과학이요. 개인을 중심으로. 예를 들면 사회계약론이라는 말도 그런 것이죠. 물론 사회계약론에 여러 가지가 있어서 한꺼번에 묶어서 말하기가 어렵지만 어쨌든 개인이 사회를 만든다는 생각은 경제인이나 사회계약론이나 같은 얘기죠.

이게 둘 다 고전과학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증거가 있는데, 예를 들면 원자를 영어로 뭐라고 해요? 아톰(atom)이라고 하잖아요. 어원은 그리스어인데 아톰은 분리될 수 없는, 나누어지지 않는, 절대 불변의 최소단위라는 뜻이에요. 모든 변화는 변하지 않는 어떤 것들이 일으키는 현상입니다. 형식 논리학이에요. A=A라는 것.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개인을 부르는 인디비디움(individual)은 무슨 뜻이에요? 똑같은 말을 라틴어로 한 거예요. 나뉘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같은 말을 한편에선 아톰, 다른 한편에선 인디비디움, 그리스어, 라틴어 그런 거예요. 아톰은 자연과학에서 사용되고 인디비디움은 사회과학에서 사용되지요. 둘 다 고전과학 프레임이에요.

 

그런데 만약 우리가 과학이 가장 믿을 만한 지식이고, 오늘날 과학은 고전과학이 아니라 현대과학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과학에 기초하는 사회학이나 인문학은 고전과학의 패러다임이 아니라 현대 과학의 패러다임을 받아들여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른 베이컨이 필요한 거예요. 신논리학(新論理學)이 아니라 신신논리학(新新論理學)이 필요한 거지요. 정말입니다. 과학방법론을 재구성해야 해요.

예를 들면 필연과 우연, 발현적 속성, 기본적으로 역사, 이런 개념들을 가지고 재구성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주장은 물론 제 주장이긴 하지만 저만의 주장은 아니에요. 오늘날 과학철학은 지금 아비규환(阿鼻叫喚)이거든요, 과학철학자들이 지금 정신을 못 차려요. 뭐가 뭔지를 모르게 됐거든요. 그러나 큰 방향은 제가 제시하고 있는 신신논리학 쪽으로 가고 있는 건 확실해요. 과학철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거예요.

 

그런데 제가 왜 이 이야기를 느닷없이 하고 있느냐 하면, 신영복 선생의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의 변화라는 말이 바로 이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재밌지 않나요? 정말이에요. 여러분들이 행간을 잘 찾아서 읽어보시면, 분명하게 이 신신 논리학이 주장하는 바가 바로 관계론이에요. 존재론을 버리고 관계론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런 거예요. 오늘 강의의 요지는 신영복의 관계론이라는 것은 결국 현대 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춰서 인문사회과학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는 거예요. 관계론이라는 주장이 여러분은 신영복 선생이 순전히 동양고전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다다른 결론이라고 이해를 하면 오해가 된다 이 말이에요. 과학적 근거를 갖고 있다는 말이에요.

정말이에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런 겁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존재론을 비판하고 있는 것 알고 있지요? 그런데 신영복 선생님이 쓰는 존재론이라는 말은 자칫 잘못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단어예요. 일반적으로 존재론이라는 말은 철학자들이 쓰는 말이잖아요? 철학자들은 존재론이란 말을 어떤 뜻으로 써요? 중요합니다. 존재론이 어떤 뜻이에요? 우리가 안다는 것은 뭐가 있어야지 아는 거 아니에요? 뭐에 대해서 아는 거지 그냥 아는 게 어딨어. 그러면 뭔가 알려면 알기 전에 어떤 대상에 대한 얘기를 해야 될 거 아니에요, 있음에 대해서 얘기해야 될 거 아니에요. 뭐가 있는지. 그게 존재론이에요. 뭐가 있어야 알 수 있는 거지요. ‘알아야 있는 거예요? 있어야 아는 거예요?’ - 있어야 아는 거지요.

그런데 오늘날 주류 철학자들 중의 이원론 속 관념론 요소인데, ‘알아야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물론 있어요.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경험주의자라고 하는 흄이 그런 사람이에요. 이상하죠? 흄은 경험주의자니까 바깥의 어떤 것을 경험해서 내가 알게 된다고 생각해야 하잖아요? 흄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오늘날 주류 경험론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알아야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에요. 굉장히 터무니없는 사람들이죠. 어쨌든 철학에서 쓰는 존재론은 그런 단어에요. 그래서 존재론과 가장 비슷한 단어를 하나 골라라 라고 하면 형이상학이에요. 형이상학이라는 말은 현상을 만들어 내는 배후에 뭐가 있느냐에 대한 얘기에요. 경험을 일으키는 배후에 뭐가 있느냐 그걸 연구하는 게 형이상학이거든요, 그런데 경험한다는 말과 안다는 말이 비슷하잖아요, 그러니까 알기 위해서는 그 앞에 뭔가 존재해야 된다고 하는 존재론이나 형이상학이라는 말이 같은 말이에요. 형이상학=존재론.

그런데 신영복 선생님은 그런 뜻으로 쓰는 게 아니에요. 일반적인 철학자들이 쓰는 존재론의 의미가 아니고,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신영복 선생님은 현대 주류 사회과학에서 쓰는 존재론,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얘기하면, 주류 사회과학이 기초하고 있는 고전과학의 존재론-뭐에요 이게? 환원론과 결정론이라고 제가 얘기했잖아요. 그걸 비판하는 거예요. 고전물리학의 존재론, 또는 주류 사회과학의 존재론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지, 존재론 일반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존재론을 벗어나야 한다는 말은 바로 고전물리학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라는 말이라는 뜻이에요. 증거가 있냐구요? 증거가 있어요.

 

지금부터 신영복 선생님이 직접 쓰신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근대 사회의 구성원리는 존재론입니다. 근대 사회의 전개과정은 자기의 존재성을 배타적으로 강화해온 역사였습니다. 개인, 기업,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체는 강철의 신념에 몰두해 왔습니다. 그러나 세계는 존재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불변의 배타적 존재는 없습니다. 너와 나는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고 다른 모든 것과의 관계 속에서 확률과 가능성으로 존재합니다. 관계론이 세계의 참된 구성원리입니다.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의 전환이 탈근대를 지향하는 이들의 당면 과제입니다.“ 라고 되어 있거든요, 여기서 확률과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이 말은 현대 과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쓸 수 없는 단어에요. 존재론 비판이라는 말은 근대 사회 자체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지만, 근대 사회를 정당화하고 있는 근대 주류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고, 고전과학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근대 사회, 또는 사회 일반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개인이 사회를 만드는 경우를 한 번이라도 본적이 있으십니까? ‘개인이 먼저에요? 사회가 먼저에요? 닭이 먼저에요? 달걀이 먼저에요?’ 이렇게 질문을 하면 여러분은 곧바로 철학적 질문으로 들어가서 막 따져요. 과학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과학자들은 경험에서 출발해요. 경험된 모든 개인 중에 부모 없는 개인이 있냐고요? 사회가 먼저에요. 최소한 부모사회로부터 우리가 나온 거예요. 경험적인 사실이에요. 철학자들은 개인이 먼저인지 사회가 먼저인지 말장난하듯이 따져요. 과학자들은 무조건 사회가 먼저에요. ‘그래도 그 앞에는 뭐가 있을까?’-이렇게 경험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것은 과학적 질문이 아니에요. 철학자들이 심심풀이로 할 수는 있겠지만.

역사 속에서 사회 없이 개인이 있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개인이라는 말을 우리가 조심스럽게 써야 하는데, 개인이라는 말은 결코 생물학적인 개체를 지시하는 말이 아니에요. 오늘날 개인이라는 말은 법을 만드는, 사회 질서를, 사회를 만드는 주체로서의 개인이라는 뜻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 종류의 개인은 근대 사회에만 있었죠. 그 이전엔 신이 만들거나 신의 이름을 빌린 성직자들이 법을 만들었죠, 우리로 따지면 양반이었죠. 보통사람들은 법을 만들 수 없었죠.

우리가 스스로를 개인이라고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근대 사회에 와서의 얘기입니다. 그 이전의 사람들은 나는 나다라는 말은 성립할 수가 없는 것이죠. 조선 시대에 너는 누구냐?’라고 물으면 건넌 마을의 셋째에요. 이름이 무어냐? 그런 거 없어요. 셋째라니까요. 이렇게 되는 거잖아요. 비슷하게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자기의 목숨 버리는 것을 헌신짝 버리듯이 해요. 뭘 위해서? 자기네 집단을 위해서. 왜냐하면 나라고 하는 것은 집단의 부품이거든요, 부모나 사회가 훨씬 중요하거든요. 자기 정체성이 없어요. 개인의식이 없다구요. 죽음이 안 무서워요. 오늘날처럼 죽음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어요? 거꾸로 그래서 자살율도 높아지는 거지만. 나밖에 없으니까, 그러니 죽는 게 얼마나 두려워요? 내가 만약에 사회의 부품이라고 한다면(부품이라는 표현이 좀 그렇긴 한데) 내 죽는 게 뭐가 그렇게 두려워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개인의식, 죽음에 대한 공포 이런 것들이 전혀 자연적인 게 아니라는 겁니다.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거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회적 관계가 개인을 탄생시켰다. 동의하시나요? 그럼 어떤 사회적 관계가 그걸 만들어 냈겠어요? 근대 사회, 구체적으로 시장과 학교가 개인으로 만들어낸 것이지요. 근대사회는 시장과 사회가 개인으로 교육시킨 겁니다. 어린 시절을 잘 생각해 보세요. 어릴 때는 부모가 전부예요. 형제 식구 가족들이 어마어마하게 중요해요. 내가 시장에서 훈련받고 학교에서 훈련받고 나면 점점 달라져요. ‘부모도 뭐 까짓 거 계약이지 뭐. 형제, 밥 먹여주냐’, 이렇게 나오잖아요. 이게 바로 관계 자체가 사회에 의해 만들어지고 관계 속에서 개인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오늘날은 우리가 개인이란 정체성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어요. 주민등록증, 아이디 관리 해야죠, sns아이디도 관리해야하죠. 아이디로 나를 관리하게 하잖아요. 그렇게 안 하면 안 되게 시스템이 되어 있잖아요. 그 시스템이, 사회가 개인을 자꾸 만든다.

그러면 근대사회 관계가 무슨 관계냐, 아까 시장 학교를 얘기했었지만 근대사회적 관계를 무어라 하냐, 근대 사회를 흔히 이중혁명의 결과라고 합니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입니다. 이것은 홉스 봄(Eric Hobsbawm)이라는 학자가 하는 말이지만 모든 사람이 다 동의하는 말입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중요한 것은 시민혁명이에요. 시민적 인간관계라는 것과 전근대사회의 인간관계, 이 차이점은 여러분 아시죠, 전근대사회 관계는 신분제이잖아요. 근데 예를 들면 신분제란 나는 귀족이니까, 오백 원짜리 삼백 원에 줘.” 그럼 줘야 해요. 이게 전근대적 신분제 관계에요. 근데 시장에서 이렇게 말하면 쟤 미쳤나봐.” 그러잖아요. 동등하잖아요. 이게 바로 시민관계에요. 시민관계란 말은 시장 사람들의 관계란 뜻이에요. 시민이란 시장이란 뜻이잖아요. 왜 시장사람들을 보고 잡것이라 그랬겠어요. 신분제 사회를 뒤집어버리니까 잡것이에요.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 잡것이 자유와 평등이잖아요. 오늘날은 여러분은 잡것을 좋아하잖아요. 지금. 달라진 거지요. 어쨌든 그런 겁니다.

 

근데 시민혁명을 대표하는 것이 프랑스 혁명인 거 아시죠. 구호는 자유·평등·박애, 다른 말은 연대입니다. 사랑이라고 부르시든지. 사회과학에서는 연대라는 말을 주로 많이 씁니다. 이 자유·평등·연대가 바로 개인이란 개념을 만들어 냈어요. 그래서 그 자유·평등·연대에 기초하는 사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근대사회이죠. 그런데 프랑스 혁명이 실제로 자유·평등·연대라는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 냈어요? 못 만들어냈죠. 사실은 우리가 근대적 시민관계라고 하는 자유·평등·연대이라는 것은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어요. 다른 말로 하면 프랑스 혁명은 미완의 혁명입니다. 현실적으로 이뤄진 것은 없습니다. 자유, 돈의 자유입니다. 돈 있는 사람만 자유롭지 돈 없는 사람은 전혀 자유롭지 않습니다. 요즘 라디오 광고에서 자유가 뭔지 아는 사람? 다른 사람의 속박을 받지 않고. 틀렸습니다. 자유란 여행입니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여행은 돈입니다. 돈 없으면 여행 못하고 자유롭지 못하죠. 프랑스 혁명이 만들어낸 실제 사회는 돈 있는 사람의 자유, 돈의 자유. 평등도 마찬가지입니다. 평등도 사실은 굉장히 사이비 평등이 이루어져 있죠. 사이비 평등조차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굉장히 평등한 것 같겠지만 일생에서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직장의 상사입니다. 직장의 상사와 여러분이 평등한 관계에요? 한번이라도? 천만에요. 교장선생님 앞에 가면, 사장 앞에 가면 꼼짝도 못합니다. 그게 무슨 평등이에요. 거의 대부분의 관계에는 평등하지 않은 관계에 있습니다. 왜 그런지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어쨌든 평등하지 않은 건 틀림없습니다. 지금 교실에선 여러분과 내가 평등합니까? (! 웃음) 여하간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연대조차 그렇잖아요. 연대한다고 우리가 모든 사람과 모든 사람이 연대하고 있어요? 민족주의, 지역주의, 국가주의 완전히 왜곡된 연대밖에 없잖아요. 전혀 실현되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의 자유·평등·연대는 문자 그대로 왜곡된 자유·평등·연대입니다. 그걸 우리는 뭐라고 불러요? 자본주의적 근대사회라고 불러요, 왜곡된 근대사회.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구호로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신영복 선생님이 주장하는 탈근대란 말은 철학자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쓰는 탈근대라는 말과도 다릅니다. 어떤 의미에서 다르냐면 왜곡된 근대를 벗어버리고 원래의 이념 그대로의 자유·평등·연대가 실현되는, 진짜 근대를 만들어내자는 의미의 탈근대입니다. 탈근대, 그러면 자유·평등·연대를 제대로 실현하는 근대를 만들자 이런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영복 선생님은 과학, 고전과학을 굉장히 비판 하고 있지만 여러분들이 행간에서 사회과학을 신뢰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을 거예요. 그때 사회과학은 아까 얘기했던 현대과학의 패러다임과 연동되어 있는 사회과학을 얘기 하는 거지 고전과학에 연동되어 있는 사회과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류 경제학 이런 것과 연동되어 있는 게 아닌 겁니다. 여러분과 저나 마찬가지로 신영복 선생님도 과학이 가장 믿을만한 지식이란 걸 의심하진 않는 겁니다. 그러면 탈근대도 어떻게 읽어야 해요? 과학을 버리는 게 아니라 제대로 과학을 하자, 근대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근대를 하자 이런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숨찹니까? (웃음)

더숲트리오의 즐거운 분위기가, 강의를 자꾸 하라고 그래가지고 분위기를 완전-(미소) 자 이제 우리 결론으로 갑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고전물리학의 패러다임을 따라간다고 하면 우리는 사회를 설명할 때도 불변의 개인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게 되죠. 근데 만약 우리가 만약 현대과학을 따라간다고 그러면 불변의 속성이 뭐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죠. 오늘날 현대물리학은 별도 생성 소멸한다고 얘기하잖아요, 원자도 수명이 있다고 얘기하잖아요? 여러분 원자 수명이 얼만지 아세요? 여러분 우주의 나이가 몇 살이에요 137억이라고 돼있죠? 우주의 나이를 어떻게 계산하는지 아세요, 신기하지 않아요? 원자도 수명이 있어요. 그 수명이 우주 나이보다 길어요. 어떻게 측정했을까, 할 수 있어요. 실험적인 거예요 어쨌든 간에 내가 아까 모든 물질에서는 사실은 빛이, 입자가 나온다고 했잖아요. 이게 어느 순간 나오면 원자가 깨지는 거예요 나오는 속도를 재면 백오십 억년 정도 되어요, 원자가 깨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워낙 요즘은 입자를 측정하는 기술이 있기 때문에 별짓을 다해요.

여하간 그래서 불변의 속성을 묻는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는 걸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어떠한 사물의 속성은, 사물의 정체성은 불변의 어떤 것으로 되어 있는 게 아니라 다른 것과의 물질의 대사 속에서 이뤄진다는 거예요. 여러분 생명이 이렇다는 건 다 알고 있죠, 생명체가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물질 대사 계속해야 하잖아요. 만약에 어제 나를 구성하고 있던 원자 십억 개가 똑같이 오늘도 십억 개라면 나는 죽은 목숨이에요. 내가 자꾸 바뀌어서 새로운 것으로 바뀌지 않으면 나는 살 수 없어요. 그래서 고전 과학으로 따지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 거예요, 다른 거예요? 전혀 다른 거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이 계속해서 달라져야만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것을 고전과학은 설명할 수 없어요. 그래서 철학하고 통합이 안 되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정체성이란 게 철학에서는 어떻게 얘기해요? 다 늙었는데 나만 안 늙으면 나는 망하는 거지,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거죠. 오히려 관계 속에서만 유지되는 거잖아요. 나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가 새로운 것으로 바뀌어야지만 정체성, 생명을 유지할 수 있잖아요. 이걸 현대 과학은 그대로 다 인정한다는 거죠. 그래서 물질대사를 통해서 정체성이 유지되는 거지 정체성이 불변의 어떤 것이다, 이게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까 나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나와의 물질대사를 하는 관계 또는 세계 또는 사회,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내가 유지되고 있다는 거죠. 나의 정체성은 나의 정체성이 아닌 거죠. 나를 둘러싸고 있는 관계의 정체성이라는 거죠.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자 여기서 약간의 오해를 할까봐 덧붙이는데, 고전 물리학은 원자 결정론, 그리고 고전물리학에 따르는 주류 사회과학은 개인 결정론, 그렇다고 하면 현대과학은 관계 결정론? 이른바 사회과학 용어로 하자면 구조 결정론 그럴까요? 그렇지 않아요. 아까 제가 현대과학은 고전과학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포함한다고 했죠. 필연적인 것들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근데 필연과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우연히 만들어진 환경, 관계가 나를 결정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두 가지를 다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지 하나는 개인 결정론 또는 원자 결정론, 또 하나는 시스템 결정론, 구조 결정론, 환경 결정론 이렇게 읽으면 안 된다는, 이렇게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거죠. 현대물리학은 자연에 우연이란 게 존재한다고 말하는 거지 필연이 없다고 하는 게 아니에요 필연은 당연히 있어요. 예를 들면 물이라는 발현적 속성이 있다고 해서 물을 구성하고 있는 수소나 산소의 속성이 없어져요? 그렇지 않아요. 발현적 속성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그것을 구성했던 수소 산소의 속성이 없어지는 게 아닌 거죠. 예를 들면 우리는 발현적 속성의 한 예로 슈틸리케호를 들 수 있어요. 슈틀리케를 아세요? 축구팀 감독 이름이에요.(웃음)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은 감독이 바뀌면 전혀 다른 성격의 팀이 되잖아요. 이런 경우가 바로 발현적 속성이에요. 그러나 남자로 구성된 11명의, 그리고 여자로 구성된 11명의 축구팀을 가정해 보면 똑 같아요? 그럴 수가 없잖아요. 남자 여자 얘기하는 게 좋은 예는 아니지만 어쨌든 선수가 가진 속성이 여전히 있는 거거든요. 두 가지를 다 인정하는 게 현대 물리학, 현대과학이지 개인이 전체에 의해서 결정된다.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는 걸 주장하는 게 아니에요. 두 가지가 다 있다는 것을 얘기하는 거지요.

 

자 그러면 두 가지가 다 있다 라는 말은 어떤 뜻이냐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나는 개인이 결정하는 사회관계, 시장이나 근대사회 관계가 나를 결정하는 측면도 있지만 내가 원래 가지고 있는 속성도 있다는 거예요.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는 속성이 뭐예요. 동물하고 다른 점이. 생각한다는 것, 그렇죠. 말을 한다는 것. 인간이라고 한다는 건 그냥 생각하지 않죠. 말을 통해서만 생각하죠. 제가 지난 시간에 질문을 던졌던 거 같은데 지금부터 말없이 생각해보세요. 인간은 말없이 생각을 못해요. 그렇다면 말 없는 동물은 생각 안 해요? 개가 아무 생각 없으면 주인을 물죠. 생각이 있다고요. 이것을 구별해야 해요. 그냥 생각이라 하면 안 되고. 철학자들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생각을 정신이라고 불러요. 정신이라고 하는 말은 의식이라고 하는 말과 달라요.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말 어원을 따라 가면 외부의 자극이 나에게 그대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의식이에요. 의식은 대단히 수동적이고 내가 저쪽 환경에 가면 거기에 맞춰서 새로운 의식이 만들어져요. 전형적으로 아이들이에요. 아이들을 여기서 키우면 그런 의식을 갖게 되어 있어요. 동물들의 의식과 같아요. 의식은 수동적이라는 것. 환경이 그대로 만들어내는 것. 그런데 인간의 정신 속에는, 생각 속에는 의식도 있죠 물론. 그렇지만 인간의 정신적이라는 건 그런 종류의 수동적인 것들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아요. 우리가 능동성을 어떻게 찾아요? 거울을 볼 때, 거울을 본다는 말은 무슨 말이에요. 내가 가지고 있는 의식은, 내가 의식한다고 철학자들이 얘기하는데, 간단히 얘기 하면 거울을 보면서 어 여기 뭐 묻었네그러잖아요. 안 묻은 게 묻은 것보다 좋다고 판단하잖아요. 무슨 뜻이에요 자기를 관리한다는 뜻이에요. 자기라는 게 있다는 걸 아는 거예요. 그걸 관리하려 그러는 거예요. 예를 들면 거울 보면서 저게 나라는 것을 아는 놈은 있어도 관리하는 동물은 없어요. 우리는 관리하잖아요. 세수도 하고 전혀 다른 거예요. 이게 의식과 자기의식의 차이예요.

 

나를 내가 의식한다. 내가 나를 관리한다. 왜 그러느냐, 우리한테 이러저러한 생물학적 속성이 있기 때문이에요. 이 속성을 프로이트는 자아방어기제라고 그래요.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려 해요. 그러면 뭐예요, 의식이라는 게 왜 있는지 수동적인 의식이라는 게 결국 뭐와 연결되어 있는지 생각해 봐요. 지금 현재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에요. 세계를 알아야 내가 살죠. 인간이 그런 의식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당연히 있죠. 지금 살아남아야 하니까 인간이란 게 그런 의식으로만 주어져 있는 게 아니라 미래에까지 살아남으려는 존재, 죽음을 의식하는 존재잖아요. 왜 그게 가능하겠어요. 말로 세계를 구성하기 때문이죠. 동물은 감각으로 세계를 구성하니까 자기가 구성하는 게 아니라 세계에 의해 구성되는 거죠 수동적으로. 그래서 지금 여기밖에 없어요. 동물들한테는. 미래가 있다고 해도 아주 부분적으로 있어요. 주로 지금 여기밖에 없어요. 거기에 비해 인간은 미래가 있어요. 예를 들면 내가 배가 고프면 먹으려 하는데 지금 먹으면 나중에 못 먹을까봐 안 먹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지금 내가 먹으면 배부르겠지만 나눠먹어야 된다는 걸을 알아요. 그래야 나중에 나눠 받을 수 있잖아요.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에요. 이걸 뭐라 해요. 의식을 통제하는 인간의 정신을, 양심이라고 그러죠. ‘슈퍼에고superego’라고도 하죠. 어쨌든 지금 여기에 매몰돼 있는 의식을 통제하는 또 하나의 다른 의식, 양심이에요. 인간의 정신을 크게 보면 의식과 양심으로 되어 있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리액터(reactor)가 아니라 액터(actor)가 될 수 있는 거죠. 양심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액터가 되는 거죠. 의식에 따라 움직이면 몸이 편해요. 지금 현재. 근데 양심에 따라 움직이면 마음이 편해요. 그죠 이런 거예요. 뭐가 더 편한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우리는 리액터가 아니라 액터라 부를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이런 자기의식 능력을 어떤 사람은 반성 능력이라 부르고 어떤 사람은 성찰 능력이라 불러요. 혼용해서 쓰는 경우가 많지만 나는 특별히 조금 아까 얘기했던 것을 반성능력이라 하고, 성찰이라고 하는 건 반성을 뛰어 넘는 어떤 거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양심에 따라 우리가 자기 자신의 의식을 통제하는 것 이것이 분명히 우리를 액터로 만들고 이 말은 자기 이유에 따라서 스스로 움직이니까 자유다, 주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 양심은 어디서 오는 거예요? 대부분 그 양심이란 건 부모의 양심이잖아요. 선생의 양심이잖아요. 선생과 부모의 양심이 내 양심이 되는 거잖아요. 성찰은 바로 그런 걸 얘기하는 거예요. 도대체 이게 누구의 양심이지? 예를 들면 지각하면 안 된다, 양심적으로 좌측 혹은 우측통행을 하겠다, 쓰레기를 줍겠다’, 이게 반성이고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양심을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액터가 될 수 있는 거지만 아니 왜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되는 거냐고. 누가 나보고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고 가르쳤어. 쓰레기를 버려야 더 좋은 일이 있는 거 아냐 직업도 만들고?’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주어진 양심에 순응하는 게 아니라 양심 자체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거죠. 더 나은 양심은 있을 수 없는 건가, 이게 왜 꼭 양심이어야 해? 더 나은 양심은 없어?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것, 이것을 반성과 구분되는 성찰이라고 해요. 가장 양심적인 게 뭐냐, 더 양심적인 게 뭐냐 이게 바로 성찰입니다. 그래서 반성하는 인간은 부모와 선생에게 순종하게 되는 일종의 리액터이지만 성찰하는 인간은 부모와 선생을 넘어서서 더 근본적인 양심에 대해 생각을 하기 때문에 더 진짜 액터가 된다, 이런 뜻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질문거리가 있을 거예요. 그게 양심이야 더 나은 양심은 없어? 라는 질문을 하게 되면 우리는 그 양심도 있고 저 양심도 있잖아 그럼 도대체 뭐가 진짜 양심이야 아무거나 다 양심 아니야 라고 갈 수도 있죠. 그 결과는 최종적으로 양심은 없는 거죠. 다 양심이면 양심이 없는 거죠. 지 멋대로 가게 되죠. 가능해요? 근데 그게 가능하지 않아요. 아까 우리가 정체성이라고 하는 건 물질대사, 관계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고 얘기 했잖아요.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유지될 수 있어야만 내가 나의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다고 했잖아요. 내 양심이 유지될 수 있으려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잘 만들어내는 양심이어야 해요. 이게 안 되면 모든 게 다 양심이 된다면 사람들이 각자 사회적 관계를 포기하는 상황으로 가게 되어요. 사회적 관계를 포기하게 되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을 우리는 사이코패스라 불러요. 그 사람은 생존할 수 있어요? 불가능해요. 정체성 자체가 파괴돼요. 아무 양심이나 좋다? 실제로는 자기가 파괴되어요. 왕따가 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파괴되어요.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어요. 그래서 그 양심이 더 나은 양심이 아닌가라는 성찰적인 질문은 더 좋은 것을 찾는 것이지 아무 거나를 찾는 게 아니에요. 이 부분을 여러분들이 혹시 오해할까봐 말해 둡니다.

 

내 양심이란 게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인데 세계는 진화, 변화하는 것이잖아요. 그러면 내 양심도 변화하는 거죠. 더 나은 양심이 있을까 없을까 또는 더 나은 양심이라는 확신이 있을까 없을까, 과학이라는 것과 양심이 뭐냐는 성찰은 사실은 똑같아요. 어떤 의미에서 똑같냐 하면 지남철 원리를 얘기할건데, 지남철은 그 끝이 흔들리기 때문에, 끝이 흔들린다는 것은 이것인지 저것인지 잘 모른다는 거잖아요. 근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남철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고 말하잖아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지남철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서 우리가 움직여야 된다는 얘기 아니에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멋있긴 한데 과학적이진 않잖아요. 이걸 풀어야 해요. 여러분 과학이라고 하는 건 자연 자체에요 아니면 자연에 대한 서술이에요? 자연에 대한 서술이고 표현이잖아요. 어떤 표현, 어떤 서술도 자연 자체일 순 없잖아요. 무슨 얘기에요 우리는 항상 자연에 근접해 갈 수는 있을지는 모르만 자연 자체일 수는 없다. 즉 우리는 그 표현은, 서술은 틀릴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해요. 내 성찰도 마찬가지에요. 틀릴 수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과학은 언제나 틀릴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학문입니다. 우리가 현대적인 과학의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는 성찰이라면 마찬가지에요. 이게 만약 절대적이라고 하면 더 이상 과학이라 할 수 없어요. 망가진 지남철이에요. 실제 과학은 그래요. 어떤 의미에서든 권위적인 과학자가 아무리 주장해도 일개 풋내기 조교가 실험을 해서 이게 맞자나 하면 할 말이 없어요. 열려 있어야 해요. 과학세계에서 권위적이고 도그마적인 과학은 유지될 수 없어요. 항상 열려 있을 수밖에 없어요. 거기에 비해 옛날 경전들은 그렇지 않았죠. 바로 그래서 망한 거죠. 그래서 사람들이 버리게 되죠. 과학은 사람들이 안 버려요. , 열려있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요.

그러면 항상 틀릴 수도 있다라고 하는 거, 그래서 어떤 과학이론은 새로운 과학이론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라면 예를 들면 뉴턴이 아인슈타인으로 바뀌었는데 아인슈타인이 뉴턴보다 더 발전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요? 더 발전했다고 말해야만 우리는 지남철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을 수 있을 거 아니에요? 흔들리고 있지만 가리키는 방향을 믿을 수 있다는 말은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점점 뭔가 자세하게 지시해줄 거라는, 발전할 거라는 믿음이 있잖아요. 근데 틀릴 수 있는 거라면 어떻게 믿을 수 있는 거냐는 거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통 우리가 뭐가 옳다 그러면 사람이 옳다고 얘기하는 거지만 과학은 자기 이론이 옳다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실험을 통해서만 옳다고 그래요. 실험이라는 게 뭐냐면 아까 베이컨 얘기했었잖아요. 베이컨이란 사람이 실험에 대해서 너무나 멋지게 표현한 말이 있어요. 실험은 자연이 스스로 답하도록 자연을 고문하는 일이다라고 해요. 중요한 말은 자연이 스스로 답한다는 말이에요. 실험은 실험결과를 자연이 답하는 거지 우리가 답하는 거가 아니에요. 실험 세팅은 우리가 하는 거지만 그 결과는 자연이 하는 거예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실험 결과는 자연이 답하는 것이기 때문에 올바른 거, 믿어도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를 들면 뉴턴은 이러저러한 실험을 통해서 이게 최선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실험결과를 묶어서 최선이라고 얘기했어요. 아인슈타인은 그보다 더 많은 실험을 해서 그것을 다 포함한 더 큰 얘기를 하면서 이것이 옳다고 했어요. 중요한 것은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관계는 포함관계예요. 발전이에요.

무슨 말인지 이해되시죠? 이게 아인슈타인이고 이게 뉴턴이에요.

 

이래서 발전이라고요. 물론 아인슈타인은 나중에 쯔바이슈타인으로 바뀔 수도 있어요. 아인einone이란 뜻이고 쯔바이zweitwo라는 뜻이에요. 슈타인steinstone. 원스톤(=아인슈타인Einstein)은 투스톤이 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이런(포함) 관계가 될 때만 우리는 받아들여요. 그러면 발전이라고 얘기하는 거죠. 과학은 이런 방식이고 이걸 입증하는 것은 실험결과라는 거죠. 실험은 자연이 스스로 답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그 발전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도 되는 거고 그래서 가리키는 방향을 믿을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아까 우리가 우주의 운동이라고 하는 우주의 진화라고 얘기했는데 우주의 진화라는 말 속에는 우주의 운동이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양심의 경우도 마찬가지에요. 과학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찰을 통해서 양심을 찾아가는 과정도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가장 양심적인 것을 찾아 나서는 일종의 탐험이, 모험이, 성찰이라는 거예요. 그걸 찾아나가서 지금까지의 모든 성찰보다 더 나은 양심을 찾아 간다면, 더 보편적인 양심을 찾아 가는 거예요. 자유·평등·연대가 더 확산되는 걸 찾아간다면 우리는 그것을 발전된, 더 나은 양심이라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오늘날 심지어 우리는 동물권도 얘기하고 있잖아요. 적어도 성찰적으로는 더 커지고 있죠. 조금만 더 지나면 이젠 돌멩이의 권한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지 몰라요. 여하간 그래서 성찰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의식, 자기 양심, 자기의 정체성을 깨트려 나가면서 더 큰 의식, 더 큰 양심, 더 큰 정체성을 향해서 가는 게 성찰이라 합니다. 과학하고 똑같은 것이다, 이런 겁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신영복의 인간이란 무엇인가. 기대되죠? 우리는 더 낫다, 더 낫다 이런 방식으로 얘기했었는데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 가는 거예요? 성찰과 과학은 어디를 향해서 가는 거예요? 뭐가 최선이에요? 성찰과 과학이 목표가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당연히 목표가 있죠. 어디로 가는 겁니까? (공존) 네 공존. 결국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이해해야 하는데, 과학이 법칙을 만들어내요? 발견해요? (발견) 발견이란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연에 원리들이 있는데 그것을 찾아 나간다는 거잖아요. 그럼 최종적인 목표는 자연 그 자체의 원리를 그대로 찾아내는 거잖아요. 적어도 가까워져야 되는 거잖아요. 그게 목표에요. 자연의 섭리를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방식으로 서술해 내는 거예요. 계시나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입증하는 방식을 통해서 수학적으로 증명하고 실험을 통해서 확인하는 방식으로 자연의 섭리를 찾아가는 것이 과학입니다. 목표는 자연을 그대로 닮는 거예요. 발견하는 거지 만드는 게 아니에요. 성찰도 마찬가지예요 성찰은, 양심이란 게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인간 사회라는 자연 속에 있는 것을 찾아가는 작업이에요. 인간사회라는 자연 속의 원리는 사실은 자연의 원리이죠.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자연에 이미 있는 원리를 찾듯이 사회에 이미 있는 것을 찾아 나가는 것이다. 왜곡된 것들을 바로 잡는 거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이해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실험은 누가 답을 한다고요? (자연) 자연이 스스로 답하는 것이다. 실험에 해당되는, 실험과 반성에 똑같은 말이 인문사회과학에서는 뭐라고 생각하냐면 실천이라고 합니다. 실천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럼 실천이 옳은 실천인지, 옳지 않은 실천인지에 대한 답은 말하는 것은 누가 답하나요? 미래사회가 하잖아요. 여러분이 하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가 지금 잘하는지 못하는지 어떻게 알아요. 역사가 알지. 미래사회가 하는 겁니다. 미래라는 자연이 하는 겁니다. 바로 그래서 우리는 자연이 스스로 가르쳐주는 답을 찾기 위해서 계속 가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뭔가 답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재밌는 얘긴데 과학이든지, 실천이든지, 성찰이든지 그 최종적인 심판관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 자체에 있다는 것. 자연의 섭리가 최종적인 심판관이라는 거. 자연 스스로 해주는 답에 대해서 우리가 찾으려 하는 게 과학이고 성찰이라는 겁니다.

 

 

이 말을 이미 노자가 했어요. 여러분 당무유용(當無有用)’이라는 말 아시죠? 우리가 있다고 얘기하는데, 우리가 뭘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있기위한 전제조건은 자연이 있어야만 된다는 거잖아요. 그럼 자연이 없으면 우리가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그게 당무(當無)예요. 자연이 없으면 우리도 없는 걸 알게 된다는 거죠. 자연이 없으면 우리가 없다는 걸 알아야 우리는 용(),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도 같은 말이에요. 우리는 자유를 통해서 진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자연 속에서만 가능해요. 세계 속에서만, 인간사회 속에서만 가능해요. 그게 없으면 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당무(當無), 그래야 나도 주체가 될 수 있어요. 유용한 존재가 될 수 있어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최종적으로 우리는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예요? 상선약수(上善若水)예요. 그래서 자연의 섭리라고요. 이런 겁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과학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필연이라고만 생각했어요. 현대과학은 필연과 우연을 다 같이 묶어서 생각해요. 전체를 봐야 부분이 보여요. 현대과학은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을 다 같이 통합될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최종 목표는 자연의 섭리를 발견하는 거예요. 그리고 결국 자연을 닮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거죠. 이걸 문학적으로 이해하시면 안 된다는 겁니다. 과학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자 그래서 결론적으로 신영복의 인간은 고전과학과는 매우 크게 충돌하지만 신영복의 인간은 동양학과 굉장히 닮아 있지만 동시에 뭐하고 닮아 있다고요? 현대과학의 패러다임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이게 오늘의 결론입니다. 애쓰셨습니다.

즉문현설(卽問賢設)

 

1. ‘자연(自然, self-so)’- ‘스스로 그렇게변화해 가는 것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인 건지요?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자연스럽다라는 말이 굉장히 많은 오해가 있어요. 그래서 자연스러운 것에 대한 여러 가지 이견이 있었던 것이죠. 어떤 것이 자연스러운지에 대해선 과학이 알려줍니다. 예를 들면 매우 자연스럽다고 했던 많은 것들이 알고 봤더니 신분제, 가부장제의 결과물이었던 것을 알고 있잖아요. 이것을 누가 가르쳐 주나요? - 과학이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더 자연스러운 것, 왜곡된 자연을 바로 잡는 일들을 매우 많이 합니다. 여러분이 언뜻 생각하면 상대적인, 옛날에는 이랬다가 지금은 이러하다는 식의 다양성으로 해석되어지고 있지만 매우 많은 것들은 포함관계로 자연 속에 나타난다는 거예요. 그 옥석을 잘 구별하려면 어느 게 진짜 자연적인 것이고, 역사 속에서 인간관계 때문에 본래의 우리 모습이 얼마만큼 왜곡되어 있는 것이지 이런 것들을 구별해 내는 게 공부하는 것이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럼 자연스럽게 저절로, 자연의 원리에 따라서 세계가 변화하는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우주의 진화 방향은 어디로 갈지 모른다고요. 우주 속에는 필연과 우연이 같이 있다고요. 그런데 필연이라는 것 중의 하나는 인간이 정신적 존재라는 겁니다. 인간이 말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말하는 인간이 다 성찰적이에요? 또는 성찰하는 인간이 정말 자연 자체를 찾아가려고 해요? 아니면 말은 성찰인데 딴 짓하고 있어요? 모르잖아요. 이런 건 우연이에요. 성찰을 할지, 제대로 할지, 인간이 경전을 찾아갈 지, 과학을 찾아갈지 - 이런 건 일종의 우연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정신적 존재이다라는 것은 필연이에요.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미래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어요. 여러분이 만약에 됐어라고 말하면 우리는 그대로 사는 것이고, ‘이건 아닌데라고 얘기하면 달라질 수 있는 거죠.

 

2. 그러면 자연의 섭리를 찾아가는 것이 우리가 나아갈 길이라고 하면 매우 포괄적인 이야기라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식으로 보고 신의 섭리와 비슷한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학이라는 것을 보시면 압니다. 성찰은 잘 안 보이지만 과학이랑 마찬가지입니다. 부부싸움에 대한 이야기 했나요? 부부싸움은 부부관계를 발전시킬 수도 있고 악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언제 부부관계를 발전시키느냐 하면 상대방이 하려고 하는 얘기보다 내가 더 잘 이해하고 그러고도 내가 할 말이 더 있으면 내가 이기는 거예요. 포함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모든 성찰적인 주장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 사람이 정말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다 긍정적으로 검토해주어야 합니다. 그러고도 내가 할 이야기가 더 있으면 내 얘기가 더 맞는 거예요. 이런 방식으로 사회과학은, 성찰은 발전해 나가는 겁니다. 자연의 섭리를 향해서.

 

3. 그러면 자연적 속성을 찾아내고 깨닫기 위해서 깨어있어야 하고, 끊임없이 실천해야 하는 건가요?

 

더 많이 알게 된다는 것은 거기에 따라 행동하고 싶어지는 거잖아요. 안다는 것의 최종적인 형태는 믿음이거든요. 내가 확실하게 알면 행동합니다. 예를 들면, 이건 실화인데, 어느 전기공학부 선생이 야 여기하고 여기에 2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고 있다. 그런데 전기는 가장 가까운 곳으로 흐르기 때문에 내가 손가락을 이렇게 갖다 되면 손가락으로 이렇게 지나간다.(엄지와 검지) 감전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기 손가락 한 번 대어봐라. 와서 대봐안 와요. 선생은 해요. 확실하게 알기 때문에 합니다. 안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이고, 행동한다는 겁니다. 확실하게 모르면 애들은 못합니다. 분명하다니까 하며 확 대고 안 죽었어요. 아는 건 행동하는 거예요. 만약에 행동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거예요.

4. 공교육에서 학생들에게 질 높은 배움을 아이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했을 때, 진정한 배움이라는 것이 그 학생이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실천하고 올바른 삶을 위해서 무언가 도모하고 함께할 수 있다는 것까지 전제하는 건가요?

 

아이들이나 학생들의 경우는 아직 세계관을 갖고 있지 못해요. 부모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많이 있지만 자기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저는 일단 성찰하는 방법, 과학하는 방법을 가르쳐요. 어떤 얘기도 꼭 올바른 거 아니다. 다른 사람 얘기 다 들어봐라. 네 부모나 선생 얘기가 다 맞는 것 아니다. 더 들어봐라 더 들어봐라. 이런 방식으로 가요. 최종적으로 그게 익숙해진 친구들은 과학할 줄 알게 되고, 성찰할 줄 알게 되거든요. 나중에 결론은 본인이 알아서 하겠지요. 그런 방식으로 가르치는 게 어떨까 싶어요.

5. 당무유용(當無有用)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이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을 더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사실 선생님의 글씨가 없었는데, 신영복 선생님 돌아가시기 한두 달 전에 선생님이 느닷없이 다른 내용의 글씨를 세 개를 쓰셔서 나누어 주신 것 중에 저한테 주신 게 이 말이었어요. 그래서 맨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나는 더숲트리오의 그림자라서 유용한 거다. 이렇게 선생님이 나를 위로해주는 줄 알았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선생님께서 나를 위로해 주실 필요가 있었나? 진짜 그러셨나? 하며 <강의>를 다시 읽었어요. 그러다가 내가 무릎을 탁 쳤어요. 내가 참 선생님의 생각을 이렇게 바보같이 해석하다니 하며, 무위자연이랑 당무유용, (), ()가 다 같은 말인데, 이게 무슨 뜻인가를 다시 생각했었어요. 과학이라고 하는 건 무언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 인간이 주체가 되는 거라고 자꾸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현대과학 패러다임은 인간이 주체가 아니라 자연 스스로 가르쳐주는 답만 알 수밖에 없는 거예요. 자연이 없으면 인간이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자꾸 빼먹어요. 인간은 주체가 아니에요.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자연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내가 자연 속에서 주체가 될 수 있다. 이런 의미로 해석하는 게 옳겠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이 해석이 훨씬 옳고 선생님이 왜 나한테 이 글씨를 주셨는지도 그때서야 확실하게 이해가 됐었어요. 한 마디만 더 덧붙이면, 여러분 생산한다는 말 아시죠? 생산한다는 말을 사람들은 없던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들어낸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 의미로는 인간이 한 번도 생산한 적이 없어요. 있는 자연을 다른 자연으로 바꿔놓은 것에 불과해요. 인간이 만든다는 건 언제나 변형한다는 뜻이지, 없는 걸 만들어 낸다는 건 아니에요. 아무것도 만들어 낼 수 없어요. 변형시킬 수 있을 뿐이지, 이런 말 당무유용을 제대로 이해하면 될 겁니다.

6. 인권, 인격에서 이제는 물권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시점이 아닐까에 대한 다른 의견이 있으신지요?

 

당연한 것이죠. 제가 아까 더 큰 양심 얘기하면서 생태주의 얘기했었죠. 개한테도 삶의 권리를 인정해야 하는 것처럼 심지어는 돌멩이한테도 인정해 줘야 한다고 했었지요. 현재는 아니지만 방향은 그리로 가야합니다. 사실 지금 우리 인간은 생태계뿐만 아니라 자연계 전체에 폭군들 아닙니까. 하는 일도 없이 엄청나게 많은 걸 씁니다. 자동화된다는 말은 에너지를 많이 쓴다는 말이고요, 에너지를 많이 쓴다는 말은 과거 생명체들이 했던 노동들을 빼앗아 간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에너지가 과거 생명체들이 했던 노동들의 결과물이거든요. 순 도둑놈들이에요. 땀도 안 흘리면서 자기들은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이에요. 사실 그건 얘기하자면 끝이 없는, 인간 나쁜 놈들이에요.

7. ‘더 나은 것이라는 목표에 대한 말씀이 매우 인상 깊었는데요, 더 나은 것을 향해 갈 때 같이 동의해 가면서 가는 과정이 중요할 텐데, 어떻게 하면 더 나은 것에 대한 동의를 우리가 잘할 수 있을까요?

어렵습니다. 더 나은 것에 대한 동의가 더불어숲이거든요, 잘난 놈이 나를 따르라는 레닌주의 혁명이고 엘리트주의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그거 아니잖아요. 같이 가자, 동의를 반드시 구해야 되는 거죠. 아까 부부싸움 하듯이 그런 관계를 거쳐서만 갈 수 있다는 거죠. 그게 다른 점입니다. 언뜻 보면 우리 동의가 굉장히 어려울 것 같죠. 그래서 여러분이 공부를 해야 하는데요, 우리 현실에서 희망을 찾긴 대단히 어려워 보여요. 그런데 우리가 1000년의 역사를 보면 아 인간은 이런 방향으로 왔었구나 하는 희망을 누구나 알 수 있게 되어요. 우리 현실만 보면 희망이 안 보이죠. 그런데 다른 사회 멕시코, 브라질, 중국 이런 사회의 여러 사람들을 보다 보면 아 최선을 다해서 더 나은 것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를 알게 돼요. 그런데 우리만 보면 깜깜해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넓혀서 보면 보입니다. 뭐가요? 희망이.

8. 그래서 성찰이라는 것이 전체적인 눈을 가져야 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데, 그렇게 넓은 시야로 전체를 보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뭘까요?

 

전체를 다 안다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거잖아요. 전체적인 걸 안다는 말은 지금 여기가 전부가 아니다라는 것을 알면 되는 겁니다. 남의 얘기 잘 들으면 돼요, 책 한 권 더 읽고. 그게 바로 전체를 알아가는 방법이거든요. 뒤집어서 말하면 지금 나를 깨뜨리면 돼요. 지금 나를 깨뜨리는 거예요. 그게 전체를 향해서 가는 길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겸손, 주변이라는 말도 같은 말입니다. 중심은 항상 자기를 재생산하거든요, 똑 같은 걸로. 거기에 포섭이 안 되기 때문에 깨뜨리잖아요.

9. 이런 형식의 두목 특강 공부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면 좋을지 조언해 주세요.

 

이렇게 강의식의 방법도 필요할 것 같고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언어로 그 내용을 표현해 낼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있어요. 여러분이 토론회를 만들든지, 아니면 각자 자신이 느낀 것을 여러분들한테 돌아가면서 강의하는 방식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처음에 화두를 열어주는 강의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내용

두목특강 제 3회 강의 기록및 정리

시간장소

201698일 목요일 19:30, 사단법인 더불어숲 남산 사무실

주제

신영복의 인간이란 무엇인가’ :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강사

김진업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 NGO 대학원 교수

 

 

#더불어숲#두목특강#김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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