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터찬물 505번째 편지]
자기의 이유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갑니다. 산책로 길섶에 버섯 군락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버섯 중의 하나를 지팡이로 가리키면서‘얘야, 이건 독버섯이야!’하고 가르쳐 줍니다.
독버섯이라고 지목된 버섯이 충격을 받고 쓰러집니다... (중략)
‘독버섯’은 사람들의‘식탁의 논리’입니다. 버섯을 식용으로 하는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버섯은 모름지기‘버섯의 이유’로 판단해야 합니다. ‘자기의 이유’, 이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자부심’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멀고 힘든 여정이라 하더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를 줄이면‘자유(自由)’가 되기 때문입니다”
『담론』 <희망의 언어 석과불식> 증에서

교과서적 정의에 의하면 자유란 ‘타인이나 외부로부터의 신체적, 정신적 강박이나 구속으로부터 제한되지 않을
권리’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유란 ‘우리가 지켜야 할 자부심’이며‘
자기의 이유’라 하십니다. 선생님께서는 자유란 존재성의 실체이며, 자기로서의 이유가 있는, 스스로 본래적이며
본질적인 삶의 주체라는 의미를 더 강조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곱씹어 보니 저는‘자유’란 스스로 삶의 주체라는 선언이며 동시에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타인에게
증명하여야 하거나 보여주어야 할 의무나 책임 없이, 그 존재만으로도 존중받아야 할 권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따라서 선생님께서 자유를 ‘자기의 이유’로 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약자의 독법(讀法)이자,
공생의 무기가 아닐까라고 생각해 봅니다.
‘테크놀러지의 자유’를 꿈꾸는 실리콘의 자본 기술자들은 기술이 생존을 해결하는 때가 도래하여 마침내 인간은
더 이상 공부할 필요 없고, 일할 필요도 없는 세상이 될 거라 합니다. 반면 인간이 만든 피조물에 의해 인간이 역으로
지배당하는 세계를 우려하면서, 자본이 제공하는 기술에는 반드시 가격이 책정되고, 사람들은 각기 다른 지불 능력에
종속되므로 사회의 불평등성, 불균형성은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반론도 많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미래 사회는 가진 게 없으면 그에 비례하여 ‘자유’도 제한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존중이 약하고
배려가 줄어드는 사회가 된다면 약자에게는 그마저 얼마 갖지 못한 작은 자유조차 필연적으로 더 줄어들 것이라는
점은 분명할 것입니다.
역사상 ‘자유’의 실현은 국가와 사회의 부당한 질서와 압제에 대항하여 제도적, 사상적 권리를 획득해 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자유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 절대적 가치이자 지켜야 할 권리가 되었습니다만,
요즘은 어찌 된 일인지‘자기의 자유’가 아니라 ‘자신만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들은 타인에 대해 막말을 거리낌없이 하면서도 자유라 하며, 남을 차별하거나 생각을 강요하면서도 권리라
주장합니다. 참 이상한 현상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한 나라의 정치인이라는 사람이 표현의 자유 운운하며
한 영화배우의 얼굴을 북한상이라 비하하고 역사 왜곡자라 낙인찍는 게 가능할까요?
이에 더하여 우리는 기업이나 단체, 학교, 공공기관에서도 강자가 타인을 괴롭히는 자유에는 관대한 반면,
괴롭힘당하는 약자의 자유는 잘 보호하지 못하는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유의 본래적 가치가 비틀리고
훼손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자기의 이유’가 부족한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혹자는 현대 사회를 ‘각자도생의 시대’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드러난 현상의 일부분이지 본질은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 각자도생해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니까요.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사물과 생명과 자연의 법칙들이
수많은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그 속에 공존과 공생이라는 ‘자기의 이유’를 찾고 지켜나갈 때
우리는 좀 더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고, 이 삶을 더욱 잘 꾸려갈 수 있지 않을지 생각해 봅니다.
- 더불어숲 회원 허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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