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 05. 04. 샘터찬물 편지 - 27 |

따순 등불로 켜지는 어머님의 사랑 "불탄일(佛誕日)을 맞아 이곳의 불교신도들이 강당에 달 것이라며 등을 만들어왔습니다. 저는
등에 글씨와 연꽃을 넣으면서 스산한 강당에 이곳의 수인들이 이 등과 함께 어떠한 축원을 매달 것인가를 상상하다가,
문득 올해도 절을 찾아 등을 다실 어머님을 생각합니다. --중략-- 작은 고통들에 고달파하던 저와 마찬가지로, 아들을 옥 속에 넣고 가슴저며
하시던 어머님이 어느덧 아들과 함께 옥살이하는 아들의 친구들을 마음 아파하시고 이제는 우리 시대의 모든 불행한 사람들을 똑같이 마음 아파하시는
더 큰 사랑을 가지신 더 큰 어머님으로 성장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어머님의 마음이 바로, 이승에 살기에는 너무나 자비로웠던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믿습니다. 올 초파일 힘드신 산길을 오르시어 손수 다시는 등에는 부디 숱한 아들들의 이름이 함께 담겨지길 바랍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82년도에 쓰신 글입니다. 14년여를 무기수로 살아가고 있고 바깥은 더 엄혹했던 군사독재 시절이었습니다. 그 '처지'에 타인에 대한
큰 사랑을 얘기하셨던 선생님을 생각합니다. 치열한 대선의 막바지입니다. 누구에게 투표를 할 것인가? 고민이 깊어지는 시기입니다. 이 절박한 선택의 시간에 떠오른 것은
늙으신 어머님께 무수히 많은 아들들에 대한 사랑을 청하는 무기수 아들의 마음입니다. 투표하는 손길마다 따뜻한 마음이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
| 2017. 04. 27. 샘터찬물 편지 - 26 |
2017. 04. 27. 샘터찬물 편지 - 26 꽃잎 흩날리며 돌아올 날 기다립니다. '사나이 가는 길 앞에 웃음만이 있을쏘냐 결심하고 가는 길 가로막는 폭풍이 그 어이 없으랴. 푸른 희망을 가슴에 움켜 안고 떠나온 정든 고향아 내 다시 돌아갈 때 열 굽이 도는 길마다 꽃잎을 날려보리라' 비오는 날이나 명절이 가까워 오면 철창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자주 이 노래를 부르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떠나온 고향을 생각하는 노래였습니다. 나는 오늘 그가 다녔던 전남 화순에 있는 작은 초등학교를 찾아왔습니다.
" _신영복《나무야나무야》 72쪽 낯설고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가고 새봄이 오는가 하더니 그만 꽃이 지고 있습니다.
하늘하늘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다 문득 이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가끔 술자리에서 부르고
듣던 '사나이 결심' 입니다. 요즈음 대선후보 검증을 위한 토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실에서 정치가를 직접 만날 일이 거의 없기에 언론매체와 인터넷을 통해 후보를 선택할 안목을 키우려고 노력합니다. 평전과 전기, 자서전과 소설을 읽으며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선택과
그 결말을 생각해봅니다.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 이름은 남겼을지라도 그들의 삶은 비바람과 폭풍 휘몰아치는
고난의 현장이었습니다. 세찬 겨울바다를
푸른 희망 하나 등대 삼아 헤쳐간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이 절절합니다. '부디 오래 사셔서 여러가지 일들의 끝을 보실 수 있길 바랄 따름입니다.' 1980년 10월에 우이선생님께서 어머님께 보낸 편지입니다. 징역 속에서 어머님을 뵙고 미안해 하다가도 이렇게 살아서 만날 수 있음을 다행이라 여기며 어머니를 마음속으로
위로합니다. 이제는 어렵게 찾아온 이 찬란한 봄에 부디 오래 살아 꽃잎 휘날려 주고 싶을 아름다운 사람을 찾아내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눈앞에 다가온 한 시절의 끝과 또 다른 한 시절의 아름다운 시작을 위하여 지혜롭게 마음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
| 2017. 04. 21. 샘터찬물 편지 - 25 |

2017. 04. 21. 샘터찬물 편지 - 25 아름다운 패배 “싸움이란 모두가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싸움의 비극 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차라리 오늘은 비록 패배이지만 내일은 승리로 나타나는 아름다운 패배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패배는 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승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패배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누구’와 싸울 것인가 보다는 ‘무엇’을
상대로 싸울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당신은 싸움의 이유를 널리 천명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까맣게 잊고 있는 것들을 당신의 싸움은 드러내야 합니다. 당신의 싸움은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내는 외롭지 않은 패배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기어코 승리하는 아름다운 패배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당신이 패배의 이야기가 아닌 승리의 이야기로 읽어 주리라 믿습니다.“ _신영복,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중에서 북핵문제 해법과 5월 대선전으로 화창한 봄날에도 우울해집니다. 상대방의 폭력에 대해, 더 큰 폭력으로 응징함으로써 패권을 잡는 것만이
최선책인지 혼란스럽습니다. 상대방의 폭력에 보복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전쟁이란 있을 수 없기에 보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일의 승리로 나타나는 아름다운 패배가 아닐런지요. 후보검증이라는 미명하에, 온갖 인신공격성 비방을 함으로써 진흙탕 싸움판을
벌릴 수밖에 없는지 답답합니다. 상대방에게 비방할 것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저급하고 불순한 의도에
물들지 않아 비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 내는 외롭지 않은 패배가 아닐런지요. 국가나 개인을 막론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부끄러워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면 진선진미(盡善盡美)의 참된 세상을
열어 보인 그의 아름답고 너른 나무 그늘아래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겠지요. 그리하여 마침내 모든 사람들의
진정한 승리가 되는 인간적 세상을 꿈꾸어 봅니다. |
| 2017. 04. 13. 샘터찬물 편지 - 24 |

2017.04.13 샘터찬물편지-24 카르마(Karma)의 청산 "인간의 자유는 카르마(Karma)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부정적 집합표상을 카르마라고 합니다. 표상은 인간의 인식활동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고유의 집합표상이 있습니다. 중세에는 마녀라는 집합표상이 있었습니다. 마녀라는 집합표상은 부정적이란 점에서 카르마입니다. 이 카르마를 깨뜨리는 것이 달관입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선언이 바로 '카르마의 손(損)'입니다. 카르마를 깨뜨리지 않고는 그 시대가 청산되지 못합니다. 한 사람의 개인은 물론이고 한 시대가 다음 시대로 나아가려면 부정적 집합표상인 카르마를 청산해야 합니다." - 신영복, <담론 343>, 돌베개, 2015. 불교에서는 카르마를 업식(業識)이라고 합니다. 이 업식은 보통사람들(중생)이 살아 가면서 순간 순간에 오감이 먼저 반응하여 마음속에 생기는 욕심이나 분노 등으로 자기 스스로를 얽어 매어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대통령선거를 한 달 남짓 앞둔 이 시점에서 한 개인이, 또 우리 시대가 청산해야 할 수 많은 카르마를 묵도하고 있습니다. 이 카르마를 청산하고 다음 시대로 한 걸음 나아가는 오월을 맞이 하기를 바래봅니다. |
| 2017. 04. 06. 샘터찬물 편지 - 23 |

2017. 04. 06. 샘터찬물 편지 - 23 봄볕 한 장 등에 지고 "창살 무늬진, 신문지 크기의 각진 봄볕 한 장 등에 지고 이윽고 앉아 있으면 봄은 흡사 정다운 어깨동무처럼 포근히 목을 두릅니다. 문득, 난장촌초심 보득삼춘휘(難將寸草心 報得三春輝), '지극히 작은 자식의 마음으로 봄볕 같은 부모의 은혜를 갚기 어렵다'는 불우했던 맹교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봄볕뉘는 아무래도 어머님의 자애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99쪽. 미세먼지가 서울의 봄하늘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들로 산으로 손에 손잡고 많은 사람들이 봄나들이 갑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텔레비젼 뉴스에 집중하며 마음을 졸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세월호가 목포신항까지 옮겨져서 뭍으로 들어올려지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아이를 찾지못한 어머니는 날마다 바다로 나가서 아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가야 우리 아가야..어서 엄마 품으로 돌아와라. 엄마 등에 업혀 집으로가자." 점점 각박해가는 세상 인심이지만 어머니 마음은 언제나 우리를 눈물짓게 합니다. 세월호 어머니의 마음에 우리의 봄볕 한 장 나누고 싶습니다. |
| 2017. 03. 30. 샘터찬물 편지 - 22 |

2017. 03. 30. 샘터찬물 편지 - 22 한 송이 팬지꽃 "물컵보다 조금 작은 비닐화분에 떠온 팬지꽃 한 포기를 얻어 작업장 창턱에 올려놓았습니다. 행복동의 영희가 최후의 시장에서 사온 줄 끊어진 기타를 치면서 머리에 꽂았던 팬지꽃. 화단의 맨 앞줄에나 앉는 키 작고 별로 화려하지도 않은 꽃이지만, 열두 시의 나비 날개가 조용히 열려 수평이 되듯이, 팬지꽃이 그 작은 꽃봉지를 열어 벌써 여남은 개째의 꽃을 피워내고 있습니다. 한 줌도 채 못되는 흙 속의 어디에 그처럼 빛나는 꽃의 양식이 들어 있는지……. 흙 한 줌보다 훨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내가 과연 꽃 한 송이라도 피울 수 있는지, 5월의 창가에서 나는 팬지꽃이 부끄럽습니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꽃피는 봄 입니다. 홀로 피고지며 산야를 아름답게 하는 이름모를 들꽃들이 부럽고, 이들을 겨우내 품어 세상에 희망으로 내어주는 묵묵한 대지에는 경의를 느낍니다. 우리도 가슴에 키워오던 사랑 하나 촛불로 세상에 내어놓을 수 있었다는 위안은 가져도 되는 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생기 가득한 봄날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
| 2017. 03. 23. 샘터찬물 편지 - 21 |

2017. 03. 23. 샘터찬물 편지 - 21 봄꽃 "언덕에 봄꽃을 피우고 있는 섬진강도 강물은 아직 차디찹니다. 강물에 조용히 손 담그면 팔뚝을 타고 오르는 한기가 아픈 추억과 함께 전율처럼 가슴을 엡니다. 대상을 바라보는 행위는 동시에 자신의 추억을 돌이켜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작은 봄꽃 한 송이를 기뻐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아름다운 추억을 가져야 합니다. 하물며 비뚤어진 우리들의 삶을 바로잡는 일 없이 세상의 진정한 봄을 맞이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재에 대한 과거의 위력은 미래에 대한 현재의 의미를 증폭시킴으로써 완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처음처럼』, 65면. 산에 언덕에 봄꽃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1969년 1월 청년 신영복은 사형선고를 받고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그의 짧은 인생을 정리합니다.독재에 항거하다 잡혀와 찬란한 햇살 아래 총살형으로 장렬하게 스러져갈지도 모르는 자신의 운명을 앞두고 지나온 날들을 회상합니다. 66년 봄 서오릉 소풍길에서 만난 청구회 어린이들, 어쩌면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장충체육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꼬마 친구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교도소의 마룻바닥에 엎드려 하루 두 장씩 지급되는 재생종이로 된 휴지에 이 아이들과의 만남을 기록합니다. 글을 쓰고 있는 동안은 옥방의 침통한 어둠으로부터 진달래꽃처럼 화사한 서오릉으로 걸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먼 훗날 나는 서오릉으로 봄철의 외로운 산책을 하고 싶다. 맑은 진달래 한 송이 가슴에 붙이고 천천히 걸어갔다가 천천히 걸어오고 싶다." 엔딩 크레딧입니다. 청년 사형수의 작은 희망이었습니다. 올해도 진달래 꽃길에서 선생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
| 2017. 03. 16. 샘터찬물 편지 - 20 |

2017. 03. 16. 샘터찬물 편지- 20 곤이부지자(困而不知者) "우리를 절망케 하는 것은 거듭되는 곤경이 아니라 거듭거듭 곤경을 당하면서도 끝내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음은 반복입니다. 그러나 거듭되는 곤경이 비록 우리들이 이룩해 놓은 달성(達成)을 무너뜨린다 하더라도 다만 통절한 깨달음 하나 일으켜 세울 수 있다면 곤경은 결코 절망일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그것은 새출발의 디딤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 신영복,《더불어숲》, 돌베개, 2015.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을 인용하여 '파면'을 선언하였습니다. 정치란 평화와 소통과 변화의 사회적 역량을 키우는 것이 본령일진데, 오로지 통치권력의 장악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때에는 '불의의 구조화'와 '폭력의 제도화'로 그 본령이 거세당하기 마련이지요.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와 같은 정치현실을 숱하게 겪어 왔지만 그로 부터 귀중한 교훈을 읽어 내지 못한 채 다시금 곤경에 처하곤 하였지요. 탄핵심판이 진행되는 동안, 정치의 본령이 거세된 부정부패 정권의 민낯이 세세히 드러났지요. 나아가 곤경을 겪고도 깨닫지 못하는 곤이부지(困而不知)의 사회가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통절하게 깨달았습니다. 불의한 정치로 곳곳에서 힘겨웠지만, 여럿이 함께 가면 길은 뒤에 생겨난다는 선생님 말씀대로 1000만 촛불 시민이 민주혁명의 대장정을 힘차게 이어 나갔고 민주주의 회복의 새로운 길이 생겨났습니다. 역사의 변곡점이 될 이 길에서 곤이지지(困而知之)의 교훈을 되새겨 봅니다. 잘못된 선거가 낳은 곤경을 디딤돌 삼아, 다가오는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사회변혁의 새 출발점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 2017. 03. 09. 샘터찬물 편지 - 19 |

2017. 03. 09. 샘터찬물 편지- 19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자기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나아가 우리 사회와 민족의 운명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읽어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을 소중하게 여기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의 현재를 정직하게 바라보게 할 뿐 아니라 진실은 과거를 청산하고 동시에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일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의 발견이 미래의 참된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 신영복,『냇물아흘러흘러어디로가니』, 193면. 역사적인 판결을 앞둔 밤입니다. 어두울수록 깨어있던 촛불의 마음으로 과거의 적폐를 청산하고 참된 진실을 밝혀서 새로운 변화를 열어내리라 믿습니다. "민주주의를 긍정하는가. 더구나 그것의 자본주의와의 결합을 긍정하겠는가? 이 양자의 결합을 승인하는 것은 자본의 무제한한 횡포를 승인하는 게다. 자본측근자(資本側近者)를 제왕(帝王)으로 모시는 것이다. 적어도 한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우월할 수 있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사랑이다. 헌신(獻身)이다. 하나의 생명이 두 개의 생명을 위하여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사랑이다. 둘 또는 그 이상의 생명을 위하여 헌신하는 생명은 두 배 또 두 배 이상으로 우월하다." -신영복,『냇물아흘러흘러어디로가니』, 141면. |
| 2017. 03. 02. 샘터찬물 편지 - 18 |
2017. 03. 02. 샘터찬물 편지- 18 양심 "물 탄 피(和水血)의 이야기입니다. 대학병원에서 피를 팔기 전에 매번 찬물을 잔뜩 들이키고 나서 채혈실로 들어갔다는 어느 친구의 기억이 강물처럼 가슴에 흘러듭니다. 하루의 일당을 받지 못하는 날이면 집에 들어갈 얼굴이 없어서 합숙소에 들어 밤잠을 자고 새벽 일찍 대학병원으로 달려가 피를 팔고 그 돈으로 동생들의 끼니를 사서 집으로 들어가는 그런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나의 뇌리에서 지울 수 없는 것은 어둑새벽 대학병원의 수도꼭지에서 양껏 찬물을 들이키는 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지울 수 없는 기억은 자기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고 하는 그의 단호하고도 위악적(僞惡的)인 표정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단호한 어조와 그 침통한 표정에서 그것은 그가 상당한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었다는 반어(反語)임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들이킨 물이 곧장 혈관으로 들어가 피를 묽게 해준다고 생각하는 그의 가난한 지식이 마음 아픕니다. 그는 동생들의 끼니를 위하여 좀 더 많은 피를 만들려고 했던 형이었고, 그리고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좀 더 많은 피를 남기려 했던 노동자였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설령 그가 들이킨 새벽 찬물이 곧바로 혈관으로 들어가 그의 피를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얻는 부당이득의 용도를 알기 때문입니다." 《나무야 나무야》중에서. '도의적 책임'이란 말이 '양심'과 같거나 비슷한 말인 줄 알았는데, 최근 전혀 다르게 사용되는 것을 봅니다. 국정 농단의 피의자들은 기소된 혐의의 물증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무죄를 주장하며, '도의적 책임'은 지겠다고 합니다. 법적 형벌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반성하고 있다는 그럴싸한 위선의 증표로 쓰이고 있습니다. 뻔뻔함의 극치이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기방어의 최대치입니다. 민중의 역량으로 수많은 합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오늘과 내일의 사회에서는 '양심' 또는 '도의적 책임'이라는 말이 법보다 더 엄정(嚴正)한 무게로 양심을 따르는 지식인과 굳은 심지(心地) 하나 의지하고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의 '등불'이 되어주길 소망합니다. |
| 2017. 02. 23. 샘터찬물 편지 - 17 |

2017. 02. 23. 샘터찬물 편지- 17 신뢰 "모든 정치적 목표는 백성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그러한 지혜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지요. 백성들의 생각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집단적인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 도달한 결론입니다. 충분한 임상학적 과정을 거친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결론인 셈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백성들에게 과연 독자적인 판단 능력이 있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고 있는 지식인의 경우가 더 회의적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가 가동시키고 있는 막강한 우민화愚民化 메커니즘은 더욱 회의적이게 합니다. CF 광고는 물론이며 문화와 예술, 교육에 이르기까지 압도적으로 군림하고 있는 막강한 권력을 생각한다면 절망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강의》중에서 다가오는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자꾸 불안해집니다. 한두 고비가 아닌 험난한 여정이 펼쳐질 봄일 수밖에 없고, 수구집단의 준동이, 그리고 지난 시절의 경험이 다가올 봄에 대해 마냥 낙관적일 수만은 없게 합니다. 이 불안한 마음을 다스릴 길은 결국 우리 자신을 믿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 관계론의 실천적 버전이 연대입니다." 광장에 함께 서는 일이 그 신뢰를 키우는 일이라 믿습니다. |
| 2017. 02. 16. 샘터찬물 편지 - 16 |

2017. 02. 16. 샘터찬물 편지- 16 가위 바위 보 "어느 사회에나 대립과 갈등은 존재합니다만, 표출되는 방식이 감정적이고 극단적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이 낮은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도 있지만, 저는 이 모든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신뢰하는 신뢰집단이 없다는 데서 비롯됐다고 봅니다. 전 학교에 있지만 대학, 제도 정치권, 언론, 사법, 자본 등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 대한 일반인들의 신뢰가 낮습니다. 신뢰 집단이 없는 상태에서는 자기와 대립한 사람들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야 자기의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가위, 바위, 보에서 가위와 바위밖에 없으면 바위를 차지하려고 극단적인 대결을 벌입니다. 보가 중간에 있어야죠. 신뢰 집단을 구성하려는 노력을 해야합니다." 《손잡고 더불어》 228-229면. 오래 집을 비웠다 돌아오니 세상은 더 어지럽고 복잡하게 얽혀가고 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조용히 선생님께 여쭈어보았지요. 십여 년 전에 하신 말씀이 지금 이 상황에도 유효합니다. 파도치는 정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기 보다는 자기가 지금 빠져있는 우물 자체를 조감하는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수평적 사유를 확장하기 보다는 그걸 수직화해서 깊이있게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는 일이 선생님의 책을 읽는 독자의 몫이라고 하십니다. " 그 시대를 정직하게 호흡하고,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 항상 하시던 말씀이 오늘은 더욱 깊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가슴에 두손을 얹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주먹을 쥐었다 펴보고 다시 주먹을 쥐었다 펴며 가위, 바위, 보를 차례로 만들어 봅니다. |
| 2017. 02. 09. 샘터찬물 편지 - 15 |

2017. 02. 09 샘터찬물 편지 - 15 지혜, 시대와의 불화 "불가에서는 애초부터 세계를 분석하지 않는다.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깨달음이 지혜의 본질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정보사회에서는 정보의 양이 지식의 높이가 된다. 많이 쌓을수록 지혜가 커진다. 근대의 시작은 남의 지(知)를 내게 쌓을 수 있다는 신념의 출현과 함께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의 누적이 결국 혼란이 되고 홍수가 된다면, 그것을 지혜의 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것이 타자화하고 대상화하고 분석하는 일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럴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쌓고 소유하는 것으로 공부를 끝낸다. 공부란 깨달음이며 자기 변화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변방을 찾아서》 중에서 제 주변에는 '밥을 먹기 위하여 일을 하는 사람'과 '일을 하기 위하여 밥을 먹는 사람' 그리고 '일터나 일을 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일에 대한 동기는 다르지만 모두들 무언가를 공부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인성의 고양을 화두로 삼고 공부하는 사람도 있지만 성과만능주의 사회에서 요구되는, 경쟁을 위한 공부가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공부는 학사습행(學思習行)의 과정 없이 남의 지(知)를 자신에게 주입(input)하고, 암기하며(memory), 필요한 시점에 쏟아내는(output) 것을 목적으로 하지요. 따라서, 지(知)를 많이 쌓을수록 사람이 불완전한 컴퓨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섬찟해집니다. 공부가 깨달음과 자기변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박제된 지식과 숫자로 저장되어 삶과 유리되는 것은 물질의 낭비보다 심각한 사람의 낭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가능성은 과거를 뛰어넘고 사회의 벽을 뛰어넘어 드디어 자기를 뛰어넘는 비약에 있습니다."《나무야 나무야》중에서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시대, 비인간적인 사회와 불화하며 깨달음과 자기변화로 이어지는 진실한 공부가 우리의 삶 속에서 피어나길 바랍니다. |
| 2017. 02. 02. 샘터찬물 편지 - 14 |
2017. 02. 02. 샘터찬물 편지 - 14 청년시절 "한 사람의 일생에서 청년시절이 없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아무리 성공한 인생이라고 하더라도 꿈과 이상을 불태웠던 청년시절이 없다면 그 삶은 실패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의 청년들에게는 청년시절이 없습니다. 가슴에 담을 푸른 하늘이 없습니다. 부모님들은 IMF와 금융위기 때 실직하였고, 수험 준비와 스펙 쌓기 알바와 비정규직이라는 혹독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진리와 희망을 이야기하기보다는 부정한 정치권력과 천박한 상업문화를 배워야 하고, 우정과 사랑을 키우기보다는 친구를 괴롭히거나 친구로부터 괴로움을 당하며 좌절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뿌리가 사람이고, 사람의 뿌리가 청년시절에 자라는 것이라면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직면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한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사회의 비극입니다. 그 사회가 아무리 높은 빌딩을 세우더라도 꿈과 이상이 좌절되고 청년들이 아픈 사회는 실패입니다." - 《처음처럼》278면. 엊그제 설날 아침에는 처갓집에 오랜만에 자식 6남매와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였습니다. 그러나 처형네 대학 3학년인 큰딸 혜원이는 지난 추석때와 마찬가지로 올 설에도 외갓집에 오지 못했습니다. 국립대 세무학과에 다니는 혜원이는 오는 4월에 있는 세무사 자격시험에 기필코 합격하기 위해 설 연휴도 도서관에서 보내고 있다는 처형의 설명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여행도, 연애도, 그 뜨거웠던 촛불집회도 모른 채 책상에서 공부만 하고 있는 조카인데 명절에도 얼굴 한 번 보지 못한다는 아내의 볼멘소리가 들려옵니다. 혜원이는 세무사시험을 끝내더라도 다시 취직을 위해 얼마나 많은 청년시절을 더 바쳐야 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청년시절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묻게 되는 조금 씁씁한 설날 아침입니다. |
| 2017. 01. 26. 샘터찬물 편지 - 13 |

2017. 1. 26. 샘터찬물 편지 - 13 세상의 봄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새봄의 가장 확실한 증거를 잡초에서 확인합니다. 잡초는 물론 이름 없는 풀입니다. 이름은 사람들이 붙이는 것이고, 이름이 붙었다는 것은 사람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눈에 뜨이지 않는 곳의 이름 없는 풀은 자신의 논리, 자신의 존재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쟁취한 승리 그 자체입니다. 정치란 사람을 자라게 하고 사람을 만나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만들어 내는 일의 기쁨을 서로 신뢰하게 하는 일입니다. 사람을 그 가슴으로 만나게 하고 사회를 그 뼈대에서 지탱하고 있는 이러한 역량들을 일으켜 세우고 사회화 하는 일이 정치의 본연입니다. 그러한 판을 열고 그러한 틀을 짜는 일입니다. 잘못된 판, 잘못된 틀을 새롭게 바꾸는 일입니다. 세상의 봄도 산천의 봄과 다를 리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박힌 경멸과 불신이 사라질 때 옵니다. 집단과 집단, 지역과 지역 사이에 갇혀 있는 역량들의 해방과 함께 세상의 봄은 옵니다. 산천의 봄과 마찬가지로 무성한 들풀의 아우성 속에서 옵니다. 모든 것을 넉넉히 포용하면서 기어코 옵니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중에서 새봄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아직 한파 속 거리에서 밤을 지키고 있습니다. 광화문 광장의 충무공 이순신은 그 무거운 구리 갑옷을 입고 큰 칼 짚고 서서 경복궁과 청와대를 지키는 일을 이제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집에 돌아가지 못한 들꽃들과 함께 하며, 먼 들녘의 풀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선 “법이 도덕성을 신뢰받지 못할 때 그것은 다만 억압의 도구로 간주될 뿐이다. 이른바 ‘불법적’인 저항을 받게 마련이다. 합법적인 절차를 아무리 호소하더라도 합법적인 절차 그 자체마저 억압의 한 방법이라고 여길 뿐이다.” 하셨습니다.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사법정의가 바로 세워질 영장 청구가 기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판을 짜는 시작에 불과하며, 이 일은 새 판에 좋은 질료로 보태어질 것입니다. 고향은 점점 소멸되어가는데 명절은 어김없이 다가옵니다. 언땅이 녹아 출수할 때 씨앗을 품은 땅을 꼭꼭 다져주듯 곳곳에서 작은 만남으로 도심 속, 고향 같은 숲을 일궈가야겠습니다. 봄은 기어코 온다는 말씀을 되새기는 벗들이 추운 들길도 의연히 걸어갑니다. |
| 2017. 01. 19. 샘터찬물 편지 - 12 |

2017. 01. 19. 샘터찬물 편지 - 12 열두 번째 편지 - 큰 슬픔 작은 기쁨 "큰 슬픔을 견디기 위해서 반드시 그만한 크기의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작은 기쁨 하나가 큰 슬픔을 견디게 합니다. 우리는 작은 기쁨에 대하여 인색해서는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큰 슬픔에 절망해서도 안됩니다. 우리의 일상은 작은 기쁨과 우연한 만남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처럼》중에서 선생님의 1주기 추도식이 있었습니다. 다녀온 뒤로 또 다시 먹먹해지기만 하는 가슴 며칠을 더 시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대적 과제와, 고통받는 수많은 이웃들의 모습을 모르진 않지만 스승의 부재를 새삼 확인하며 느끼는 이 슬픔에 침잠하고 싶습니다. 서화 전시회, 여러 모임들 그리고 촛불 광장에서 낯익은 얼굴들과 만나는 것이 작은 기쁨이었습니다. 서로 손잡고 주고 받았던 따뜻한 마음에서 선생님이 남겨주신 모습을 보는 것이 작은 기쁨이었습니다. 이 기쁨들이 모여 우리를 다시 깨우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작은 만남이 모든 변화의 시작입니다.' 서로 가슴으로 만나 선생님 말씀을 새기며 함께 걸어가는 '아름다운 동행'- '더불어 숲'을 이루어 서로 기대고, 그 숲 언저리 넓히도록 그렇게 살아가겠습니다.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
| 2017. 01. 12. 샘터찬물 편지 - 11 |

2017. 01. 12. 샘터찬물 편지 - 11 예술과 소통
“저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려 하기에 앞서, 붓을 잡는 자세를 성실히 함으로써 먼저 뜻과 품성을 닦는, 오히려 ‘먼 길’을 걸으려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뜻과 품성이 비로소 훌륭한 글씨와 그림을 가능하게 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인도(人道)는 예도(藝道)의 장엽(長葉)을 뻗는 심근(深根)인 것을, 예도는 인도의 대하로 향하는 시내인 것을, 그리하여 최고의 예술작품은 결국 ‘훌륭한 인간’, ‘훌륭한 역사’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오늘은 신영복 선생님의 1주기 추모전에 다녀왔습니다. 어느덧 1년 선생님 떠나시던 날 하늘 가득한 눈송이도 날개를 접어 길을 내어드렸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선 그 눈꽃 그 바람 어느 곳에서 고요히 고요히 다시 길을 내어 우리들에게 만남을 선물해주고 계십니다.
“진정한 예술은 인간과 세계 사이의 깊이 있는 관련을 추구하는 것이며, 어떠한 미래와도 연결될 수 있는 ‘소통 방향’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 《더불어숲》 중에서
바람결을 따라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실 선생님 남겨주신 예술 작품도 함께 간직하며 미래를 향해 계승하겠습니다. |
| 2017. 01. 05. 샘터찬물 편지 - 10 |

2017. 01. 05. 샘터찬물 편지 - 10 지혜와 용기 "새해가 겨울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까닭은 낡은 것들이 겨울을 건너지 못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낡은 것으로부터의 결별이 새로움의 한 조건이고 보면 칼날 같은 추위가 낡은 것들을 가차 없이 잘라버리는 겨울의 한 복판에 정월 초하루가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을 알겠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중에서 해가 바뀌어 달력을 바꾸었습니다. 섣달 그믐날 덮고 잔 이불 속에서 다음날 새로운 심기로 일어서지 않으면 달력을 새것으로 바꾼다고 시간이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새로움이란 낡은 것에 대한 냉철한 각성과 그것으로부터의 과감한 결별에서 비롯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새로울 ‘新’은 서있는(立) 나무(木) 옆에 도끼(斤)가 놓여있는가 봅니다. 무성한 헛가지와 불량지를 솎아내면 밑동은 튼튼해지고 실해져 언제든 새순이 돋기 마련이지요. 찍어내어 결별해야 할 것들을 정리하며 아직도 저는 정유년의 아침해를 새롭게 띄워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좋은 만남을 쌓아가고 성찰의 열매를 삶으로 살아낼 때 그때가 언제이든 바로 새해, 새날임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시작으로 정유년 해오름달을 맞이합니다. 매일매일 띄워 올리는 새로운 아침해가 찬란하게 빛나길 바랍니다. |
| 2016. 12. 29. 샘터찬물 편지 - 9 |

2016. 12. 29. 샘터찬물 편지 - 9 "겨울은 별을 생각하는 계절입니다. 모든 잎사귀를 떨구고 삭풍 속에 서 있는 나목처럼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계절입니다. 한 해를 돌이켜 보는 계절입니다. 겨울밤 나목 밑에 서서 나목의 가지 끝에 잎 대신 별을 달아봅니다." - 《처음처럼》중에서 - 일 주일 만에 텃밭에 나왔습니다. 동지(冬至) 지나 찾은 텃밭에 겨울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지난 봄, 여름 그리고 가을 동안 텃밭 주인의 게으름을 밭가에 쌓여 있는 마른풀더미가 증명해 줍니다. 솥에 물을 가득 채우고 그 잡초를 불쏘시개 삼아 아궁이에 불을 지펴 봅니다. 아궁이가 금새 토해 내는 하얀 연기에 올 한 해의 생각들을 실어 보냅니다. 그리고 다시 새봄을 기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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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12. 22. 샘터찬물 편지 - 8 |

2016. 12. 22. 샘터찬물 편지 – 8 개혁 주체의 물적 토대 "16세기 초에 일어났던 개혁 방식의 전환에서도 가장 역점을 둔 것이 사상의 미성숙을 반성하고 새로운 진지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사상 투쟁은 모든 개혁의 시작이고 끝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을 실천적으로 담보해 낼 수 있는 주체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조선조 건국 때도 그랬고, 개혁 사림이 복귀할 때도 그랬습니다. 개혁 주체의 물적 토대가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에 그나마 선비 정신이라는 지식인의 전통이 견지될 수 있었던 것은 중소 지주이긴 하지만 지주라는 물적 토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다름이 없습니다. 독립된 개혁의 물적 토대를 만들어 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당면 과제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적 공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생각나는 것이 공자입니다. "군자도 궁할 때가 있습니까?"라는 자로의 질문에 "군자는 원래 궁한 법이라네"라는 공자의 답변입니다. 궁하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입니다. 독립된 공간과 집단적 지성 그리고 그러한 소통 구조를 사회화하는 일이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담론》중에서 - 얼마 전 제가 사는 동네 어귀에도 오래된 슈퍼 '빙그레 공판장' 자리에 대기업 편의점 간판이 환하게 조명을 밝혔습니다. '경제민주화'라는 말은 더욱 공고히 된 정경유착의 반어적 광고에 불과함을 목도합니다. 개혁 주체들의 절박한 현실이 찬 겨울바람에도 더욱더 전국 곳곳에서 촛불을 들게 합니다. 가난해도 의로운 자부심의 독립된 개인들이, 건강한 연대로 깨어있는 양심을 모아 집단지성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선생님께선 묵자의 곡돌사신(曲堗徙薪)- 굴뚝을 돌려놓고 장작을 옮겨 놓아 불이 나지 않도록 예비하고 불이 옮겨붙지 않도록 미리 단속하는 사람, 그들을 몰라보는 세태를 아쉬워하셨습니다. 전쟁으로 공을 세운 사람은 알아주지만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알아주지 않는다는 말씀도 하셨지요.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민의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와, 보다 나은 공동체를 위해 애쓰시는 분들이 계심을 기억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