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 06. 22. 샘터찬물 편지 - 34 |
2017.06.22.
샘터찬물 편지-34 노동과 삶 "창살 밖으로 봄볕을 받은 마당에 파릇파릇 봄 싹들이 돋아나는
걸 바라보고 있으면 호미 들고 일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우리 사회의 열악한 노동 현실 때문에 노동에 대한 관념이 부정적입니다만 사실은 노동하지 않는 생명은 없습니다. 더 정확하게 정의한다면 노동은 ‘생명의 존재 형식’입니다. 한 송이 코스모스만 하더라도 어두운 땅속에서 뿌리를 뻗고 계속해서 물을 길어 올리는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한 마리 참새인들 다르지 않습니다. 노동은 생명이 세상에 존재하는
형식입니다." <담론> 중에서 노동은 생명이 존재하는 형식, 그 자체임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자본주의
사회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노동을, 삶의 양식을
쉽사리 내어놓지 않습니다. 요즘 공공일자리를 늘려 청년실업을 줄이겠다는 추경안이 제도 요건에 맞지 않는다며 가로막혀 있습니다. 일하지 못해 자신의 삶을 거부당하거나 포기하는 이들이 없기를, 그들의
처지와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것은 시대의 요구이자 정치인의 책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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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06. 16. 샘터찬물 편지 - 33 |
2017.06.16.
샘터찬물 편지-33 "대문을 열어 놓고 두레상을 둘러 앉아 한솥밥을 나누는 정경은 지금은 사라진 옛그림입니다 솥도 없고 아궁이도 없습니다 더구나 두레상이 없습니다 한솥밥은 되찾아야 할 삶의 근본입니다 평화는 밥을 고르게 나누어 먹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쌀을 고루 나누어 먹는 것이 평화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 처음처럼> 중에서 지난 주말에는 비를 기다리다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텃밭에 물을 여러번 주어가며 고구마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너른마당' 식구 몇몇이 모여 파전을 구워 막걸리 한 잔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 가면서, 거창한 지식으로 상대를 설득하는것 보다는
그냥 밥 한 그릇 나누며, 막걸리 한 잔 돌리며 마음을 서로 나누는 것이 훨씬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요즘 자주 느낍니다. 새 정권이 들어서서 예전에는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작은 희망들을 가슴에 품어 봅니다. 시급 1만원이 법제화되어 '없이
사는 사람들'도 훨씬 더 편하게 서로에게 밥 한 그릇 나누며 살아가는 세상을 꿈꿔 봅니다. 남과 북이 개성공단을 하루라도 먼저 다시 문 열어 밥 한 그릇 함께 나누다 보면 이 땅에 평화가 깃드는 날도 꿈꿔 봅니다. 우리네 가슴에 두레상, 아궁이, 한솥밥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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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06. 09. 샘터찬물 편지 - 32 |

현실과 이상의 영원한 갈등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나는 굴원의 이 시를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은 어쩌면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이 오래된 주제에 대한 굴원의 결론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가장 정갈하게 간수해야 하는 갓끈을 씻고 반대로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입니다. 비타협적 엘리트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 같이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획일적 대응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굳이 이야기한다면 대중노선을 지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감옥에서 만난 노선배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좌경적이라는 의미는 ‘신목자필탄관(新沐者必彈冠) 신욕자필진의(新浴者必振衣)’처럼 비타협적인
원칙의 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경적이라는 의미는 맑은 물에는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는 발을 씻는다는
현실주의와 대중노선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오래된
과제를 마주하는 느낌입니다. <강의> 중에서 작금의 시국을 바라보는 키워드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굴원 이래 2000년을 넘은 숙제에 무엇이라 덧붙일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다만 선생님의 글을 읽어보고 오늘을 생각할 따름입니다. |
| 2017. 06. 02. 샘터찬물 편지 - 31 |

글씨 속에 들어있는 인생.
학교도 들기 전의 어린 때 할아버님 앞에서 유지를 펴고 붓글씨를 배우던 제가 이제 막상 할아버님의 비문을 쓰려고, 그것도 옥중에서 붓을 잡으니 할아버지의 추억과 함께 세월이 안겨주는 한아름의 감개가 가슴 뻐근히 사무칩니다.
써놓은 비문을 며칠 후에 다시 펴보았더니 자획의 대소, 태세가 고르지 못하고 결구도 허술하여 마치 등잔을 끄고 쓴 한석봉의 글씨 같아, 저도 어머님께 꾸중 듣는 듯한 마음입니다. 몇 군데 다시 써서 덧붙이기도 하고 조금씩 고치기도 하였습니다.
글씨도 그 속에 인생이 들어 있는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어떤 때는 글씨의 어려움을 알기 위해서 글씨를 쓰고 있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지난 토요일 서여회 사람들이 이제껏 연마해온 솜씨를 발휘하여 부채를 만들었습니다. 마치 작품전을 준비할 때처럼 정성을 다해서 부채에 덕담을 쓰고 그림도 그려 나누어 가졌습니다. 옛부터 단오선이라고 단오에 부채를 나누던 관행이 있었답니다. 토요일 오후에 남산 서실에 모여 글씨를 쓰다보면 우이체 속에 담긴 선생님의 깊은 인생을 한번 더 되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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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05. 25. 샘터찬물 편지 - 30 |
가슴에 두손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성은 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일차적이고 즉각적인 대응이며 그런 점에서 사고思考 이전의 가장 정직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성적 대응은 사명감이나 정의감 같은 이성적 대응과는 달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이러한 정서와 감성을 기르는 것은 인성人性을 고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면서 최후의 방법입니다. 말 잘하고 똑똑한 사람보다는 마음씨가 바르고 고운 사람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 _《강의》중에서 "한낱 목련이 진들 무에 그리 슬프랴 " 중학교 3학년이던 시인의 싯구가 늘 생각나는 비극의 5월이다. 이 슬픈 오월이 한 사람의 눈물로 위로가 되는 경이로운 경험을 했다. 필시
그는 가슴으로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다. 눈물은 그곳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따뜻한 가슴을 가진 그가 하려는 일들을 지지하고 함께하고 싶다. 그러면
내 가슴에도 예전 어느때처럼 애정이 쌓여 더
'인간'이 되어갈 것 같기 때문이다. |
| 2017. 05. 18. 샘터찬물 편지 - 29 |

분단의 벽 “베를린의 슈프레 강가에는 강을 따라 2킬로미터에 달하는 분단 시절의
장벽이 남아 있습니다. 그 장벽에는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환희를 새긴 수많은 글과 그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글과 그림들은 지난 세월 독일인들이 치러야 했던 분단의 아픔과 희생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나는 장벽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읽어 보았습니다. “사상은 하늘을 나는 새들의 비행처럼 자유로운 것이다.” 분단이란 땅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늘을 가르려고 하는 헛된 수고임을 깨닫게 하는 글입니다.” “우리의 통일은 이산(離散)과 증오(憎惡)를 청산하는 것일 뿐 아니라, 막대한
분단 비용을 청산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선진국 진입이 가능하다고 믿는 허상을 깨뜨리는 것이 먼저이어야 합니다. 한반도의
통일이 이러한 정신적, 물질적 소모(消耗)를 청산하는 것이어야 함은 물론이지만 나아가서는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이라는
20세기의 모순을 창조적인 다양성으로 지양(Aufheben)하는 어떤 모범을 만들어 내는
것이 된다면 더욱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_《더불어 숲》중 에서 적폐를 청산하고 사회변화를 염원하는 1천700만 촛불의 민심으로 새 정부가 출범하였습니다. 그러나 들끓는 민심
속에서도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두르고 시대정신을 외면하는가 하면, 어김없이 북풍과 색깔론이 펼쳐졌습니다. 그 이면엔 지난 반세기 우리를 짓눌러온 분단의 벽, 이념의 벽이
공고히 자리잡고 있으며,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실과 맞닿아 있습니다. 당장의 적폐들은 새 정부가 하나 둘 풀어가겠지만, 21세기 지구상의
마지막 분단국가의 오명을 벗기 위해서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겠는지요. 지난 몇 개월간 활활 타올랐던
촛불, 이제는 우리 삶 속에서 긴 호흡으로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고 이념의 벽을 허무는 새물결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
| 2017. 05. 12. 샘터찬물 편지 - 28 |

춘풍추상(春風秋霜)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 남을 대하기는 춘풍처럼 관대하게 하고 자기를 지키기는 추상같이
엄정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을 돌이켜보면 이와는 정반대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남의 잘못은 냉혹하게 평가하는가 하면 자기의 잘못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합니다. 자기의 경우는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전후 사정을 잘
알고 있지만 남의 경우는 그러한 사정에 대하여 전혀 무지하거나 알더라도 극히 일부분 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의 형평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타인에게는 춘풍처럼 너그러워야하고 자신에게는 추상같이 엄격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대화와 소통의 전제입니다."
_<신영복의
언약> 중에서 큰 이변없이 대선이 끝나고 환희와 아쉬움이 골목골목에서 들려옵니다. 저마다의 이유로 지지 후보에게 투표를 했을 것입니다. 서로 다른 선택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은
대화와 소통입니다. 대화와 소통이
가능하면 우리의 민주주의도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궁극에
처하면 변화하고 변화하면 열립니다. 열려 있으면 오래 갑니다. 변화와
소통이 생명입니다" 여러 가지로 궁한 처지라 변화를 선택했습니다. 변화가 잘 이루어져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길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누군가 들려준 건배사입니다. "믿고, 기다리고, 함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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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05. 04. 샘터찬물 편지 - 27 |

따순 등불로 켜지는 어머님의 사랑 "불탄일(佛誕日)을 맞아 이곳의 불교신도들이 강당에 달 것이라며 등을 만들어왔습니다. 저는
등에 글씨와 연꽃을 넣으면서 스산한 강당에 이곳의 수인들이 이 등과 함께 어떠한 축원을 매달 것인가를 상상하다가,
문득 올해도 절을 찾아 등을 다실 어머님을 생각합니다. --중략-- 작은 고통들에 고달파하던 저와 마찬가지로, 아들을 옥 속에 넣고 가슴저며
하시던 어머님이 어느덧 아들과 함께 옥살이하는 아들의 친구들을 마음 아파하시고 이제는 우리 시대의 모든 불행한 사람들을 똑같이 마음 아파하시는
더 큰 사랑을 가지신 더 큰 어머님으로 성장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어머님의 마음이 바로, 이승에 살기에는 너무나 자비로웠던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믿습니다. 올 초파일 힘드신 산길을 오르시어 손수 다시는 등에는 부디 숱한 아들들의 이름이 함께 담겨지길 바랍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82년도에 쓰신 글입니다. 14년여를 무기수로 살아가고 있고 바깥은 더 엄혹했던 군사독재 시절이었습니다. 그 '처지'에 타인에 대한
큰 사랑을 얘기하셨던 선생님을 생각합니다. 치열한 대선의 막바지입니다. 누구에게 투표를 할 것인가? 고민이 깊어지는 시기입니다. 이 절박한 선택의 시간에 떠오른 것은
늙으신 어머님께 무수히 많은 아들들에 대한 사랑을 청하는 무기수 아들의 마음입니다. 투표하는 손길마다 따뜻한 마음이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
| 2017. 04. 27. 샘터찬물 편지 - 26 |
2017. 04. 27. 샘터찬물 편지 - 26 꽃잎 흩날리며 돌아올 날 기다립니다. '사나이 가는 길 앞에 웃음만이 있을쏘냐 결심하고 가는 길 가로막는 폭풍이 그 어이 없으랴. 푸른 희망을 가슴에 움켜 안고 떠나온 정든 고향아 내 다시 돌아갈 때 열 굽이 도는 길마다 꽃잎을 날려보리라' 비오는 날이나 명절이 가까워 오면 철창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자주 이 노래를 부르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떠나온 고향을 생각하는 노래였습니다. 나는 오늘 그가 다녔던 전남 화순에 있는 작은 초등학교를 찾아왔습니다.
" _신영복《나무야나무야》 72쪽 낯설고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가고 새봄이 오는가 하더니 그만 꽃이 지고 있습니다.
하늘하늘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다 문득 이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가끔 술자리에서 부르고
듣던 '사나이 결심' 입니다. 요즈음 대선후보 검증을 위한 토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실에서 정치가를 직접 만날 일이 거의 없기에 언론매체와 인터넷을 통해 후보를 선택할 안목을 키우려고 노력합니다. 평전과 전기, 자서전과 소설을 읽으며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선택과
그 결말을 생각해봅니다.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 이름은 남겼을지라도 그들의 삶은 비바람과 폭풍 휘몰아치는
고난의 현장이었습니다. 세찬 겨울바다를
푸른 희망 하나 등대 삼아 헤쳐간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이 절절합니다. '부디 오래 사셔서 여러가지 일들의 끝을 보실 수 있길 바랄 따름입니다.' 1980년 10월에 우이선생님께서 어머님께 보낸 편지입니다. 징역 속에서 어머님을 뵙고 미안해 하다가도 이렇게 살아서 만날 수 있음을 다행이라 여기며 어머니를 마음속으로
위로합니다. 이제는 어렵게 찾아온 이 찬란한 봄에 부디 오래 살아 꽃잎 휘날려 주고 싶을 아름다운 사람을 찾아내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눈앞에 다가온 한 시절의 끝과 또 다른 한 시절의 아름다운 시작을 위하여 지혜롭게 마음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
| 2017. 04. 21. 샘터찬물 편지 - 25 |

2017. 04. 21. 샘터찬물 편지 - 25 아름다운 패배 “싸움이란 모두가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싸움의 비극 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차라리 오늘은 비록 패배이지만 내일은 승리로 나타나는 아름다운 패배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패배는 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승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패배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누구’와 싸울 것인가 보다는 ‘무엇’을
상대로 싸울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당신은 싸움의 이유를 널리 천명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까맣게 잊고 있는 것들을 당신의 싸움은 드러내야 합니다. 당신의 싸움은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내는 외롭지 않은 패배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기어코 승리하는 아름다운 패배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당신이 패배의 이야기가 아닌 승리의 이야기로 읽어 주리라 믿습니다.“ _신영복,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중에서 북핵문제 해법과 5월 대선전으로 화창한 봄날에도 우울해집니다. 상대방의 폭력에 대해, 더 큰 폭력으로 응징함으로써 패권을 잡는 것만이
최선책인지 혼란스럽습니다. 상대방의 폭력에 보복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전쟁이란 있을 수 없기에 보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일의 승리로 나타나는 아름다운 패배가 아닐런지요. 후보검증이라는 미명하에, 온갖 인신공격성 비방을 함으로써 진흙탕 싸움판을
벌릴 수밖에 없는지 답답합니다. 상대방에게 비방할 것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저급하고 불순한 의도에
물들지 않아 비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 내는 외롭지 않은 패배가 아닐런지요. 국가나 개인을 막론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부끄러워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면 진선진미(盡善盡美)의 참된 세상을
열어 보인 그의 아름답고 너른 나무 그늘아래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겠지요. 그리하여 마침내 모든 사람들의
진정한 승리가 되는 인간적 세상을 꿈꾸어 봅니다. |
| 2017. 04. 13. 샘터찬물 편지 - 24 |

2017.04.13 샘터찬물편지-24 카르마(Karma)의 청산 "인간의 자유는 카르마(Karma)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부정적 집합표상을 카르마라고 합니다. 표상은 인간의 인식활동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고유의 집합표상이 있습니다. 중세에는 마녀라는 집합표상이 있었습니다. 마녀라는 집합표상은 부정적이란 점에서 카르마입니다. 이 카르마를 깨뜨리는 것이 달관입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선언이 바로 '카르마의 손(損)'입니다. 카르마를 깨뜨리지 않고는 그 시대가 청산되지 못합니다. 한 사람의 개인은 물론이고 한 시대가 다음 시대로 나아가려면 부정적 집합표상인 카르마를 청산해야 합니다." - 신영복, <담론 343>, 돌베개, 2015. 불교에서는 카르마를 업식(業識)이라고 합니다. 이 업식은 보통사람들(중생)이 살아 가면서 순간 순간에 오감이 먼저 반응하여 마음속에 생기는 욕심이나 분노 등으로 자기 스스로를 얽어 매어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대통령선거를 한 달 남짓 앞둔 이 시점에서 한 개인이, 또 우리 시대가 청산해야 할 수 많은 카르마를 묵도하고 있습니다. 이 카르마를 청산하고 다음 시대로 한 걸음 나아가는 오월을 맞이 하기를 바래봅니다. |
| 2017. 04. 06. 샘터찬물 편지 - 23 |

2017. 04. 06. 샘터찬물 편지 - 23 봄볕 한 장 등에 지고 "창살 무늬진, 신문지 크기의 각진 봄볕 한 장 등에 지고 이윽고 앉아 있으면 봄은 흡사 정다운 어깨동무처럼 포근히 목을 두릅니다. 문득, 난장촌초심 보득삼춘휘(難將寸草心 報得三春輝), '지극히 작은 자식의 마음으로 봄볕 같은 부모의 은혜를 갚기 어렵다'는 불우했던 맹교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봄볕뉘는 아무래도 어머님의 자애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99쪽. 미세먼지가 서울의 봄하늘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들로 산으로 손에 손잡고 많은 사람들이 봄나들이 갑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텔레비젼 뉴스에 집중하며 마음을 졸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세월호가 목포신항까지 옮겨져서 뭍으로 들어올려지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아이를 찾지못한 어머니는 날마다 바다로 나가서 아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가야 우리 아가야..어서 엄마 품으로 돌아와라. 엄마 등에 업혀 집으로가자." 점점 각박해가는 세상 인심이지만 어머니 마음은 언제나 우리를 눈물짓게 합니다. 세월호 어머니의 마음에 우리의 봄볕 한 장 나누고 싶습니다. |
| 2017. 03. 30. 샘터찬물 편지 - 22 |

2017. 03. 30. 샘터찬물 편지 - 22 한 송이 팬지꽃 "물컵보다 조금 작은 비닐화분에 떠온 팬지꽃 한 포기를 얻어 작업장 창턱에 올려놓았습니다. 행복동의 영희가 최후의 시장에서 사온 줄 끊어진 기타를 치면서 머리에 꽂았던 팬지꽃. 화단의 맨 앞줄에나 앉는 키 작고 별로 화려하지도 않은 꽃이지만, 열두 시의 나비 날개가 조용히 열려 수평이 되듯이, 팬지꽃이 그 작은 꽃봉지를 열어 벌써 여남은 개째의 꽃을 피워내고 있습니다. 한 줌도 채 못되는 흙 속의 어디에 그처럼 빛나는 꽃의 양식이 들어 있는지……. 흙 한 줌보다 훨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내가 과연 꽃 한 송이라도 피울 수 있는지, 5월의 창가에서 나는 팬지꽃이 부끄럽습니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꽃피는 봄 입니다. 홀로 피고지며 산야를 아름답게 하는 이름모를 들꽃들이 부럽고, 이들을 겨우내 품어 세상에 희망으로 내어주는 묵묵한 대지에는 경의를 느낍니다. 우리도 가슴에 키워오던 사랑 하나 촛불로 세상에 내어놓을 수 있었다는 위안은 가져도 되는 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생기 가득한 봄날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
| 2017. 03. 23. 샘터찬물 편지 - 21 |

2017. 03. 23. 샘터찬물 편지 - 21 봄꽃 "언덕에 봄꽃을 피우고 있는 섬진강도 강물은 아직 차디찹니다. 강물에 조용히 손 담그면 팔뚝을 타고 오르는 한기가 아픈 추억과 함께 전율처럼 가슴을 엡니다. 대상을 바라보는 행위는 동시에 자신의 추억을 돌이켜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작은 봄꽃 한 송이를 기뻐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아름다운 추억을 가져야 합니다. 하물며 비뚤어진 우리들의 삶을 바로잡는 일 없이 세상의 진정한 봄을 맞이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재에 대한 과거의 위력은 미래에 대한 현재의 의미를 증폭시킴으로써 완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처음처럼』, 65면. 산에 언덕에 봄꽃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1969년 1월 청년 신영복은 사형선고를 받고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그의 짧은 인생을 정리합니다.독재에 항거하다 잡혀와 찬란한 햇살 아래 총살형으로 장렬하게 스러져갈지도 모르는 자신의 운명을 앞두고 지나온 날들을 회상합니다. 66년 봄 서오릉 소풍길에서 만난 청구회 어린이들, 어쩌면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장충체육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꼬마 친구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교도소의 마룻바닥에 엎드려 하루 두 장씩 지급되는 재생종이로 된 휴지에 이 아이들과의 만남을 기록합니다. 글을 쓰고 있는 동안은 옥방의 침통한 어둠으로부터 진달래꽃처럼 화사한 서오릉으로 걸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먼 훗날 나는 서오릉으로 봄철의 외로운 산책을 하고 싶다. 맑은 진달래 한 송이 가슴에 붙이고 천천히 걸어갔다가 천천히 걸어오고 싶다." 엔딩 크레딧입니다. 청년 사형수의 작은 희망이었습니다. 올해도 진달래 꽃길에서 선생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
| 2017. 03. 16. 샘터찬물 편지 - 20 |

2017. 03. 16. 샘터찬물 편지- 20 곤이부지자(困而不知者) "우리를 절망케 하는 것은 거듭되는 곤경이 아니라 거듭거듭 곤경을 당하면서도 끝내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음은 반복입니다. 그러나 거듭되는 곤경이 비록 우리들이 이룩해 놓은 달성(達成)을 무너뜨린다 하더라도 다만 통절한 깨달음 하나 일으켜 세울 수 있다면 곤경은 결코 절망일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그것은 새출발의 디딤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 신영복,《더불어숲》, 돌베개, 2015.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을 인용하여 '파면'을 선언하였습니다. 정치란 평화와 소통과 변화의 사회적 역량을 키우는 것이 본령일진데, 오로지 통치권력의 장악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때에는 '불의의 구조화'와 '폭력의 제도화'로 그 본령이 거세당하기 마련이지요.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와 같은 정치현실을 숱하게 겪어 왔지만 그로 부터 귀중한 교훈을 읽어 내지 못한 채 다시금 곤경에 처하곤 하였지요. 탄핵심판이 진행되는 동안, 정치의 본령이 거세된 부정부패 정권의 민낯이 세세히 드러났지요. 나아가 곤경을 겪고도 깨닫지 못하는 곤이부지(困而不知)의 사회가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통절하게 깨달았습니다. 불의한 정치로 곳곳에서 힘겨웠지만, 여럿이 함께 가면 길은 뒤에 생겨난다는 선생님 말씀대로 1000만 촛불 시민이 민주혁명의 대장정을 힘차게 이어 나갔고 민주주의 회복의 새로운 길이 생겨났습니다. 역사의 변곡점이 될 이 길에서 곤이지지(困而知之)의 교훈을 되새겨 봅니다. 잘못된 선거가 낳은 곤경을 디딤돌 삼아, 다가오는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사회변혁의 새 출발점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 2017. 03. 09. 샘터찬물 편지 - 19 |

2017. 03. 09. 샘터찬물 편지- 19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자기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나아가 우리 사회와 민족의 운명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읽어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을 소중하게 여기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의 현재를 정직하게 바라보게 할 뿐 아니라 진실은 과거를 청산하고 동시에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일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의 발견이 미래의 참된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 신영복,『냇물아흘러흘러어디로가니』, 193면. 역사적인 판결을 앞둔 밤입니다. 어두울수록 깨어있던 촛불의 마음으로 과거의 적폐를 청산하고 참된 진실을 밝혀서 새로운 변화를 열어내리라 믿습니다. "민주주의를 긍정하는가. 더구나 그것의 자본주의와의 결합을 긍정하겠는가? 이 양자의 결합을 승인하는 것은 자본의 무제한한 횡포를 승인하는 게다. 자본측근자(資本側近者)를 제왕(帝王)으로 모시는 것이다. 적어도 한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우월할 수 있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사랑이다. 헌신(獻身)이다. 하나의 생명이 두 개의 생명을 위하여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사랑이다. 둘 또는 그 이상의 생명을 위하여 헌신하는 생명은 두 배 또 두 배 이상으로 우월하다." -신영복,『냇물아흘러흘러어디로가니』, 141면. |
| 2017. 03. 02. 샘터찬물 편지 - 18 |
2017. 03. 02. 샘터찬물 편지- 18 양심 "물 탄 피(和水血)의 이야기입니다. 대학병원에서 피를 팔기 전에 매번 찬물을 잔뜩 들이키고 나서 채혈실로 들어갔다는 어느 친구의 기억이 강물처럼 가슴에 흘러듭니다. 하루의 일당을 받지 못하는 날이면 집에 들어갈 얼굴이 없어서 합숙소에 들어 밤잠을 자고 새벽 일찍 대학병원으로 달려가 피를 팔고 그 돈으로 동생들의 끼니를 사서 집으로 들어가는 그런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나의 뇌리에서 지울 수 없는 것은 어둑새벽 대학병원의 수도꼭지에서 양껏 찬물을 들이키는 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지울 수 없는 기억은 자기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고 하는 그의 단호하고도 위악적(僞惡的)인 표정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단호한 어조와 그 침통한 표정에서 그것은 그가 상당한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었다는 반어(反語)임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들이킨 물이 곧장 혈관으로 들어가 피를 묽게 해준다고 생각하는 그의 가난한 지식이 마음 아픕니다. 그는 동생들의 끼니를 위하여 좀 더 많은 피를 만들려고 했던 형이었고, 그리고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좀 더 많은 피를 남기려 했던 노동자였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설령 그가 들이킨 새벽 찬물이 곧바로 혈관으로 들어가 그의 피를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얻는 부당이득의 용도를 알기 때문입니다." 《나무야 나무야》중에서. '도의적 책임'이란 말이 '양심'과 같거나 비슷한 말인 줄 알았는데, 최근 전혀 다르게 사용되는 것을 봅니다. 국정 농단의 피의자들은 기소된 혐의의 물증이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무죄를 주장하며, '도의적 책임'은 지겠다고 합니다. 법적 형벌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반성하고 있다는 그럴싸한 위선의 증표로 쓰이고 있습니다. 뻔뻔함의 극치이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기방어의 최대치입니다. 민중의 역량으로 수많은 합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오늘과 내일의 사회에서는 '양심' 또는 '도의적 책임'이라는 말이 법보다 더 엄정(嚴正)한 무게로 양심을 따르는 지식인과 굳은 심지(心地) 하나 의지하고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의 '등불'이 되어주길 소망합니다. |
| 2017. 02. 23. 샘터찬물 편지 - 17 |

2017. 02. 23. 샘터찬물 편지- 17 신뢰 "모든 정치적 목표는 백성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그러한 지혜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지요. 백성들의 생각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집단적인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 도달한 결론입니다. 충분한 임상학적 과정을 거친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결론인 셈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백성들에게 과연 독자적인 판단 능력이 있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고 있는 지식인의 경우가 더 회의적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가 가동시키고 있는 막강한 우민화愚民化 메커니즘은 더욱 회의적이게 합니다. CF 광고는 물론이며 문화와 예술, 교육에 이르기까지 압도적으로 군림하고 있는 막강한 권력을 생각한다면 절망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강의》중에서 다가오는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자꾸 불안해집니다. 한두 고비가 아닌 험난한 여정이 펼쳐질 봄일 수밖에 없고, 수구집단의 준동이, 그리고 지난 시절의 경험이 다가올 봄에 대해 마냥 낙관적일 수만은 없게 합니다. 이 불안한 마음을 다스릴 길은 결국 우리 자신을 믿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 관계론의 실천적 버전이 연대입니다." 광장에 함께 서는 일이 그 신뢰를 키우는 일이라 믿습니다. |
| 2017. 02. 16. 샘터찬물 편지 - 16 |

2017. 02. 16. 샘터찬물 편지- 16 가위 바위 보 "어느 사회에나 대립과 갈등은 존재합니다만, 표출되는 방식이 감정적이고 극단적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이 낮은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도 있지만, 저는 이 모든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신뢰하는 신뢰집단이 없다는 데서 비롯됐다고 봅니다. 전 학교에 있지만 대학, 제도 정치권, 언론, 사법, 자본 등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 대한 일반인들의 신뢰가 낮습니다. 신뢰 집단이 없는 상태에서는 자기와 대립한 사람들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야 자기의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가위, 바위, 보에서 가위와 바위밖에 없으면 바위를 차지하려고 극단적인 대결을 벌입니다. 보가 중간에 있어야죠. 신뢰 집단을 구성하려는 노력을 해야합니다." 《손잡고 더불어》 228-229면. 오래 집을 비웠다 돌아오니 세상은 더 어지럽고 복잡하게 얽혀가고 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조용히 선생님께 여쭈어보았지요. 십여 년 전에 하신 말씀이 지금 이 상황에도 유효합니다. 파도치는 정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기 보다는 자기가 지금 빠져있는 우물 자체를 조감하는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수평적 사유를 확장하기 보다는 그걸 수직화해서 깊이있게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는 일이 선생님의 책을 읽는 독자의 몫이라고 하십니다. " 그 시대를 정직하게 호흡하고,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 항상 하시던 말씀이 오늘은 더욱 깊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가슴에 두손을 얹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주먹을 쥐었다 펴보고 다시 주먹을 쥐었다 펴며 가위, 바위, 보를 차례로 만들어 봅니다. |
| 2017. 02. 09. 샘터찬물 편지 - 15 |

2017. 02. 09 샘터찬물 편지 - 15 지혜, 시대와의 불화 "불가에서는 애초부터 세계를 분석하지 않는다.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깨달음이 지혜의 본질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정보사회에서는 정보의 양이 지식의 높이가 된다. 많이 쌓을수록 지혜가 커진다. 근대의 시작은 남의 지(知)를 내게 쌓을 수 있다는 신념의 출현과 함께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의 누적이 결국 혼란이 되고 홍수가 된다면, 그것을 지혜의 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것이 타자화하고 대상화하고 분석하는 일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럴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쌓고 소유하는 것으로 공부를 끝낸다. 공부란 깨달음이며 자기 변화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변방을 찾아서》 중에서 제 주변에는 '밥을 먹기 위하여 일을 하는 사람'과 '일을 하기 위하여 밥을 먹는 사람' 그리고 '일터나 일을 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일에 대한 동기는 다르지만 모두들 무언가를 공부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인성의 고양을 화두로 삼고 공부하는 사람도 있지만 성과만능주의 사회에서 요구되는, 경쟁을 위한 공부가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공부는 학사습행(學思習行)의 과정 없이 남의 지(知)를 자신에게 주입(input)하고, 암기하며(memory), 필요한 시점에 쏟아내는(output) 것을 목적으로 하지요. 따라서, 지(知)를 많이 쌓을수록 사람이 불완전한 컴퓨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섬찟해집니다. 공부가 깨달음과 자기변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박제된 지식과 숫자로 저장되어 삶과 유리되는 것은 물질의 낭비보다 심각한 사람의 낭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가능성은 과거를 뛰어넘고 사회의 벽을 뛰어넘어 드디어 자기를 뛰어넘는 비약에 있습니다."《나무야 나무야》중에서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시대, 비인간적인 사회와 불화하며 깨달음과 자기변화로 이어지는 진실한 공부가 우리의 삶 속에서 피어나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