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샘터찬물 84번째 편지(2018.06.15.)/수신제가 치국평천하 |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대학(大學)』 장구(章句)의 진의는 그 시간의 순차성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 각각의 상호연관성, 그 전체적 통일성에 깊은 뜻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제가(齊家)밖의 수신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있다면 그것은 수신이 아니라 기실 소승(小乘)의 목탁이거나 아니면 한낱 이기(利己)의 소라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치국 앞선 제가란 결국 부옥(富屋)의 맹견(猛犬)과 그 높은 담장을 연상케 합니다. 평천하를 도외시한 치국, 이것은 일제의 침략과 횡포를 그 근본의 하나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비가 날아오니 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봄이기 때문에 제비가 날아오는 것일 터입니다. "Morality to the self, harmony to the family, order to the land, peace to the world.(修身齊家治國平天下)" This passage in Daxue-Zhangju(大學章句) does not show the logical sequence of the entries, I think. A much deeper meaning lies in the mutual relatedness among them, which leads to the total syncretism of these values. Can there be a moral self without harmony in the family? If it does, it would be nothing more than a display of self-centricism, or just an ornamented form of selfishness. A harmonious family in a land without order? It makes me think of lofty walls around a stately mansion and the herd of fierce dogs therein. An orderly land in a world without peace? We remember, don't we, what imperial Japan did to her neighbors? It is because spring has come that the sparrow returns, not the other way around. [tr. by Orun Kim]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중에서 2018년 6월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를 위한 큰 산을 넘었다. 우리와 북한, 거기에 세계의 질서를 좌지우지하는 미국이 올라탄 험난한 항해를 시작한 것이다. 가시박 덩굴처럼 칭칭감고 떨어질 줄 모르는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바뀌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긴장과 대치 속에 반세기를 보낸 한민족은 악수와 포옹으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평화와 희망의 미래로 걸어가는 주체로, 우리의 내일을 우리가 결정하는 한반도의 주인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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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83번째 편지(2018.06.08.)/탁(度)과 발 |

정鄭나라에 차치리라는 사람이 있었다. 자기의 발을 본(度)뜨고 그 자리에 두었다. 시장에 갈 때 탁度을 가지고 가는 것을 잊었다. 신발가게에 와서 신발을 손에 들고는 탁을 가지고 오는 것을 깜박 잊었구나 하고 탁을 가지러 집으로 도로 돌아갔다. 탁을 가지고 다시 시장에 왔을 때 장은 이미 파하고 신발을 살 수 없었다. 그 사정을 듣고 사람들이 말했다.
“어째서 직접 발로 신어 보지 않았소?“
차치리의 대답이 압권입니다.
“탁은 믿을 수 있지만 내 발은 믿을 수 없지요.“
<중략> 현실을 보지 못하고 현실을 본 뜬 탁을 상대하는 제자백가들의 공리공담을 풍자하는 (한비자)의 예화입니다. There lived a man in Zheng land, with the name of Cha-chi-ri(literally meaning, again-leave-footprint). He carefully drew a print of his feet, with which he intended to buy shoes of the right size for himself. On his way to the marketplace he forgot to carry the print with him. He realized this at the shoestore, and returned home to fetch it. When he got back to the marketplace, the shoestore was already closed and he failed to buy his shoes. A neighbor heard about this and asked Cha-chi-ri; "Why didn't you try the shoes with your own feet?" Cha-chi-ri's answer was just marvellous. "The carefully drawn print is reliable, but my feet are not." (...) A fable by Han-fei-zi criticizing sophiscated theorists of his time who would not deal with the reality itself, but only with hypothetical models of their own making. [tr. by Orun Kim] _<담론> 중에서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보다 책이나 인터넷매체를 더욱 신뢰하는 현실을 우이선생님도 염려하셨습니다. 6.13지방선거를 준비하는 후보들의 많은 공약들을 다양한 매체로 만나게 됩니다. 유권자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조작 댓글이나, 비방글, 과장된 공약들이 난무합니다. 과정을 공정하고 아름답게 했을 때 그 결과 또한 훌륭하다고 믿습니다.
혼미한 ‘탁’에 속지 말고 이 시대를 직시하고 옥석을 가려내는 지혜가 더욱 절실해지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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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82번째 편지(2018.06.01.)/관계 |

소혹성에서 온 어린왕자는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관계 맺음이 없이 길들이는 것이나 불평등한 관계로 길들여지는 것은 본질에 있어서 억압입니다. 관계 맺음의 진정한 의미는 공유입니다. 한 개의 나무의자를 나누어 앉는 것이며 같은 창문에서 바라보는 것이며 같은 언덕에 오르는 동반입니다. "To tame," the fox said to the little prince, "is to create a link." Taming without creating a link, or taming into an unequal relationship, is an oppression in essence. The real meaning of a link lies in sharing. Sharing seats on the same wooden bench, sharing a window for the same lookout, or sharing a trail path up to the same hilltop. -<처음처럼> 중에서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길들였던 여우와 어린왕자 이야기는 이제 전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힘의 크기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시작하려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중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입니다. 멀고 험한 길을 실낱같은 희망으로 지켜온 긴 역사가 있습니다. 이제 막바지를 향한 이 길을 손잡고 함께 오르고 싶습니다.
더불어 한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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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81번째 편지(2017.05.25.)/나무처럼 물처럼 |
 자기의 철학이나 의지를 쉽게 버려서는 안 되겠지만 저는 나무같이 살면 된다고 생각해요. 나무란 자기의 자리를 선택하지 않아요. 저는 나무처럼 우리의 삶도 어느 지역, 어느 시공간에 던져졌다고 봅니다. 때문에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요.
-중략-
저는 자기가 던져진 시대와 사회의 여러 가지의 실존에 대하여 자기의 가치나 의지를 전면에 내세워 직선적 대결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생명으로서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참담하리만큼 직선적 삶이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감동적인 메시지를 던져주기도 해요. 그렇다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본받을 만한 삶은 될 수 없다고 봐요. 사람들은 나무처럼 자기가 던져진 곳의 바람과 물과 토양 속에서 자기를 키워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저는 나무나 물처럼 무리하지 않습니다. One should keep faithful to his own worldview and aspirations, but he should not go to extremes. I think we can learn the way of living from trees. A tree does not choose its location for itself. Like trees, our lives are planted at certain locations in time and space. That is why we just have to do our best under whatever conditions we are given. (...) There are times we feel inclined to defy certain conditions given to the time and place we are planted at. But I do not find the beauty of life in downright rejections. There are times, of course, when some desperately fierce struggles deeply move the minds of neighbors. But they cannot be recommended to other people as a good way of life. One has only to cultivate himself in the wind, water and soil given to the location he is planted at. That is why I keep from either striving or contending too strongly, like a tree, or like water. [tr. by Orun Kim] _<손잡고 더불어> 중에서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선택한 환경보다는 선택하지 못한 환경에서 살아가야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더구나 주어진 시대의 요구를 따른 우이선생님 같은 분들은 더 그러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아름다운 삶을 일구어 내신 모습에 감동과 용기를 얻고 있습니다. 조마조마한 평화의 봄을 바라보면서 선택하지 않은 한반도의 현실이지만 민족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한 노력을 멈출 수는 없다는 당연한 시대 과제를 가슴으로 느낍니다. 이를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이들에게 뜨거운 연대의 박수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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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80번째 편지(2017.05.18.)/ 햇볕 한 장 |

추운 겨울 독방 무릎에 올려 놓은 신문지 크기의 햇볕 한 장 무척 행복했습니다. 2시간의 햇볕 한 장은 생명의 양지陽地였습니다. 2시간의 겨울 햇볕 한 장만으로도 인생은 결코 손해가 아니었습니다. 비록 혹독한 세월이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삶이라고 하더라도.
The square of sunshine spread on my lap like a sheet of newspaper, in a cold solitary confinement cell, was happiness itself. The sheet of sunshine wrapped me in the better part of the world for two hours. For two long hours, thanks to the square of sunshine, I could stop feeling sorry about this life. No matter how thick its bitterness is. [tr. by Orun Kim]
_ 《처음처럼》중에서
선생님의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생각나는 추사선생의 글씨가 있습니다. ‘ 小窓多明 使我久坐: 작은 창에 햇볕이 좋아 나를 오래 앉아 있게 하는구나.’ 입니다.
감옥과 유배라는 곤경 속에서도 햇볕 한 장에 삶의 여유를 녹여내는 그들의 심성과 견고한 의지에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청명한 오월! 좋은 햇살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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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79번째 편지(2017.05.11.)/ 모순과 대립 |

원으로 만들면 사실과 진실. 좌와 우가 서로 맞닿습니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하기도 합니다. 극좌와 극우는 같다고 합니다. 나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같은 것이라는 주장이 그렇습니다. 둘 다 동同의 논리이고 패권론입니다. <주역> 사상의 특징으로 소개했던 대대원리에 의하면 물 속에 불이 있고 불 속에 물이 있습니다. 자기의 반대물을 자기 집으로 모시는 것이 바로 호장기택互藏其宅입니다. 동양적 사유는 결정론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모순과 대립의 통일과 조화가 세계 운동의 원리입니다. If we make it (the diagram showing the distribution of different ideas) into a circle, contacts will be made between facts and truth, and between the right and the left. The extremes can meet. They say that the ultraright and the ultraleft belong to the same kind, and that Nazism and proletariat dictatorship have little difference. It is because both are pursuits of hegemony, relying on the same logic of assimilation. According to the principle of reciprocality, which I take for an essential element of Book of Changes, you can find fire in the middle of water and water in the middle of fire. It is the principle of admitting and containing your very opposite, like inviting your archenemy into your living room. Oriental thoughts are not inclined for determination. We must change our ways of thinking. Dissolution of contradictions and harmonization of conflicts will be the direction of the world movement. [tr. by Orun Kim] _<담론> 중에서 남북평화회담이 열리던 날 ,세대와 이념을 초월하여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감동과 환호를 보냈으리라 믿습니다.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에 대한 염원은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되돌릴 수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역사의 뒤안길, 이념의 대립으로 수 많은 무고한 생명의 희생과 억울함을 마주했던 지난 시간들..
이제는 지나 온 역사를 돌아보고 거울 삼아 남북이 하나 되고 전쟁이 사라지며 극우와 극좌, 당리당략의 정치에서 벗어나 먼저, 생명존중과 배려의 마음으로 세계가 서로 돕고 도우며 존재와 관계가 조화로운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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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78번째 편지(2017.05.04)/ 시냇물 |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따라 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싶어 바다로 간다 이 노래는 감옥에서 만기 출소자를 보내는 출소 파티(?)에서 마지못해 부르던 나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출소 파티라 하지만 같은 감방사람들이 벽을 기대고 둘러 앉아 오복건빵 한 봉지씩 나누어 먹으며 덕담을 나누는 초라한 파티였다. 때로는 교도관의 눈치를 봐가며 낮은 목소리로 부르기도 했는데, 내 차례가 되면 언제나 〈시냇물〉을 불렀다. 감방동료들이 어린이 노래를 못 마땅해 하다가도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는 대목에 이르면 다들 눈빛이 숙연해지곤 한다. Stream, oh stream, where is your ceaseless rush headed for? I am going to the river, to join her majestic march. River, oh river, where is your steady flow headed for? I am going to the sea, for a majestic view of the world." It was my favorite number when I was urged to sing a song at farewell parties. Very humble parties to congratulate the departure of those fellows who had finished their time. The roommates would sit around, sharing some biscuits and exchanging words of goodwill. At times, when the guards did not seem to mind, we would take turns to sing a song in a muffled voice and I would sing "Stream, oh stream" when my turn came. My fellows were not pleased at first with my choice of a children's song, but whenever I reached the last verse, "for a majestic view of the world", their faces could not conceal the movement of their minds. [tr. by Orun Kim]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중에서 현자들은 세상의 완성된 이치(理致)를 물에 비유하곤 한다. "오늘 떠오른 태양은 어제의 그 태양이 아니고, 오늘 흐르는 저 강물 또한 어제의 그 강물이 아니다" 찬 냉면 한 그릇에 시작된 한반도의 봄은 물 흐르듯 흘러 이 땅에 평화의 이름으로 통일의 꽃을 피어나게 하리라는 성급한 희망을 가져 본다.
바다로 향하는 역사의 강물에 첫 발을 디딘, 통역 없이 대화가 가능한 한민족 한겨레 두 정상의 만남이 우리 민족을 평화의 바다로, 통일의 바다로 실어가는 강물의 물꼬가 되어 주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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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77번째 편지(2017.04.27)/ 좌경과 우경 |

제가 감옥에서 만난 노선배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좌경적이라는 의미는 '신목자 필탄관(新沐者 必彈冠) 신욕자 필진의(新浴者 必振衣)'처럼 비타협적인 원칙의 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경적이라는 의미는 맑은 물에는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는 발을 씻는다는 현실주의와 대중노선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오래된 과제를 마주하는 느낌 입니다. "Think as a leftist, and act as a rightist," some old birds told me in prison. A leftist adheres to the principle in an uncompromising way, like a man who brushes off his hat and gown after taking a bath. A rightist conforms himself to the general public in a realistic way, like a man who would wash his hat-lace when the water is clean and wash his feet when it is not. How should we deal with the conflict between ideas and reality? An ancient question indeed. [tr. by Orun Kim] 《강의》중에서 2018년 4월 27일이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지 설레는 마음도 크지만 오랜 갈등의 근원에 다가가는 일이기에 조마조마 하기도 합니다. 부디 우리의 소원이 강물처럼 흘러 바다에 이르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바깥에서만 열 수 있는 문은 문이라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열어 주는 문도 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손으로 열고 나가는 문이라야 합니다.
자기 발로 걸어 나가는 문이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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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편지 76번째(2018.04.20)/침묵과 요설(饒舌) |

침묵과 요설은 정반대의 외모를 하고 있으면서도 똑같이 그 속의 우리를 한없이 피곤하게 하는 소외의 문화입니다. 나는 이러한 교도소의 문화 속에서 적지 않은 연월(年月)을 살아오면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침묵을 열고 요설을 걷어낼 수 있는 제3의 문화를 고집하고 있는 많지 않은 사람 속에 서고자 해왔습니다. 불신과 허구, 환상과 과장, 돌과 바람, 이 황량한 교도소의 문화는 그 바닥에 짙은 슬픔을 깔고 있기 때문이며, 슬픔은 그것을 땅 속에 묻는다 할지라도 '썩지 않는 고무신', '자라는 돌'이 되어 오래오래 엉겨붙는 아픔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제3의 문화는 침묵과 요설의 어중간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믿습니다. 버리고 싶은 마음, 잊고 싶은 마음을 정갈히 씻어 볕에 너는 자기 완성의 힘든 길 위의 어디쯤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Muteness and talkativeness appear to be opposite things, but they belong to the same 'alienating culture' that exasperates us. Living quite a number of months and years in this prison culture, I keep trying to place myself among the small group of people who seek another culture of opening up the silence and damping down the garrulity. Distrust and falsity, illusion and exaggeration, in the form of stone and wind, cloak the lives in this prisonhouse. The bottom there is filled thick with grief. Grief which, like rubber shoes, will not rot away even buried underground and keep inflicting pains on us for numberless days. I do not suppose that the new culture is located somewhere between silence and garrulity. I expect to find it somewhere on the road to the self realization, where we launder our regretful and pain-stricken minds and hang them out in the sunshine to dry. [tr. by Orun Kim] _<감옥으로부터의 사색>중에서 우리를 가두기위해 저들을 가둔 것이라는 어느 사회학자의 말이 이해되는 것처럼 교도소 안밖의 삶이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픔 많은 4월입니다.
'침묵과 요설'을 넘어 이젠 별이된 저 꽃같은 아이들을 가슴에 품는 것이 사람과 인간이 걸어가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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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편지 75번째(2018.04.13)/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
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이백(李白)은 호지(胡地)에 꽃나무가 없어서 봄이 와도 봄답지 않다고 하였지만 이곳에서 느끼는 불사춘(不似春)은 봄을 불러 세울 풀 한 포기 서지 못하는 척박한 땅 때문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우리와 우리 이웃들의 헝클어진 생활 속 깊숙이 찾아와서 다듬고 여미고 복돋우는 그런 봄이 아니면
‘4월도 껍데기’일 뿐 진정한 봄은 못되는 것입니다. "In the wasteland where no grass grows and no flower blooms, there is no way to perceive
the coming of the spring.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Li Bai(李白, 701-762) complained that the spring is not like a spring in uncivilized realms
because there were no flowertrees to indicate it. My reason for failing to feel the spring here is a different one. As long as we do not see a spring that penetrates the troubled lives of our neighbors to support,
comfort and encourage them, what April brings along will be merely an empty shell of a spring. [tr. by Orun Kim]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식목일을 지나 어느덧 4월도 중순에 접어듭니다. 산과 들에 봄은 왔지만 아직 우리 사회 곳곳에,
특히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게는 겨울이 한창입니다. 소득이 낮아 취약 지대에 놓인 사람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취업을 하지 못해 전전긍긍 하는 젊은이들, 성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 이들 모두 따뜻한 봄을 느낄 수 있도록 사회가 보다 많은 노력과 관심을 기울였으면 합니다. 이들이 더불어 함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껍데기가 아니라 알찬 4월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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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편지 74번째(2018.04.06)/ 유각양춘 – 다리가 있는 따뜻한 봄 |
당(唐)나라 현종(玄宗)때의 재상 송경(宋璟)은 따스한 봄볕 같은 인품으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백성들을 사랑하고 물건을 아껴서 그가 가는 곳마다 풍속이 아름다워졌습니다. 그래서 그를 일컬어 ‘다리가 있는 따뜻한 봄’ (有脚陽春)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Song Jing(宋璟), chancelor of Tang under Emperor Xuan-zong(玄宗), was renowned for extreme benevolence. Wherever he served as a governor or a magistrate, improvement was made in the local customs, thanks to his devotion to the people and his sincerity in his work. That is why people of his time called him "Spring Sunshine on Two Legs(有脚陽春)". [tr. by Orun Kim]
_<처음처럼> 중에서
봄은 반걸음 물러섰다가 두 걸음으로 나아가며 옵니다.
벌써 여기저기 순서없이 산수유, 생강나무, 진달래, 매화 화르르 피어나고 미세먼지 속 우울한 마음을 환하게 합니다.
집 앞 소나무, 산사나무, 매화나무도 수액 올라가는 소리가 힘차게 들리는 듯 합니다.
부드러운 봄 햇살은 나무와 언 땅에게 기지개 펴라하고 기운생동하라 합니다.
새 봄을 맞이하며 누군가에게 ‘다리가 있는 따뜻한 봄’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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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편지 73번째((2018.03.30.)/평화의 길 |

더위 피하기 겸해서 「십팔사략」(十八史略)을 읽고 있습니다. 은원(恩怨)과 인정, 승패와 무상, 갈등과 곡직(曲直)이 파란만장한 춘추국의인간사를 읽고 있으면 어지러운 세상에 생강 씹으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공자의 모습도 보이고, 천도(天道)가 과연 있는 것인가 하던 사마천(司馬遷)의 장탄식도 들려 옮니다. 지난 옛 사실에서 넘칠 듯한 현재적 의미를 읽을 때에는 과연 역사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살아 있는 대화이며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Outline of Eighteen Dynasties (十八史略) is a good read for a summer afternoon. From time to time as I get immersed in the victories and defeats, conflicts and resolutions, goodwills and resentments among various characters in history, I feel as if I were seeing Confucius teaching his students with ginger in his mouth or hearing Sima Qian(司馬遷)'s sigh, wondering if the Way of Heaven exists at all. When I read in the old stories overwhelming relevance to the present, I am reassured again and again that history is truly a continuous conversation among the past, the present and the future, and that all histories are the history of today. (tr. by Orun Kim)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2018년 겨울 세상에서 가장 뜨거웠던 동계올림픽이 열린 평창의 겨울은 신의 한 수가 있었던, 그 어느 동계 올림픽보다 빛난 그것이였습니다. 세상의 이목이 스포츠를 넘어 평화의 불꽃이 되어 한민족에게 한반도에 빛추었습니다. 오늘의 세계가 춘추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지만, 힘의 원리가 세상의 질서를 붙잡고 길을 만들고, 갈등을 만들고 봉합하기도 합니다. 그 틈에 놓여 우리의 길을 찾아야하는 분단의 고단함을 넘어서기 위한 주춧돌을 놓았습니다.
사마천의 장탄식, 천도가 평화의 이름으로 한반도에서 시작된 것은 봄날의 얼음 밑의 물 흐르는 소리같이 반갑기 그지없으며 또한 조심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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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편지 72번째(2018.03.23)/춘풍추상(春風秋霜) |

대인춘풍지기추상(待人春風持己秋霜) 남을 대하기는 춘풍처럼 관대하게 하고 자기를 지키기는 추상같이 엄정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을 돌이켜보면 이와는 정반대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남의 잘못은 냉혹하게 평가하는가 하면 자기의 잘못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합니다. 자기의 경우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전후사정을 잘 알고 있지만 남의 경우는 그러한 사정에 대하여 전혀 무지하거나 알더라도 극히 일부분 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의 형평성을 잃지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타인에게는 춘풍처럼 너그러워야하고 자신에게는 추상같이 엄격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대화와 소통의 전제입니다. "Like spring breeze to your neighbor, and like winter frost to yourself." We should be generous to others and strict with ourselves. But in reality we are apt to go the opposite way. We often are very exact in finding other people's faults and quite blind to ours. It is because we know very well about the reasons for our own faults, while we know much less, if at all, about the reasons for others' faults. That is why we have to be generous like spring breeze to others, and severe like winter frost to ourselves, so as to secure the minimum level of fairness. It is the necessary condition for any relationship and dialogue.(tr. by Orun Kim)
_<언약> 중에서 춘풍추상을 붓글씨로 써서 책상 앞에 붙여두고 좋은 사람이 되어보려고 노력했지만 되돌아보면 부끄럽기만 합니다. 세상살이가 너무 팍팍해서 여유가 없었다는 말은 옹색한 변명이지요.
봄비 내리는 날 가슴에 손을 올려놓고 가을서리의 엄정함을 따라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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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편지 71번째(2018.03.16)/가슴에 두 손 |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성과 인격은 이를테면 사상의 최고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상은 그 형식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육화肉化된 사상이 되지 못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경우에도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은 법제적 정비 수준에 의하여 판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 성원들의 일상적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 실현되는 삶의 형태로 판단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그러므로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성은 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일차적이고 즉각적인 대응이며 그런 점에서 사고思考 이전의 가장 정직한 느낌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성적 대응은 사명감이나 정의감 같은 이성적 대응과는 달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이러한 정서와 감성을 기르는 것은 인성人性을 고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면서 최후의 방법입니다. A man's idea should be understood in terms of his sentiments. An idea begins to truly belong to a person when it grows beyond the wall of logic and reflects his real feelings. Then it will be an incarnation of the person, something departing from a dry, impersonal idea that depends solely on reason and logic. It is much the same with a society. Cultural values of a society cannot be judged from the level of its legal institutions alone. They can be better watched in the reality of the members' daily lives. (...) That is why I find the real essence of a man's ideas in his heart, preserved in the form of sentiments. His feeling is the primary and immediate response to outside challenges, more honest than his thinking. When you have it, you do not need a sense of duty or a sense of justice to do what you have to do. Your mind just feels uneasy if you do not do it. Cultivating such feelings and sentiments is the best and surest way to enhance human characters. [tr. by Orun Kim] _<강의> 중에서 최근 미투운동이 보여준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은 야만적 수준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속에서 드러난 한 전도유망했던 정치인의 모습은 언설로 내보이는 개인의 사상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도 보여주었습니다. 선생님의 추도식에서 보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선생님께서 당부하신 사상을 가슴에 담아 감성적 정서로 만들라는 말씀을 다시 새겨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조용히 반성'하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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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편지 70번째(2018.03.09)/죽순(竹筍) |

“땅속의 시절을 끝내고 나무를 시작하는 죽순의 가장 큰 특징은 마디가 무척 짧다는 사실입니다. 이 짧은 마디에서 나오는 강고함이 곧 대나무의 곧고 큰 키를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훗날 온몸을 휘어 강풍을 막는 청천 높은 장대 숲이 될지언정 대나무는 마디마디 옹이 진 죽순으로 시작합니다. 모든 시작 하는 사람들이 맨 먼저 만들어내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짧고 많은 마디입니다. 그것은 삶의 교훈이면서 동시에 오래된 과학입니다. 여러분은 장대숲으로 자라기 위해서 짧고 많은 마디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직면하게 될 숱한 어려움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먼저 마디마디 옹이 진 죽순으로 시작 해야 합니다.” A bamboo shoot has thickly knit nodes on it when it emerges out of the ground and begins to grow into a tree. The thickness of the nodes is the source of the strength of the straight and tall tree the shoot will grow into. The flexible strength of bamboo trees in a grove standing against the hard wind derives from the thickly knit nodes on the shoots. It is these thickly knit nodes that you have to arm yourself with before you set out on a long journey. That is the teaching of life and also of age-old science. So as to grow into a tall tree and become a part of a magnificent grove, you need to have in you a plenty number of stout nodes. Those nodes which will prepare you against all kinds of difficulties you are to meet during the journey.(tr. by Orun Kim) - <2006년 서울대학교 입학식 축사 중에서> 산과 들에 시절 좋은 비가 내립니다. 봄을 재촉하는 반가운 소리입니다. 또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선 3월, 마디마디 옹이 진 죽순을 떠올리며 마음을 견고하게 다잡아 봅니다. 그리고 뿌리가 마디마디 연결되어 서로를 강고히 지탱해 주는 청천 높은 장대 숲을 기약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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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편지 69번째(2018.03.02)/산천의 봄 |

산천의 봄은 흙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옵니다. 얼음이 박힌 흙살을 헤치고 제 힘으로 일어서는 들풀들의 합창 속에서 옵니다. 세상의 봄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박힌 불신이 사라지고 갇혀 있던 역량들이 해방 될 때 세상의 봄은 옵니다. 산천의 봄과 마찬가지로 무성한 들풀들의 아우성 속에서 옵니다. 모든 것을 넉넉히 포용하면서 어김없이 옵니다.
The beginning of a spring in the fields takes place at the surface of the soil. It is heard in the chorus of grassroots breaking the frosty earth to get into the world. It is much the same with a spring in the human society. It arrives here as the frosty earth of distrust is broken and human capacities are released from confinement. It too is heard in the chorus of grassroot people. Spring never fails to come, embracing all the creatures in the world. (tr. by Orun Kim) _<처음처럼> 중에서
끝나지 않을 듯한 혹독한 한파도 봄볕에서는 어쩔 수 없는 듯 봄에게 자리를 내어 줍니다. 평창동계올림픽이 무사히 치러지고 세계 만방에 남북이 하나됨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시간도 가졌습니다. 주변 강대국은 이래저래 심기 불편하겠지요... 산천의 봄이 오 듯 이제 시절인연이 되어 살아생전 버스 타고 영변 약산 진달래꽃 보러 가는 것이 소망입니다.
그 염원 들풀처럼 모아지면 이루어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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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편지 68번째(2018.02.23)/분단의 벽 |

베를린의 슈프레 강가에는 강을 따라 2킬로미터에 달하는 분단시절의 장벽이 남아 있습니다.그 장벽에는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환희를 새긴 수많은 글과 그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글과 그림들은 지난 세월 독일인들이 치러야 했던 분단의 아픔과 희생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나는 장벽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읽어 보았습니다. "사상은 하늘을 나는 새들의 비행처럼 자유로운 것이다." 분단이란 땅을 가르는 것이 아닌 마치 하늘을 가르려고 하는 헛된 수고임을 깨닫게 하는 글입니다. 누군가 한글로 적어두었습니다. "우리도 하나가 되리라." A mile-odd length of the Berlin Wall is preserved along the bank of the Spree. The surface of the wall is filled with drawings and writings that depict the pains of division and the joys of unification. They testify to the agonies and sacrifices of the German people during the years of division. I strolled along the wall, reading some of them. "A man's thought, like a bird's flight, is free." It recounts to me the futility of trying to divide the World. Even if they appear to have divided the land, they will never divide the air. Somebody has written in Korean: "We too will be one."(tr. by Orun Kim) _<처음처럼>중에서 지금 평창에서는 동계올릭픽이 한창입니다. 한쪽에서는 반가운 손님을 맞아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또 한쪽에서는 태극기를 흔들며 강하게 남과 북의 만남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사상은 새들의 비행처럼 자유 로운 것이라 하지만 우리는 아직 높이 올라 멀리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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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편지 67번째(2018.02.17)/인동의 지혜 |

자기 체온 외에는 온기 한 점 찾을 수 없는 독거는 그 추위가 더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지난 가을이래 독거하고 있습니다. 제가 구태여 독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은 추위가 징역살이의 가장큰 어려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도소의 겨울이 대단히 추운 것이긴 하지만 그대신 이곳에는 오래전부터 수만은 징역 선배들이 수십 번의 겨울을 치르면서 발전시켜온 "인동의 지혜"가 무의촌의 토방처럼 면면히 구전되어오고 있습니다. 이 숱한 지혜들에 접할 때 마다 그 긴 인고의 세월 속에서 시린 몸으로 체득한 그 지혜들의 무게와 그 무게 상징 하는 힘겨운 삶이 싱싱한 현재성을 띠고 우리들의 삶속에 뛰어 듭니다. With no source of heat at all other than your own body, the solitary confinement cell is the coldest place in the prisonhouse. I have been staying there ever since last autumn. I do not strive too hard to keep away from it, because I do not regard the cold as the most dreadful thing for a prisoner. The winter cold is very severe in prison indeed, but you can also find there a rich set of "anti-cold recipes" prepared by countless forerunners over a long period of time, just like the folk medicine in an old village without doctor. As I practice some of the recipes, I feel a weighty volume of wisdom entering my life with full relevance. Wisdom attained through ages and ages of shivering, whose volume testifies to so many painful lives. (tr. by Orun Kim) <엽서> 중에서
지구온난화가 무색하지 않을 수 없는 겨울입니다. 간간이 겨울 속에 봄이 찾아 들었다 깜짝 놀라 물러나곤 하는 보너스같은 따듯함이 있었는데 올해는 내리 가문 추위가 과히 동장군의 진면모를 제대로 드러낸 겨울입니다. 길기도 하고 춥기도 한 겨울을 이기는 방법이 각자 다르지만 그래도 이 겨울 추위 이기는 제일은 찬 손끝에 남아 있는 온기 입니다. |
| 샘터찬물 편지 66번째(2018.02.09)/죄수의 이빨 |

생각해보면 비단 이빨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이 곧 우리들의 심신의 일부분을 여기, 저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나누어 묻는 과정이란 생각이 듭니다. 무심한 한마디 말에서부터 피땀 어린 인생의 한 토막에 이르기까지 혹은 친구들의 마음 속에, 혹은 한 뙈기의 전답(田畓) 속에, 혹은 타락한 도시의 골목에, 혹은 역사의 너른 광장에……, 저마다 묻으며 살아가는 것이라 느껴집니다. 돌이켜보면 나의 경우는 나의 많은 부분을 교도소에 묻은 셈이 됩니다. 이것은 흡사 치과의 포르말린 병 속에 이빨을 담은 것처럼 답답한 것이기도 합니다. Come to think of it, perhaps it is not only the teeth that we shed off through the course of life. Life may be just a process of distributing fragments of our minds and bodies to various places and various persons. They can be anything, either just a passing word, or a whole segment of our lives. We keep sowing them in our friends' minds, in a small plot of field, in a dirty alley of a decadent city, or in the open square of History. As for me, I have left a good part of myself in the prisonhouse. It makes me feel cluttered, like a pulled-out tooth put in a formalin bottle. (tr. by Orun Kim)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중에서 무릎을 치게 만드는 글입니다. 생각해보면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에게 나를 남겨두게 되었습니다. 가끔은 무심히 지나온 일들이 그에게 상처로 남은 것을 알고 당황할때도 있고, 지난 날 역사의 광장에 함께 했음을 술안주로 당당히 내놓을 때도 있고, 꼭 서 있어야할 자리에 서지 못했음을 술 한잔으로 자책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고보면 살아가는 일이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늘 긴장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성찰로 자신을 다듬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곳에 나의 일부를 그리고 어떤 모습을 벗들의 마음속에 남기며 살아갈지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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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편지 65번째(2018.02.02)/교(巧)와 고(固) |

자기의 글씨에 대한 스스로의 부족감과, 더러는 이 부족감의 표현이겠읍니다만, 글씨에 변화를 주려는 강한 충동 때문에 붓을 잡기가 두려워집니다. 무리하게 변화를 시도하면 자치 교(巧)로 흘러 아류가 되 기 쉽고 반대로 방만한 반복은 자칫 고(固)가 되어 답보하기 쉽다고 생각됩니다. 교는 그 속에 인성이 담기지 않은 껍데기이며, 고는 제가 저를 기준 삼는 아집에 불과한 것이고 보면 “允執厥中(윤집궐중)” 역시 그 중(中)을 잡음이 요체라 하겠읍니다만 서체란 어느덧 그 “사람”의 성정 이나 사상의 일부를 이루는 것으로 결국은 그 “사람”과 함께 변화, 발전해 나감이 틀림없음을 알겠습니다. Usually it is the discontent with my own style, and at times a strong urge to change it, that makes me reluctant to take hold of the writing brush. Excessively contrived effort for change may lead to misconceived sophistication, while changeless repetition is likely to result in inflexible stagnation. Misconceived sophistication is an empty shell that does not hold my own personality, while inflexible stagnation is a closed trap of confining myself. I should find a way of synthesizing the two properly, following the ancient teaching "允執厥中". Since a man's writing style is the reflection of the man's feelings and thinkings, its changes and developments are supposed to be made in step with the changes and developments of the man himself. (tr. by Orun Kim) t.n. "允執厥中" was the central part of Emperor Yao's advice to Emperor Shun on handing over the throne. It is generally understood to mean "Concentrate on the important matter, avoiding the extremes." <엽서> 중에서 붓글씨를 쓰다 보면 변화에 대한 충동을 절제하기가 무척 힘듭니다. 사람의 외적인 변화보다 심적인 변화를 인지하기 힘들 듯 붓글씨도 밖으로 금새 드러나는 글자의 구조적인 변화에 비해 한획, 한획 그 획 자체에 대 한 변화를 인식하기가 힘듭니다.
“無變而萬變:변함이 없음이 오히려 만가지 변화를 만든다.”이란 말이 있듯 자기 절제를 하지 못해 시도하는 무수한 변화는 오히려 추태(醜態)가 되기도 합니다. 글자의 구조적 변화도 놓칠 수 없지만 더불어 쓰는 이의 마음의 변화, 내밀히 감춰진 획의 변화(획의 질감,무게,두터움...)도 함께 일궈 나가야겠습니다. 결국 붓글씨를 통해 “無以爲化: 없음으로 변화를 이룸.”로 나가는 우직(愚直)한 심성을 길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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