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샘터찬물 466번째 편지] 한울삶 2025. 12. 19. |
[샘터찬물 466번째 편지]
한울삶
신영복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이 곧 우리들의 심신의 일부분을 여기저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나누어 묻는 과정이란 생각이 듭니다.
무심한 한마디 말에서부터 피땀 어린 인생의 한 토막에 이르기까지 혹은 친구들의 마음속에,
혹은 한 뙈기의 논밭 속에, 혹은 타락한 도시의 골목에, 혹은 역사의 너른 광장에....
저마다 묻으며 살아가는 것이라 느껴집니다.
묻는다는 것이 파종임을 확신치 못하고,
나눈다는 것이 팽창임을 깨닫지 못하는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나의 소시민적 잔재가 치통보다 더 통렬한 아픔이 되어 나를 찌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죄수의 이빨’ 중에서
제가 거처하는 방에 우이(牛耳) 선생님의 글씨 한 폭이 걸려 있습니다.
‘한울삶’ 이란 것인데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해 봤어요.
삶 자에서 가장 작은 점 하나 떼어 보자고 그랬더니 싦이 돼요.
싦이란 사전에도 없는 아무것도 아니래요. 확실히 삶은 삶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작은 점 하나 찍으니 ‘삶’ 자가 되어요. 삶에서 점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요?
점 하나는 누구나 뗄 수도, 찍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큰 힘 들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점 하나가 삶이 되고 뒤범벅이 되는 큰일을 하는 건,
마치 작은 씨가 큰 나무로 자라나는 이치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뒤범벅이 삶이 되어 사람을 바꾸고 사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면서
아주 작고 작은 일에 서로 부담감 주지 않고, 소리 없이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올봄의 소원으로 삼고 싶습니다.
전우익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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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65번째 편지] 관계성을 다시 생각함 - 허병철 2025. 12. 12. |
[샘터찬물 465번째 편지]
관계성을 다시 생각함
“생명은 고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관계성의 총체입니다.
생명의 본질인 신진대사(新陳代謝)는 생명이 독립된 완결 구조가 아니라
외부의 물질 및 에너지와 연결된 열려있는 체계임을 보여줍니다”
- 1988. 경주 엑스포 국제학술대회 기조 강연에서 -
“근대사회의 사회론이란 존재론적 세계 인식을 전제한 다음 개별 존재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구성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關係網)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담론』중에서 -
세계 인식의 기본 틀을 고민하셨던 선생님의 통찰이 놀랍습니다.
개별자들의 무한 경쟁을 당연시 한 근대의 약탈적 자본주의는 선생님이 지적하셨듯
존재론적 사고를 그 뿌리로 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탈근대의 과제가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의 전환”이라는
선생님의 철학은 당연한 인식론적 귀결이며,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서 관계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봅니다. 왜 관계성인가 입니다.
아직 공부는 부족합니다만, 서양철학의 주된 흐름은 대개 신(神)에 대한 인간의 관계 설정을
근원으로 하면서 삶의 목적을 ‘행복’에 두는 목적론적 세계관이라 합니다.
그 방법은 신앙이나 이성 혹은 그 절충으로 나뉠 수 있겠지만 목적이 (지상에서든, 천상에서든)“행복 추구”라는
점만은 동일한 것 같습니다. 틀렸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이 논리들이 역사적으로 많이 악용되어 온 것은 사실 같습니다.
선생님이 인용하신 책 중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그 사례들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행복(또는 천국)을 위하여’ ‘선’을 행하고 ‘돈’을 버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돈은 선이며 마땅한 윤리이지만 못 버는 것은 악이자 무능력입니다. 따라서 돈을 벌기 위한 수단들은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었으며, 그 바탕에는 선과 악, 믿음과 불신의 엄격한 구분이 있고, 다름과 차이의 인정보다는
옳음과 틀림의 논리가 깔려있었던 것이죠. 반면 동양철학은 어떨까요.
동양철학에 워낙 혜안이신 선생님께서는 주역 강의에서 최고의 관계론은 “성찰, 겸손, 절제, 미완성, 변방”으로
두시고, 그중 최고는 “겸손”으로 설명하십니다(『담론』‘손때 묻은 그릇’ 편). 이것만 보아도 어떻게 다른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겸손은 사실 관계성에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덕목이 되죠.
따라서 선생님께서는 “산다는 것은 사람과의 만남이고 만남이 연대이며 연대는 관계론의 실천적 버전이다”,
“연대는 탈근대의 전략이 아니라 삶의 철학”이라 정의하신 후 관계의 최고형태는 “입장의 동일함”이라 하십니다.
여기서 “입장의 동일함”이란 “서로를 따뜻하게 해주는 관계, 깨닫게 해주고 키워주는 관계”이므로 선생님의 철학에서
저는 존중이나 배려와 같은 공동체성의 가치를 ‘관계’를 통해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고 본질이자 목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서양의 ‘행복’은 관계와 실천의 결과물이 될 수 있는 것이지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관계”는 “관계망” 속에 있을 때 가능하며, 이런 관계는 인과관계의 순환으로
보아야 하고 “대비”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상대가 있어야 비로소 ‘나’라는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서(聖書)의 신을 자연신(自然神)으로 생각한 스피노자 역시 “신(神)은
그의 피 창조물인 인간이 있음으로써 존재 가능하다”고 하면서 만물의 인과성을 세계의 본질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 바탕 위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관계성이 인간 삶의 목적이자 본질이라 한다면 이 관계를 끊고 사는 사람들(예를 들어 은둔형 생활자나 자연인)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주변에 찾아볼 것도 없이‘이것저것 다 귀찮기도 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가 많은’
저 자신은 도대체 정체가 뭘까요.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지 항상 두렵고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관계성에서 얻어낸 선생님의 통찰을 제 삶에 깊이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하루하루가 깨달음으로 (관계성 속에서) 채워지고, 자기 자신이 변화해가야 그 긴 세월을 견딥니다”
(『담론』‘사일이와 공일이’편)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햇볕이며, 살아가는 이유는 하루하루 깨달음과 공부였다는
선생님 앞에 다만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는 하루입니다.
- 더불어 숲 회원 허병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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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64번째 편지] 한 발걸음 - 강태운 2025. 12. 05. |
[샘터찬물 464번째 편지]
한 발걸음
「한 발걸음」은 변화와 자기 개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목발을 배우면서 이루어진 변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글에서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비단 감옥처럼 실천이 배제된 경우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란 근본에 있어서 한 발걸음이라는 자각을 갖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한 발로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걷고 있는 골목 자체가 특수한 골목입니다.
여러분 자신도 특수한 개인이기도 합니다. 결국 한 발걸음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두 발로 걸어가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공부란 '두 발걸음'을 얻으려는 노력인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두 발 걸음의 완성이 아니라 한 발걸음이라는 자각과 자기비판,
그리고 꾸준한 노력입니다. 완성은 없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1회 완료적인 변화란 없습니다.
개인의 변화든 사회의 변화는 1회 완료적인 변화는 없습니다. 설령 일정한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계속 물 주고 키워 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관계라면 더구나 그렇습니다. 제도가 아니고 움직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고 결정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 『담론』 243쪽에서 -
대학에 들어가 첫 여름방학에 친구들과 제주도를 찾았다. 처음 들른 곳이 함덕 해변이었다.
고운 백사장과 얕은 바다 밑 패사층이 만들어 내는 푸른빛은 차원이 달랐다.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여행의 절반을 그곳에서 보냈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제주를 찾았다.
제주를 떠올리면 푸른 잉크 빛 바다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4·3 사건을 주제로 제주를 떠올리기 시작한 건
작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은 이후부터다. 노벨문학상에 근접한 한국 작가의 최신작을 읽자는
취지에서 선택한 책이었지만, 그 책은 나를 전혀 다른 제주로 데려갔다. 주인공 경하의 발걸음을 빌려
그동안 가보지 못한 제주 중산간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폭설과 강풍을 뚫고 닿은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민간인 학살과 살아남은 가족들이 당한 수난과 싸움의 기록이었다.
이후 제주 4·3 화가로 불리는 강요배의 『풍경의 깊이』를 찾아 읽었다. 그의 그림 <젖먹이> 앞에서 나는 숨이 멎었다.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아이를 그린 <젖먹이>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그림이다.
그 현장, 무장대와 내통한 사람을 찾는다는 빌미로 공권력이 자행한 학살의 장소-북촌 마을을 지도에서 찾으며
나는 제주를 다시 배웠다. 북촌은 함덕 해변 바로 옆, 같은 조천읍에 있었다.
그 아름답던 해변의 그림자 속에 북촌의 비극이 있었다. 나는 그동안 제주를 두 발이 아닌 한 발로 걸었던 셈이었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와 제주시가 후원하는 <제주 4·3 평화기행>에 참여했다. 제주 4·3의 역사적 현장을 둘러보며
평화와 인권, 화해와 상생을 생각하는 여정이었다. 제주 4·3의 아픔은 인간이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가,
국가 폭력이 어떻게 일상을 파괴하는가를 묻는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현재의 자기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다.
제주 4·3을 기억한다. 제주를 두 발로 온전히 걷는 일이다.
- 더불어숲 회원 강태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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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63번째 편지] 유항산(有恒産) 무항심(無恒心) - 주성춘 2025. 11. 28 |
[샘터찬물 463번째 편지]
유항산(有恒産) 무항심(無恒心)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언제부터인가 만기 인사를 나누면서
'이제 출소하면 마음잡고 다시는 이곳에 들어오지 말아라.'
라는 상투적인 인사말을 입에 올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을 잡으라.’라는 말 대신에 ‘자리를 잡으라.’라는 말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자리가 먼저인지 마음이 먼저인지 알 수 없지만 너나없이 마음 붙일 자리가 없는 사람들이고 보면
아무래도 우선 자리 하나가 무엇보다 절실하리라고 생각되었습니다.
한 포기 꽃나무나 마찬가지입니다. 설 땅이 그리운 법입니다.
무항산자 무항심(無恒産者 無恒心),
항산(恒産)이 없이 항심(恒心)이 있을 수 없다는 옛말이 바로 그런 뜻이었습니다.”
신영복 기고문 <신동아 1996년 11월호> 권두수필 중에서
어느덧 2025년 중간쯤 있었던 대통령 선거가 벌써 기억의 너머로 가는 듯합니다.
어김없이 대통령 선거에 등장하는 핵심 슬로건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 입니다.
때로는 “먹사니즘”, “창조경제”, ”못 살겠다.”라고 불렸다 하더라도 결국 같은 이야기입니다.
유항산(有恒産) 해결을 위해 나섰다고 합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자 한다면 <유항산의 약속>을 해야 한다는 것이 지금의 사회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떠오르는 신영복 선생님의 글귀 중 하나가 “유항산(有恒産) 무항심(無恒心)”입니다.
남은 직장 생활을 생각할 때 유항산의 무게를 크게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항심을 떠올려 봅니다.
“얼마만큼의 소유가 항산(恒産)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항산이 왜 항심(恒心)을 뒷받침해 주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입니다.
항산이 항심을 지탱해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항산을 마련하는 일보다
항심을 지켜주는 문화를 먼저 고민해야 하는 역순(逆順)을 밟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위 기고문에서 인용>
지난 대선에서 어느 경제학자는 “경제성장은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사회에 항산이 있음에도 “무항산 무항심”을 강요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단지 대선 주자들의 경제공약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방향에 관한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항심을 지켜주는 문화는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더불어숲 회원 주성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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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62번째 편지] 한 발걸음 - 이도환 2025. 11. 21. |
[샘터찬물 462번째 편지]
한 발걸음
「한 발걸음」을 함께 읽기로 하겠습니다. 이 글의 핵심은 이론과 실천의 통일입니다.
'한발'이란 실천이 없는 독서를 비유한 표현입니다. 감옥에서는 책 읽고 나면 그만입니다.
무릎 위에 달랑 책 한 권 올려놓고 하는 독서, 며칠 지나지 않아서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시루에 물 빠져나가도 콩나물은 자란다고 하지만,
사오십 페이지를 읽고 나서야 이미 읽은 책이란 걸 뒤늦게 알아차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책 제목마저 기억 못 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독서가 독서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실생활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독서이기 때문입니다. 화분 속의 꽃나무나 다름없습니다.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발전 과정에서 '실천'이 제거된 구조입니다.
실천이 없다는 사실은 한 발 보행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담론』 226쪽 -
실천-세상을 제대로 본 자가 사는 삶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이라고 설파하셨던 선생님은 공감이 먼저고
다음이 애정이라면 최종적으로는 실천이라고 하셨다.
그럴 때 자유의 경지를 누릴 수 있다고 본 것이리라.
몸에 익은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것이 자연스러울 때는 무의식 속에서도 행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 ‘숟가락이나 젓가락질을 내가 이렇게 해야지’하고 생각하면서 하지는 않는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익숙해지다 보니까 이제는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실천도 이와 같다. 생각하기에 앞서 내 손이 내 발이 내 몸이 먼저 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시간과 공간의 힘이 더해져야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김수영은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푸른 하늘을」에서)라면서, 노고지리가 하늘을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는 것은 그냥저냥 이뤄지지 않았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바람에 기대어 공기의 저항을 이겨내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날갯짓으로 이뤄낸 시간과 공간의 보상이다.
이른바 자기 고독과의 지난(至難)한 싸움으로 일군 결과물로, 이런 충분한 자기희생으로 얻어낸 것이 마침내 자유이며 혁명이라고 말한다.
북해의 물고기 곤이(鯤鮞)가 한번 날갯짓을 하면 구만리나 날아갈 수 있는 대붕(大鵬)으로 변했다는 ‘화이위조(化而爲鳥)’,
지금 당장 보이는 눈앞의 이익에 매몰되지 않고 먼 훗날을 기약하며 온갖 고행을 무릅쓴 이후 자유로운 비상을 한
‘조나단(Jonathan)’, 이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신을 짓누르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 마침내 이뤄낸 일들을 상징한다.
여기서 ‘새의 날갯짓’은 변화와 발전은 한순간에 일어나지 않으며 발로 뛰어가면서 차곡차곡 실천한 과정의 비유이리라.
우리는 오늘도 얼마나 많은 ‘날갯짓’을 하고 있는가를 성찰해 볼 일이다.
-이도환(영남지역작은숲지기)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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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61번째 편지] 신발 한 켤레의 토지에 서서 - 서기용 2025. 11. 13. |
[샘터찬물 461번째 편지]
신발 한 켤레의 토지에 서서
추유황색(秋有黃色). 들국화가 겨울 옷매무새를 채비하느라
금빛 단추를 여민다는 고인(古人)들의 추정(秋情)은 묵향 바랜 시편에나 남았을 뿐,
농약과 화학비료에 얼룩진 벌판에 허수아비는 비닐옷을 입어 풍우를 근심 않는다던가...
가까이 국화 한 송이 없어도 가을은 다만 높은 하늘 하나만으로도
일상의 비좁은 생각의 궤적을 일탈하여 창공 높은 곳에서 자신의 주소(住所)를 조감하게 되는 계절입니다.
사과장수는 사과나무가 아니면서 사과를 팔고,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 정직을 파는 세로(世路)에서,
발파멱월(撥波覓月) 강물을 헤쳐서 달을 찾고, 우산을 먼저 보고 비를 나중 보는 어리석음이 부끄러워지는 계절ㅡ
남들의 세상에 세 들어 살 듯 낮게 살아온 사람들 틈바구니 신발 한 켤레의 토지에 서서
가을이면 먼저 어리석은 지혜의 껍질들은 낙엽처럼 떨고 싶습니다.
군자여향(君子如響), 종소리처럼 묻는 말에 대답하며 빈 몸으로 서고 싶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발 한 켤레의 토지에 서서’ 중에서
가을 추수를 마치고 복숭아나무랑 포도나무에 퇴비를 뿌렸습니다.
한해 고생한 나무들 하나하나에 고맙다는 말 건네며 정성스레 뿌려주었습니다.
내년에도 올해처럼만 도와주기를 기원하면서 말입니다.
점심때는 너른 마당에서 배차전을 부쳐 이웃집 형님과 즐겁게 나눠 먹었습니다.
배차전을 먹다 앞산을 유연히 바라보았습니다.
단풍 든 도토리나무 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잎들을 모두 떨어낸 도토리나무들은 이제 조용히 겨울 햇살과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일 것입니다.
이제는 나도 수많은 SNS의 알림과 지키지도 못할 허황한 소음들에 귀를 닫고
조용히 내면으로 침잠(沈潛)하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습니다.
뜨문뜨문 메아리로 울리는 고요한 산처럼 자신의 소리를 줄이고
이웃들과 자연의 진실한 소리에 가만히 귀를 열고 대답하는,
여유롭고 여운(餘韻)이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 더불어숲 회원 서기용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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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60번째 편지] 정체성은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 생성 -노병준 2025. 11. 07 |
[샘터찬물 460번째 편지]
정체성은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 생성
모든 존재는 고립된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관계 속에서 놓여 있는 것이며 그러한 관계 속에서 비로소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정체성이란 내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조직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입니다. 정체성은 본질에 있어서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 생성(being)입니다. 관계의 조직은 존재를 생성으로 탄생시키는 창조적 실천입니다. 그리고 생성은 화화(和化)의 경로를 따라 탈주하는 것입니다. 탈주는 끊임없는 해체와 새로운 조직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관계’를 일반적 의미로 사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관계가 과연 존재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사물들이 맺고 있는 얼개 자체에 존재성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어떠한 사물이든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존재를 관계라는 객관적 얼개 속으로 해소시키는 것 역시 관념론이 됩니다.
<담론> 신영복, 돌베개
제 일터에는 소수의 사무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인력과 고객을 대면하는 현장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다수의 인력이 근무합니다. 사무 행정 업무는 주로 사업이 원활히 추진될 수 있도록 일터의 인력과 시설 등을 관리하는 것이지만, 관리는 지휘부의 역할뿐만 아니라 현장에 대한 지원이라는 기능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경험상 사무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일부 인력은 자신의 정체성을, 현장 근무자의 상위에서 지휘하는 관리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장 근무자들을 통제와 관리받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상사와 부하의 관계처럼 근무 인력 간 업무와 역할의 차이임에도 수평적 관계가 아닌 상하의 수직적 관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새로운 사업장에서 근무하게 될 때마다 사무 행정 근무자들에게 기존의 관리자 역할을 넘어 현장 근무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자 역할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항상 느끼지만, 저부터 상사이자 관리자의 위치에서 기존의 관계들을 해체하고 새롭게 조직해야 그들도 스스로 지원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올해 근무 기간이 끝날 무렵이면 사무실과 현장에서 같이 일해 준 동료들에게 함께 나눈 우정과 경험을 추억으로 간직하며 고마움을 전해야겠습니다.
[더불어숲 회원 노병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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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59번째 편지] 새끼가 무엇인지... 김한식 2025. 10. 31. |
[샘터찬물 459번째 편지]
새끼가 무엇인지...
참새집에서 참새 새끼를 내렸습니다.
날새들 하늘에 두고 보자며 한사코 말렸는데도
철창 타고 그 높은 데까지 올라가 기어이 꺼내 왔습니다.
길들여서 데리고 논다는 것입니다.
아직 날지도 못하는 부리가 노란 새끼였습니다.
손아귀 속에 놀란 가슴 할딱이고 있는데 사색이 된 어미 참새가
가로세로 어지럽게 날며 머리 위를 떠나지 못합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새끼가 무엇인지, 어미가 무엇인지 중에서
제가 다니고 있는 학교에는 터줏대감이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학교 안팎을 주름잡는 고양이가 있습니다.
때로는 둘이, 때론 혼자 어슬렁거리며 다니는 모습이 여기가 내 구역이라 하는 것 같습니다.
매일 비가 내리는 어느 날, 비를 맞고 다니는 고양이를 본 자치회 학생 중 몇몇이 교장실을 찾아와
고양이가 비를 피할 수 있는 집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목공 시간에 간단한 목 작업을 배운 친구들이라 당장 목공실로 갔습니다.
자투리 목재를 이용해 개집 비슷한 모양을 만들고,
재활용장에서 먹이통과 물통을 구해 금방 그럴듯한 살림집을 만들어 고양이가 잘 다니는,
사람들 눈에는 잘 띄지 않는 곳에 집을 설치했습니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매일같이 고양이 집 주변을 서성이기 시작했습니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고양이가 집에 들어가 있는지, 먹이는 줄었는지.
물 먹는 걸 봤다는 친구는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본 듯이 자세하게 그 장면을 토해내었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맨 마지막 엽서 내용은 참새 새끼를 내려 사동 방으로 데려온 이후의 일에 대한 에피소드입니다.
감옥 안에서 심심하고, 외로웠던 사람들은 심심풀이로,
또는 다른 사동 사람들에 의해 참새구이가 될 것을 막기 위해서 날새를 내려 사람들의 터전으로 들였습니다.
참새를 길러보겠다는 마음입니다. 기른다는 건 소유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3사늠들’ 것이 아닌 우리 방 소유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 삶의 터전으로 다른 동물을 끌어들이는 행위입니다.
새의 터전은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감방 안으로 바뀌었습니다. 학교 아이들은 처음부터 소유에 관한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단지 고양이가 좀 더 아늑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돌보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돌봄은 고양이의 생활 방식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이 같이 사는 방법의 출발임을 가르쳐주지 않아도 실천해 낸 아이들이 대견하기만 합니다.
사람 사이의 일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신영복 선생님께서 화동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공존의 전제가 다름에 대한 존중, 상대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름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난무하는 이 시기에 길고양이에게
작은 쉼터를 제공한 아이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퍼져나가기를 기대해 봅니다.
-더불어숲 서여회 회원 김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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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58번째 편지] 지남철 - 조이영 2025. 10. 24. |
[샘터찬물 458번째 편지]
지남철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어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영복의 『담론』(돌베개, 2015) 中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으로 나이 들어가기 위해 오늘도 선생님의 책을 펼칩니다.’
지금은 폐간되었지만, 더불어숲 소식지 通 41호(2019년) ‘내가 만난 신영복’에 올렸던 제 글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그때를 떠올리며 그간 나는 얼마나 가지 뻗었나, 얼마나 생각의 껍질을 벗었나,
나의 앎이 머리에서 시작해 얼마나 내려갔나 생각하다 보니 아직도 많이 흔들리고 작은 바람에도 일렁이는 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되었는가? 그런 어른이 되었는가?
누군가 묻는다면 쉽게 답할 수 없음에 고개 숙이게 됩니다.
하지만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고 합니다.
떨리는 마음이 있다면 나는, 살아 있는 지남철입니다.
지남철은 현재의 속도나 남은 거리가 아니라 방향을 알려줍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면 느리게 가도, 아무리 멀어도 언젠가 도착합니다.
각자의 방식대로, 나름의 속도대로 자박자박 걷다 보면 본인이 닿아야 할 그 시간에 도착합니다.
그러니, 오늘도 걷습니다. 더불어 함께 하는 숲길을.
-더불어숲 회원 조이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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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57번째 편지] 자본주의를 보는 인식의 시작점 -정연경 2025. 10. 17 |
[샘터찬물 457번째 편지]
자본주의를 보는 인식의 시작점
공부란 갇혀 있는 문맥을 뛰어넘는 탈문맥(脫文脈)입니다.
한 사회가 어떠한 문맥에 갇혀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인간 이해 방식을 주목해야 합니다.
어느 시대든 그 시대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의 위상이고 인간의 사회적 정체성(正體性)입니다.
(인용: 교재 담론(pdf) 21장 상품과 자본)
상품과 자본은 경제학 개념입니다만 우리의 강의에서는 그것을 인문학 속으로 끌고 와야 합니다.
인문학이라고 한다면 결국 인간의 문제, 인간의 삶의 문제를 중심에 놓는 것입니다.
우리는 후기 근대자본주의 사회의 한복판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의 삶이 영위되는 무대이면서,
그 체제 속의 사람들을 재구성하는 공작실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상품과 자본’은 인간과 세계를 아울러 바라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용; 담론(돌베개 출판.346-347쪽)
자본주의를 대하는 인식의 진화
1. 자본주의의 반대말은?
1910년대 조선반도에 자본주의란 단어가 처음 소개되었는데
유교적 교양을 갖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자본주의’와 ‘자본’의 개념 구분이 잘 안되었나 봅니다.
자본이 권력인 기업(주식회사)에서 의사결정이 ‘1주(株)1표(票) 주의’라는 게 의아했다 합니다.
민주주의 정치제도에서는 ‘1인1표주의’고 협동조합이나 계모임, 사회단체 등도 1인1표인데
이놈의 자본주의는 인본주의(人 本 主 義 )와 반대된다고 생각했다 합니다.(역사학자 전우용의 유튜브 에서 참고)
2. ‘자본과 임노동(賃勞動)의 생산관계’보다 더 다가왔던 ‘자본가 지배구조’
러시아혁명, 1차세계대전을 보고 전승국 일본 또한 제국주의의 한통속임을 1919년 3.1운동 탄압과정에서 절감하고,
독립지사들이 모여 상해 임시정부 건립후 대한민국 헌법 원전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였습니다.
그 중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는
제1조 민주공화제서 ‘자본가 독재’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닌 인민이 지배하는 공화국을 만들려는
우리 건국 선열들의 의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 반봉건(半封建)과 제국주의를 겪는 당시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현상만 보일 뿐
그 뼈대와 토대가 잘 보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3. 마르크스 이후 자본주의를 보는 시각의 변화
좀바르트와 베버는 자본주의는 자본가가 경제정치사회 전반을 총괄적으로 지배하는 제도이고
관료제와 상비군(군대와 경찰)이 자본주의를 지켜주는 토대임을 인정합니다.
그람시는 상부구조도 자본가가 ‘헤게모니’를 장악해 노동자의 뇌마저 자본가가 주입한 프레임에서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스라파는 임노동도 상품으로 치환하여 자본주의를 “상품에 의한 상품생산”으로 정의합니다.
즉 노동이 없어도 기계와 자본이, 이제는 정보 자체가 스스로 가치를 생산한다고 봅니다.
과연 그럴까요?
4. 바로 현재로 돌아와 우리의 인식은...
마르크스는 “해석하지 말고 실천(praxis)하라.”라고 했는데 인식 또한 ‘실천적 의지’로 진화됩니다.
이 점에서 백낙청 선생의 말을 붙혀볼까 합니다.
“(요새 ‘한강’같은 젊은 문학인들을 보면) 나아가 '지식사회'가 되고 '정보화사회'가 된다고 해서
노동이 근절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됨을 인식한다. 물론 이런 인식이 누구에게나 저절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노동이 근절될 수 없다는 인식은 한편으로 정보화의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궂은일이 세계의 다른 지역이나 국내에
외국인 노동자등 눈에 덜 뜨이는 영역으로 옮겨지고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요구한다.
다른 한편으로 정보화의 진전이 자본 위주로 진행될 때 정보와 인간노동의 분리 또한 위험 수준을 초과하여 인류의 다수가
부적격품(triage)으로 폐기처분되는 문명궤멸의 날이 올 수 있다는 위기감각도 필요하다.
정보가 진행될수록 노동자와 지식기술자를 겸한 인구가 늘어나게 마련이며 자본의 규모가 커질수록 진정한 노동계급은
항산이 없어 항심도 결한 적빈자 집단이 아니라 가진것이 아주 없지 않으면서 항심을 잃을 정도로 많지도 않은 -
동시에 궁핍화의 위협을 무엇보다 항심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저항하는 - 층으로 구성된다 .
다시 말해 계급운동론자들에 의해 흔히 전략적 연합체로만 인식되는 '민중'이 실은 목하 형성중인 전지구적 노동계급의
실체인 것이며, 이들의 전면적 산업노동자화나 절대 빈곤화가 아니라 오히려 노동하는 인간으로서의 자기 인식
을 수반하는 지식화와 실력양성이 해방의 관건이 되는 것이다.”
-더불어숲 회원 정연경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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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56번째 편지] 어느 고등학생의 질문 - 배기표 2025. 10. 10 |
[샘터찬물 456번째 편지]
어느 고등학생의 질문
안녕하세요, 남해의 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1학년 학생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독서 토론과 글쓰기' 교과목 시간에 신영복 선생님의 "티브이는 무대보다 못하고 무대는 삶의 현장에 미치지 못합니다."라는 기행문을 읽고,
토의를 하는 활동을 진행하던 중 한 가지 의문이 들었으나, 저희 학생들 수준에서는 이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어 자문하고자 연락을 드립니다.
우선 신영복 선생님께서 이 글을 통해 어떤 말을 하고자 하셨는지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가장 본질적이고 직접적인 인간의 경험과 관계, 살아 있는 현실 그 자체를 표현하는 삶의 현장. 배우들이 직접 행동하고 목소리를 내는 현장성 있는 표현 공간이지만,
여전히 연출과 각본에 의해 제한된 세계인 무대. 그리고 삶을 간접적으로 비추는 매개된 매체, 즉 기록이나 편집을 통해 보여주는 이차적 재현물인 티브이.
각각의 대상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위와 같이 이해할 수 있었고, 저희 학생들 역시 충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어 굉장히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저희 학생들은 신영복 선생님의 어떤 경험이 위와 같은 명제와 깨달음으로 귀결되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중간 과정을 거쳐 위와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되신 건지, 기행문만을 읽고서는 사실 연결 짓기가 힘들었습니다.
하여 1학년 학생들을 대표하여 신영복 선생님께서 디오니소스 극장을 방문하신 경험과 삶의 현장, 무대, 티브이를 활용하여 명제를 도출해 내신 중간 과정을 여쭙고 싶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변
신영복 선생님의 『더불어숲』을 깊이 있게 읽고 핵심적인 질문을 던진 남해고등학교 1학년 학생 여러분, 반갑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정확히 이해하셨고,
그 깨달음이 도출되는 '중간 과정'을 묻는 말은 매우 구체적이고 높은 수준의 질문입니다.
여러분이 궁금해하는 명제, 즉 "TV는 무대보다 못하고 무대는 삶의 현장에 미치지 못하는 법입니다"라는
깨달음이 디오니소스 극장 경험을 통해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그 연결 고리에 관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임을 감안하고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세 가지 층위의 관계 (The Hierarchy)
학생 여러분이 이미 정확히 파악했듯이, 신영복 선생님은 세 가지 대상의 '현장성(직접성)과 진정성을 기준으로 그것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가) 삶의 현장: 가장 본질적이고 정직한 실재. 살아있는 사람과 관계가 실존하는 곳.
(나) 무대: 배우의 육성과 행위가 직접 전달되는 현장성이 있음. 연출과 각본에 의해 제한된 세계 (가상의 이야기).
(다) TV: 기록과 편집을 거친 이차적 재현물(간접적 매개, 현장성 부재).
이처럼 무대는 TV보다 낫지만 (현장성), 삶의 현장보다 못함. (진정성/본질성).
신영복 선생님은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무대가 가진 힘을 인정하면서도, 무대가 가진 한계를 성찰하며 최종 결론인 '삶의 현장'으로 나아갑니다.
2. 깨달음의 중간 과정: 무대의 한계와 배우의 통곡
선생님의 최종 명제가 도출되는 결정적인 중간 과정은 바로 '무대 위의 삶'이 '현실의 삶'을 대신할 수 없다는 자각입니다.
이 지점을 이해하는 데는 선생님의 또 다른 저서인 『나무야나무야』에 나오는 '통곡하는 배우' 이야기가 강력한 보충 설명이 됩니다.
“관객들의 뜨거운 갈채와 함께 막이 내리면 그는 홀로 분장실에 남아 통곡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당신은 그의 통곡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갈채는 그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의 주인공에게 바치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에 그는 통곡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왜 그와 같은 삶을 살지 못하고 무대 위의 그림자를 살고 있는가?’ 이것이 통곡의 이유였다고 하였습니다.
텅 빈 분장실에 홀로 남아 쏟아내는 그의 통곡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통곡은 그를 인간으로 세워놓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진정한 지식과 정보는 오직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으며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서서히 성장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무야나무야』 <진정한 지식과 정보는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언급하는 '통곡하는 배우'는 바로 이 무대의 한계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갈채는 그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의 주인공에게 바치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에 그는 통곡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왜 그와 같은 삶을 살지 못하고 무대 위의 그림자를 살고 있는가?’ 이것이 통곡의 이유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배우의 통곡은 다음 두 가지를 분명히 증명합니다.
무대는 그림자다: 무대 위의 삶이 아무리 진실해 보여도, 그것은 진짜 주인공의 그림자(재현)'일 뿐입니다.
배우가 진정으로 원하고 갈망하는 것은 '무대 위의 갈채'가 아니라, 드라마 속 주인공이 겪는 '삶의 현장' 그 자체입니다.
3. 결론 사람과의 관계, 현실로 돌아가기
결국 선생님은 무대에서 발견한 '환상(가상)의 한계'를 통해,
우리에게 가장 정직하고 의미 있는 배움과 성장이 일어나는 곳은 꾸며낸 무대나 편집된 TV가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서서히 성장하는' 진짜 삶의 현장임을 재확인합니다. 무대는 삶의 현장에 미치지 못합니다:
무대가 아무리 감동을 줄지라도, 그 감동은 현실의 고통과 진실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지식과 가치는 오직 현실 속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선생님의 철학이 이처럼 '무대의 한계'를 통해 명확해집니다.
훌륭한 질문과 깊은 성찰을 보여준 남해고 학생들의 건투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앞으로도 '삶의 현장'에 발 딛고 서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멋진 학생들로 성장하리라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더불어숲 이사 배기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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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55번째 편지] 사랑의 비약 -서석빈 2025.10.03 |
[샘터찬물 455번째 편지]
사랑의 비약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뛰어넘는 비약입니다.
모든 사랑은 비약으로 이어지고
비약은 다시 비상으로 날개를 폅니다.
한사람에 대한 사랑은
그 한 사람에 머물지 않고
그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으로 이어지고
어느새 아름다운 사회와
훌륭한 역사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사랑은 비약입니다.
- 신영복의 서화중에서 -
사랑, 주제와 변주
파헬벨의 ‘캐논‘, 모리스라벨의 ’볼레로‘는 단순한 주제 멜로디에서
템포와 리듬과 화성이 변형되면서 웅장하고 아름다운 주제와 변주곡이 되었다.
‘ 반짝반짝 작은 별~.‘ 작은 별 변주곡’은 짧고 명랑한 멜로디에
다채로운 변형과 꾸밈을 더해 어린이와 어른 모두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다.
사랑도 삶의 주제와 변주로 사람이 사는 동안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면서 삶을 장식한다.
어린이가 품었던 순수한 사랑이, 삶을 살아가면서 세파에 변형되고 비뚤어지지만, 그 원형은 변하지 않는다.
사랑의 변주 1, 강약
이슬처럼 연약하고 작아서 후 불면 흩어져 버리고, 허망한 연기 같아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러다, 가슴에 스며들어 찌꺼기를 분해하고 씻어낸다.
어느새, 우레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폭포수가 되고, 장대한 강물이 되어 세상의 지형을 바꿔버린다.
아, 그 사랑의 위력으로 혼탁한 세상을 맑게 씻어내기를 희망한다.
사랑의 변주 2, 색깔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같다.
첫사랑의 핑크색에서, 강렬한 장미색, 어머니의 우유색, 백발의 흰색 유리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유리 조각마다 다양한 삶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사랑의 아픔과 은밀한 기쁨이 새겨져 있고,
아버지의 엄한 말씀과 누나의 꾸지람과 친구의 모진 충고와 아내의 걱정스러운 눈빛과 잔소리가 새겨있다.
자식의 등 뒤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노인의 모습도 보인다.
그 유리 조각들이 어둠과 빛을 받아 성당 내부를 비추듯이 삶의 명암을 장식한다.
사랑의 변주 3, 템포
찰나에 영혼이 부서지고, 하루살이같이 촛불에 달려들어 자신을 불태우기도 한다.
그러다, 시간을 멈춰 세우고 한없이 소망하며 기다린다.
어깨에 남의 멍에를 이고 평생의 인고를 견딘다.
사랑은 찰나에서 영원으로 이어진다.
전 사랑에 빠졌어요.
치료되고 싶지 않아요.
계속 아프고 싶어요.
- 영화 「일 포스티노」 중에서
사랑의 변주 4, 화성
사랑은 홀로 할 수 없다. 두 사람이 부르는 하모니이다.
상대방이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내는 음에 나의 소리를 얹으면서 하모니를 이룬다.
사랑은 은밀한 암호로 전달되며, 귀와 마음을 여는 이만이 그것을 느낀다.
그 두 사람의 사랑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합창으로 세상에 울려 퍼진다.
가까운 미래에 휴머노이드 로봇이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을 대체할 것이다.
아마, 사랑도 정보화되어, 로봇이 사람처럼 무한한 사랑의 변주를 생산하고 유통시킬 것이다.
그러나, 그 변주의 주제를 이루고 있는 사랑은 만들지 못한다.
사랑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생명에 담겨서 엄마 가슴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람의 증표이다.
침대에서 자장가로 불러주던 ‘작은 별’ 멜로디가, 백발이 된 노인의 가슴속에서 여전히 맴돌고 있다.
도돌이표가 있는 변주곡처럼, 사는 동안, 사랑은 다른 형태로 계속될 것이다.
사랑하기를 멈추면, 숨을 멈추듯 삶의 노래도 끝이 난다.
- 더불어숲 회원 서석빈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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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53번째 편지] 유수봉하해(流水逢河海) 허 병철 2025.09.19 |
[샘터찬물 453번째 편지]
유수봉하해(流水逢河海)
“흐르는 물은 바다를 만난다”
징역살이에서 느끼는 불행 중의 하나가 바로 한 발 걸음이라는 외로운 보행입니다.
실천과 인식이라는 두 개의 다리 중에서 ‘실천의 다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실천 활동을 통하여 외계의 사물과 접촉함으로써 인식을 가지게 되며
이를 다시 실천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그 진실성이 검증되는 것입니다.
실천은 인식의 원천인 동시에 그 진리성의 규준이라 합니다.
이처럼 ‘실천→인식→재실천→재인식’의 과정이 반복되어 실천의 발전과 더불어
인식도 감성적 인식에서 이성적 인식으로 발전해 갑니다.
그러므로 이 실천이 없다는 사실은 거의 결정적인 의미를 띱니다.
그것은 곧 인식의 좌절, 사고의 정지를 의미합니다.
흐르지 않는 물이 썩고 발전하지 못하는 생각이 녹슬 수밖에 없는 이치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한 발 걸음’중에서 (1984.3.1.)
항상 실천의 문제를 고민하셨던 선생님으로부터 다시금 그 말씀의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
‘실천’이 어려운 엄혹한 감옥에서도 선생님은 ‘그럼에도’ 실천이 되어줄 ‘한발 목발’ 을 찾으셨습니다.
선생님이 처음 목발로 삼은 것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 즉 ‘과거의 실천’ 이었습니다.
그럼으로써 감옥이라는 실천 부재의 공간은 선생님에게 오히려 훌륭한 성찰과
실천이 있는 배움의 공간으로 승화될 수 있었습니다.
인식과 실천의 변증법은 ‘관계’와 더불어 선생님의 주요한 사상을 이루는 핵심 중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 스스로를 돌아보면 현상을 직관으로 보고, 감성으로 받아들이며 선험적인 이성과
지성의 사용은 더디 하면서 실천에는 게으르지 않았나 반성하게 됩니다.
한나 아렌트는 자유로운 인간의 근본적 활동을 ‘활동적인 삶’ 에서 찾고 있으며,
이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인간의 '조건’ 이 됩니다.
실천이 없는 삶이란 고립될 수밖에 없으며,
가장 회피해야 할 습성이란 점에서 두 분의 견해는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인식하는 ‘행위’ 자체도 쉬운 일은 아니므로 인식을 위한 ‘실천’으로서
유의미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만, 여기서 선생님은 ‘인식→인식→인식...의 과정은
현실의 튼튼한 땅을 잃고 공중으로 지극히 관념화해 간다’라고 지적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선생님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인식과 실천을 함께 하면서 서로 만나는 관계성 속에서
더 높이 고양해 나가는 것이 진리성을 찾는 올바른 태도라는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멈춰있는 데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인식이 자신의 목발(실천)을 찾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하며,
물은 반드시 ‘흐르는 물’ 이어야 쓸모없이 버려지거나 증발하지 않고 바다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드넓은 바다에서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더불어숲 회원 허병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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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51번째 편지] 관계의 조직 - 심은희 (2025.09.05) |
[샘터찬물 451번째 편지]
관계의 조직
‘관계의 조직’이란 의미를 조금 더 설명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관계론이라는 일반적 개념으로 존재론과 대비해 왔습니다.
모든 존재는 고립된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관계 속에 놓여 있는 것이며
그러한 관계 속에서 비로소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정체성이란 내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조직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입니다.
정체성은 본질에 있어서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 생성입니다.
관계의 조직은 존재를 생성으로 탄생시키는 창조적 실천입니다.
그리고 생성은 화화(和化)의 경로를 따라 탈주하는 것입니다.
탈주는 끊임없는 해체와 새로운 조직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관계’를 일반적 의미로 사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관계가 과연 존재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사물들이 맺고 있는 얼개 자체에 존재성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어떠한 사물이든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존재를 관계라는 객관적 얼개 속으로 해소시키는 것 역시 관념론이 됩니다.
신영복 『담론』 198쪽
우리가 사용해 온 관계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선생님은 관계의 정확한 의미를 ‘관계의 조직’이라고 하셨습니다.
개인이란 존재하지 않고, 모든 존재는 관계라고 하지만
선생님은 모든 존재를 관계라는 객관적 얼개 속으로 해소시키는 것을 관념론이라고 비판하셨지요.
관계는 고정불변의 존재도, 관계망 그 자체도 아닌 ‘관계의 조직’이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구성이란 말보다 조직이란 말을 더 선호하신 듯합니다.
씨줄과 날줄로 이루어진 관계망을 보다 잘 표현하고,
단단한 주체의 능동성을 함의하는 데 더 적합해 보입니다.
데리다가 사랑 없이는 해체가 불가능하다고 했듯 해체 없이는 조직도 불가능합니다.
조직의 일원으로 일하면서 가만히 있으란 요구에 응하는 것은,
동(同)에 기초하여 고정불변의 존재로 존속(存續)하는 것입니다.
기존의 관계를 해체하고 우리 자신을 전체 맥락 속에 새롭게 위치시켜야 존재가 생성될 수 있습니다.
화(和)는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하자는 똘레랑스입니다.
이는 하나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궁극적으로는 화화(和化), 변화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체적으로 수많은 관계를 재구성하고 해체하면서 탈주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낡은 것에 대해 냉철하게 각성하고 그것으로부터 과감히 결별’하며 변방성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조직해 내고 키우려고’ 합니다.
우리는 씨를 뿌리는 심정으로 ‘졸렬하지만 성실한 삶’을 부단히 살아가야 합니다.
꽃과 열매는 먼 훗날, 먼 미래의 것입니다. 이 또한 ‘관계의 조직’입니다.
더불어숲 회원 심은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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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50번째 편지] 무불치 無不治 - 주성춘 (2025.08.29) |
[샘터찬물 450번째 편지]
무불치 無不治
무불치는 혼란과 난세가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란 뜻으로도 읽습니다.
무위로써 실천해야 평화로운 세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기도 합니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 와
같은 뜻입니다.
- 신영복 『담론』중에서

지난 6월, 오랜 지기들과 북녘이 바로 보이는 비 맞는 연미정에 올랐다.
신영복 선생님이 국토여행의 마지막 엽서를 들고 오른 연미정(燕尾亭)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한 줄기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 데
그 모양이 마치 제비 꼬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 조선시대 연미정은 삼남 지방에서 올라온 조운선이 예성강(개성)과 한강(서울)으로
올라가기 위해 밀물 때를 기다리던 곳이었다.
삼남 지방에서 출발한 조운선은 '배들의 무덤'으로 악명 높은 진도의 울돌목과 태안반도의 안흥량,
강화해협의 손돌목의 물길을 잘 아는 노련한 뱃사공에 의해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비극의 현대사 이후 연미정 아래는 철망과 총을 든 군인이
북녘을 매섭게 지켜보는 곳이자, 누구도 도착해서는 안 되는 곳이 되었다.
몇 주전 들려온 소식은 그날 강너머에서 바람을 타고 들려오던 괴이한 소음이 멈췄다고 한다.
이 하나의 소식이 연미정 철망 아래 평화가 밀물을 타고 한강과 예성강으로 올라갈 시기가
가까워져 오고 있는 징조일 수는 없다.
언제 손돌목을 만나도 이상하지 않은 시대.
험준한 국제관계와 역사적 고난으로 인해 여전히 치열한 강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겸손과 평화”가 강물의 본성임을 일깨워 주시던 선생님의 엽서를 다시 꺼내 본다.
無不治,
“평화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평화가 길입니다.”
- 더불어숲 회원 주성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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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49번째 편지] 돕는다는 것은 그 정이 같아야 2025.08.22 |
[샘터찬물 449번째 편지]
돕는다는 것은 그 정이 같아야
‘함께 맞는 비’는 돕는다는 것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또 물질적인 경우에도 그 정이 같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처음 이 글을 서예작품으로 전시했을 때 반론도 없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우산을 들어 주는 것이 돕는 것이지 있는 우산을 접고 함께 비를 맞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비를 맞으며 걸어간 경험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혼자 비를 맞고 가면 참 처량합니다. 그렇지만 친구와 함께 비 맞으며 걸어가면 덜 처량합니다. 제법 장난기까지 동합니다. 작품에는 그림도 그려 넣었습니다. 빗줄기를 그리고 그 가운데 빨간 줄을 하나 넣습니다. 우산을 접고 빗속으로 들어갔다는 뜻으로 그렇게 그렸습니다. ‘함께 맞는 비’를 붓글씨로 쓰면서 ‘함’자의 ‘ㅁ’과 ‘맞’자의 ‘ㅁ’을 공유하도록 쓰기도 합니다.
신영복 <담론> 중에서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건물에 제 일터가 있습니다. 시설물의 노후화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문제 중에서도 낡은 배관의 누수가 가장 골치가 아픕니다. 집중호우가 내린 며칠 전에는 일터의 내부를 지나가는 우수관에서 누수가 발생해 천정에서 물이 쏟아져 아수라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상수, 소방, 우수, 오수 등 각종 배관에서 물이 샐 때마다 A는 배관 기술자가 아니지만 시설물 관리가 담당업무의 하나라서 누구보다 바쁩니다. 때론 조치 작업을 하다가 물벼락을 맞기도 합니다. 하루는 누수 배관 보수 작업 현장에서 후배인 B와 평소 사이가 나쁜 A가 저에게 그에 대한 불만을 얘기하였습니다. 정년퇴직을 앞둔 자신보다 더 오래 근무할 B가 시설관리 업무를 담당해야 하지만 B는 그 일을 회피하고 누수 현장조차 와보지도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A는 B가 법학 전공인 것도, 디스크 질환이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B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은 배관 보수와 관련해 아무런 지식도 없고 아무런 도움도 안 될 것이기에 그동안 전혀 현장에 가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A는 B에게 자신을 대신해 일을 하거나 자신과 같은 작업 참여를 기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급박한 현장에서 확신이 서지 않은 해결 방안의 결정할 때 함께 의견을 나누거나 사소하지만 잠깐 손이 아쉬운 일이라도 함께 해주기를 바랐던 것이었습니다.
일터에서 분업화와 개인주의 정서가 만연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녹슬고 갈라진 낡은 배관처럼 금이 간 관계를 새롭게 하도록 선생님의 '함께 맞는 비'에 관한 이야기를 그들과 함께 나눠봐야겠습니다.
[더불어숲 회원 노병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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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48번째 편지] 화이부동(和而不同) 2025.08.14 |
[샘터찬물 448번째 편지]
화이부동(和而不同)
「논어」의 이 화동론(和同論)은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용과 공존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와 동은 철저하게 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의 의미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 중에서 -
우리 부모님 세대는 눈앞에서 소중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상황을 직접 겪은 사람들입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살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다른 건 틀린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권력과 같은 편이 아니라면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공포와 생존의 본능을 날카롭게 켜 놓고 살던 분들입니다.
다름에 대한 그분들의 혐오 속에는 같음(同)을 강제당했던 두려움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국민주권 정부가 들어서고 비정상이 정상화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제 우리는 동행(同行)의
길로 가야 합니다.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공존과 평화의 길입니다.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도, 출신 지역이 다른 사람들도, 성적 취향이 다른 사람들도 함께 포용하고 가는
길입니다. 조롱과 혐오의 놀이에 심취한 우리 젊은 친구들도 함께 가다 보면 반드시 길은
생길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 더불어숲 회원 김한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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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47번째 편지] 인간의 깊은 선성(善性)으로 계속 혁신 2025.08.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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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46번째 편지] 인도(人道)와 예도(藝道) 2025.08.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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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45번째 편지] 신발이 바뀐 줄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온 밤길의 기억 (2025.07.25) |
[샘터찬물 445번째 편지]
신발이 바뀐 줄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온 밤길의 기억
“만들어내고 나누는 과정의 무엇이 사람들을 소외시키는가? 무엇이 ‘모두 살이’를 '각(各) 살이'로 조각내는가? 조각조각으로 쪼개져서도 그 조각난 개개인으로 하여금 '흩어져'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수많은 사람, 수많은 철학이 이것을 언급해 왔음이 사실이다. 누가 그러한 질문을 나한테 던진다면 나는 아마 '사유'(私有)라는 답변을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개인과 개인의 아득한 거리,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는 벽, 인간관계가 대안(對岸)의 구경꾼들간의 관계로 싸늘히 식어버린 계절……. 담장과 울타리. 공장의 사유, 지구의 사유, 불행의 사유, 출세의 사유, 숟갈의 사유……. 개미나 꿀벌의 ‘모두 살이’에는 없는 것이다. 신발이 바뀐 줄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온 밤길의 기억을 나는 갖고 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독방에 앉아서 중>
(사) 더불어숲에서 7월 3일부터 시작된 ‘<더불어 낭독> 교실’에 참여하며, 송정희·성경숙 선생님을 포함한 20명의 공부 벗과 함께 귀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비록 온라인 수업이지만, 함께하는 기쁨을 충분히 느끼고 있으며 여러 벗의 목소리로 다시 듣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제가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지난 시간에 함께 낭독한 『사색』 중 ‘독방에 앉아서’라는 구절을 읽으며 요즘 아이들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학교를 찾아오는 졸업생들의 대학 생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 때와는 참 많이 다르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특히 함께하지 못한 채 조각조각 흩어져 ‘각(各) 살이’들을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개인과 개인의 아득한 거리,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는 벽, 인간관계가 구경꾼 간의 관계로 싸늘히 식어버린 계절” 속에서, 우리는 어떤 대안을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신발이 바뀐 줄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온 밤길의 기억을 나는 갖고 있다”라는 문장을 다시 만납니다. 이 구절을 통해 아이들이 '사유'(私有)를 넘어선 ‘모두 살이’를 경험하고, 따뜻한 추억을 만들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습니다. 지금 제가 ‘<더불어 낭독> 교실’에서 느끼는 이 따뜻함과 여운을, 아이들도 경험하고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기회를 만드는 것에 더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더불어숲 이사 배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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