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터찬물 465번째 편지]
관계성을 다시 생각함
“생명은 고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관계성의 총체입니다.
생명의 본질인 신진대사(新陳代謝)는 생명이 독립된 완결 구조가 아니라
외부의 물질 및 에너지와 연결된 열려있는 체계임을 보여줍니다”
- 1988. 경주 엑스포 국제학술대회 기조 강연에서 -
“근대사회의 사회론이란 존재론적 세계 인식을 전제한 다음 개별 존재 간의 충돌을
최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구성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關係網)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담론』중에서 -
세계 인식의 기본 틀을 고민하셨던 선생님의 통찰이 놀랍습니다.
개별자들의 무한 경쟁을 당연시 한 근대의 약탈적 자본주의는 선생님이 지적하셨듯
존재론적 사고를 그 뿌리로 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탈근대의 과제가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의 전환”이라는
선생님의 철학은 당연한 인식론적 귀결이며,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서 관계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봅니다. 왜 관계성인가 입니다.
아직 공부는 부족합니다만, 서양철학의 주된 흐름은 대개 신(神)에 대한 인간의 관계 설정을
근원으로 하면서 삶의 목적을 ‘행복’에 두는 목적론적 세계관이라 합니다.
그 방법은 신앙이나 이성 혹은 그 절충으로 나뉠 수 있겠지만 목적이 (지상에서든, 천상에서든)“행복 추구”라는
점만은 동일한 것 같습니다. 틀렸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이 논리들이 역사적으로 많이 악용되어 온 것은 사실 같습니다.
선생님이 인용하신 책 중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그 사례들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행복(또는 천국)을 위하여’ ‘선’을 행하고 ‘돈’을 버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돈은 선이며 마땅한 윤리이지만 못 버는 것은 악이자 무능력입니다. 따라서 돈을 벌기 위한 수단들은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었으며, 그 바탕에는 선과 악, 믿음과 불신의 엄격한 구분이 있고, 다름과 차이의 인정보다는
옳음과 틀림의 논리가 깔려있었던 것이죠. 반면 동양철학은 어떨까요.
동양철학에 워낙 혜안이신 선생님께서는 주역 강의에서 최고의 관계론은 “성찰, 겸손, 절제, 미완성, 변방”으로
두시고, 그중 최고는 “겸손”으로 설명하십니다(『담론』‘손때 묻은 그릇’ 편). 이것만 보아도 어떻게 다른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겸손은 사실 관계성에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덕목이 되죠.
따라서 선생님께서는 “산다는 것은 사람과의 만남이고 만남이 연대이며 연대는 관계론의 실천적 버전이다”,
“연대는 탈근대의 전략이 아니라 삶의 철학”이라 정의하신 후 관계의 최고형태는 “입장의 동일함”이라 하십니다.
여기서 “입장의 동일함”이란 “서로를 따뜻하게 해주는 관계, 깨닫게 해주고 키워주는 관계”이므로 선생님의 철학에서
저는 존중이나 배려와 같은 공동체성의 가치를 ‘관계’를 통해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고 본질이자 목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서양의 ‘행복’은 관계와 실천의 결과물이 될 수 있는 것이지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관계”는 “관계망” 속에 있을 때 가능하며, 이런 관계는 인과관계의 순환으로
보아야 하고 “대비”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상대가 있어야 비로소 ‘나’라는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서(聖書)의 신을 자연신(自然神)으로 생각한 스피노자 역시 “신(神)은
그의 피 창조물인 인간이 있음으로써 존재 가능하다”고 하면서 만물의 인과성을 세계의 본질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 바탕 위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관계성이 인간 삶의 목적이자 본질이라 한다면 이 관계를 끊고 사는 사람들(예를 들어 은둔형 생활자나 자연인)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주변에 찾아볼 것도 없이‘이것저것 다 귀찮기도 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가 많은’
저 자신은 도대체 정체가 뭘까요.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지 항상 두렵고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관계성에서 얻어낸 선생님의 통찰을 제 삶에 깊이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하루하루가 깨달음으로 (관계성 속에서) 채워지고, 자기 자신이 변화해가야 그 긴 세월을 견딥니다”
(『담론』‘사일이와 공일이’편)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햇볕이며, 살아가는 이유는 하루하루 깨달음과 공부였다는
선생님 앞에 다만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는 하루입니다.
- 더불어 숲 회원 허병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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