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샘터찬물 495번째 편지] 별 앞의 부끄러움 - 김정진 2026. 07. 31. |
[샘터찬물 495번째 편지]
별 앞의 부끄러움
"활을 쏘아서 과녁에 적중시키지 못했을 때는 적중하지 못한 원인을 자기한테서 찾아야 합니다(反求諸己).
자기의 활 쏘는 자세를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하여 그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찾는가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반구저기의 자세란 우리를, 나를, 내부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운동의 원인은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자기반성(自己反省)이 자기 합리화나 자위(自慰)보다 차원이 높은 생명 운동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자위는 생명이 괴로움으로부터 자기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기존 상황을 합리화하고 전체 구도를 보수화하는 자위보다는 자기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자기비판이
서바이벌의 가능성을 더 높여 줍니다. 중요한 것은 작은 실패를 간과하지 않는 자기비판의 자세입니다.
실패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패의 발견이 필요한 것이며, 실패가 값진 것이 아니라 실패의 교훈이 값진
것입니다. 실패와 그 실패의 발견은 우리의 삶에 튼튼한 뼈대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안이나 결론이라기보다는 우리들의 반성적 자세입니다.
무슨 일에서건 항상 최선의 결론을 얻으려 하는 안이한 자세를 반성해야 합니다.
각자의 처지에서 부단히 고민하며 하나하나 쌓아가는 매일매일의 노력, 그 이상의 최선은 없습니다.“
『담론』과『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신영복 선생님은 반성의 본질을
'반구저기(反求諸己)'에서 찾으신다. 이는 맹자 『이루편』의 '행유부득자 개반구저기(行有不得者 皆反求諸己)에서
온 말로,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원인을 먼저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라.'라는 가르침이다.
선생님은 이를 궁사에 비유한다. 화살이 과녁을 벗어났다면 그 원인을, 활을 쏜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구저기의 정신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대한민국 양궁이다.
우리나라는 1984년 LA 올림픽 양궁대회 우승 이후 세계 최정상의 자리를 유지해 왔다. 경이로운 기록이다.
그 비결은 어떤 환경에서도 과녁을 맞힐 수 있는 집중력과 체계적 훈련에 있다고 한다. 실패를 분석하고
반복훈련을 이어가는 반성적 자기 훈련이 어떤 상황에도 과녁의 정중앙을 맞힐 수 있는 자세의 밑거름이다.
환경적 요인을 탓하는 것은 자위에 그치고 더 나은 다음을 위한 반성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반성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른 시가 윤동주의 <서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은 '코람데오(Coram Deo)'를 연상시킨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의 라틴어다. 시인의 이 마음은 종교를 넘어 인간이 지녀야 할 가장 순결한
윤리의식처럼 느껴진다. 잎새에 이는 바람과 같은 작은 흔들림에도 괴로워하는 시인의 자세야말로
자기반성의 극치다. 마치 코람데오의 삶의 태도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양한 욕망 속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라캉의 명제처럼, 타인과 비교하며 만족을 모르고 부끄러움을 놓아버린 채 비루해지는 것이 우리의 민낯이다.
이러한 현대인의 속물적인 무감각을 아프게 드러내는 소설이 박완서의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이다.
부끄러움에 민감한 주인공은 어떤 식으로든 실리만을 추구하는 남편과 허영심 가득한 동창들에게 환멸을
느끼곤 한다. 어느 날 일본 관광객 앞에서 지나치게 비굴한 태도를 보이는 여행 안내원을 보며,
부끄러움을 잊은 사회가 부끄럽다고 각성한다. 정말 이 시대에 필요한 교육은 '부끄러움 수업'이 아닐까 싶다.
맹자는 인간에게는 네 가지 선한 마음인 '사단(四端)'의 본성이 있다고 하였다. 그 가운데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羞),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惡) 마음이다.
반성조차도 자기 성공을 위한 잘못의 시정 정도로 단세포화된 요즈음, 이러한 본성을 깨우는 교육이
필요해 보인다.
반성은 성찰로 이어지는 길목이다. 반성이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자기 점검이라면,
성찰은 자신을 넘어 타인과 사회, 삶의 의미까지 사유를 확장한다. 엄혹한 일제 강점기 속에서
시인은 옳음을 선택하고, 쓰러져가는 민족에 아파하며 나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한다.
반성과 성찰을 넘은 결단의 자세이다.
인간에게 별은 현실을 이겨낼 이상과 꿈을 의미한다. 칸트가 『실천이성비판』 말미에 남긴 유명한 문장인
"내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 생각난다. 윤동주에게 '별'은 칸트의 '별'처럼 인간을
이상으로 이끄는 표상일 것이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는 별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는
결기로 느껴진다. 타인을 의식하는 의협심이 아니라 시인이 세운 옳은 길에 비추어 사는 진실한 삶이 아리게
다가온다.
부끄러움은 반성과 성찰의 출발점이다. 부끄러움이 착함만큼이나 미덕에서 멀어지고 있는 요즈음,
우리는 부끄러움, 수오지심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교육의 주요 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부끄러움은 인간을 작아지게 하는 감정이 아니라 더 나은 존재로 일으켜 세우는 양심의 힘이다.
오늘 밤, 윤동주 시인이 별을 보며 걸었을 부암동 시인의 언덕에 오르고 싶다. 별 앞에 서서 나의 부끄러움을
마주하련다. 그 부끄러움이 나의 삶을 더 나은 길로 이끌어줄 것이라 믿는다.
-더불어숲 회원 김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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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94번째 편지] 더불어 숲을 만들자 -김한식 2026. 07. 24. |
[샘터찬물 494번째 편지]
“뿌리는 혼자가 아니다. 뿌리와 뿌리 사이로 균사의 실타래가 스며들어 지하의
그물망-숲의 넓은 웹-이 만들어진다. 이 지하의 인터넷을 통해 나무는 당을 보내고, 미네랄을 받고,
해충의 소식을 전하며, 그늘 속 어린나무에 한 계절을 버틸 설탕을 살짝 쥐여 준다.
쓰러진 뿌리마저 곧장 사라지지 않는다. 그 안의 물과 탄소가 천천히 흘러나와 주변의 호흡을 오래오래 지탱한다.”
- 남효창, 『우리는 모두 씨앗이다』 중에서
올해 지인으로부터 받은 책 속에서 건진 내용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말씀하신 더불어숲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라 무척 반가웠습니다.
관련 내용을 좀 더 검색해 보니 균근 네트워크 이론(Mycorrhizal Network)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균근 네트워크는 1997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의 산림생태학 교수인 수잔 시마드(Suzanne Simard)가
발견하였습니다. 식물의 뿌리와 토양 속 곰팡이의 균사가 결합해 땅속에 형성한 거대한 생태적 연결망을 구성한다고
합니다.

나무 혼자서는 숲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나무와 나무가 같은 공간에 모여 있다고 해서 숲이라 부를 수도 없습니다.
숲이 되기 위해서는 나무와 나무가 서로 도움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정보를 공유하는 연대의 관계로 함께해야
합니다. 땅속 곰팡이의 균사로 연결된 생명의 통로가 있어야 합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
기성세대와 미래세대 사이에 소통과 이해의 관계가 가능해야 더불어숲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영복 선생님께서는 지배 담론, 기득권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작은 숲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2.3. 내란을 극복하면서 사회의 많은 부분이 정상화되어 가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기득권 세력의 힘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차별과 혐오가 교묘하게 사회 곳곳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숨통을 틔우는 작은 숲이 더욱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직장에서, 내 생활 주변에서 영양분과 정보를 공유하면서
작지만 건강한 숲을 가꾸는 일이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내 주신 마지막 숙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더불어숲 회원 김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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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93번째 편지] 기억하기, 진실 말하기 -허병철 2026. 07. 15. |
[샘터찬물 493번째 편지]
기억하기, 진실 말하기
“묵가가 진단한 당대 사회는 무도하고 불안한 사회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며,
강자는 약자를 억압하고, 다수는 소수자를 겁박하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고,
귀족은 천한 사람에게 오만하고, 간사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속인다.
세상은 화찬(禍篡)과 원한으로 가득 차 있다. ..(중략)...
근본적 해결 방법은 서로 차별 없이 사랑할 때 평화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묵자의‘겸애’ 사상입니다. 겸애는 기본적으로 계급철폐의 평등사상입니다”
“묵자는 천하를 이롭게 하려면 겸상애(兼想愛) 교상리(交相利)의 법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중략)..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롭게 하는 법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묵자는 오늘날의 당면 과제인 연대와 상생을 일찌감치 내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담론』‘이웃을 내 몸같이’에서
배재고 교문 앞에 놓인 화환을 보면서 어째서 우리 사회가 이토록 분열의 언어, 혐오와 증오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혐오와 무시, 조롱과 차별, 억압과 폭력의 언어들이 습기 가득한 지하에서
어느새 지상으로 올라와 거리낌없이 확산하고 있습니다. 한번 내뱉어진 ‘혐오와 증오’가 다시 ‘혐오와 증오’를
부르고 있는 이 현실이 매우 충격적입니다.
주지하듯 ‘혐오와 증오’는 민주와 인본주의의 적이며 창의와 다양성을 무시하는 일방주의 문화의 산물입니다.
단순히 ‘네가 싫다’라는 감정이 아니라, 이성적 사고를 차단하고 조직화하여, 타인을 배척하고 차별을 조장함으로써,
사회의 안전망과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인간성을 훼손하는 반사회적 언어이자 행동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묵자의 ‘겸애’ 사상이 기본적으로 계급 철폐의 평등사상이고, 묵자가‘연대와 상생’의 과제를
일찍 세상에 내놓았다고 평가하십니다. 인류사는 묵자와 같은 사상가들이 변혁의 맹아를 싹틔우고, 대중이 많은
희생을 감내함으로써 불평등과 차별에 대항하여 민주와 인권의 개념을 정착시켜 온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불평등성은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그 아류로서 신자유주의와 트럼피즘,
이에 기반한 ‘혐오와 증오’ 문화가 세상을 빠른 속도로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독일의 저널리스트 겸 작가 카롤린 엠케는 우익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소수자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진보적 가치관을 물리치기 위한 수단으로 ‘혐오와 증오’를 이용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차별주의자, 우익들은) 사회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능력이 없이 사람들의 감정을 증폭시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용하고 있다. 자신들은 안무가일 뿐이며 춤을 추는 것은 남들에게 맡긴다.”(카롤린 엠케 『혐오 사회』 2026)
혐오와 증오의 언어들은 맥락 없이 특정 주장을 연결하여 단순히 반복하는 것(프레임,밈)으로 상대의 정서를 왜곡,
장악하여 정치적, 금전적 이익이나 쾌락을 취하고자 하므로 악(惡)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극우에 맞서 진보 역시 ‘프레임’을 전략적으로 활용할 것을 주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코끼리는 생각하지마!』 2015). 이에 비해 카롤린 엠케는 증오에 증오로 맞설 순 없다며 이럴수록
‘기억하기’와 ‘진실 말하기’를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혐오와 증오를 방관하거나 침묵할 때 사실을 기억하고 진실을
말하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꺼지지 않는 우리 사회의 희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기억과 진실에 기반한 ‘연대동맹’을 이야기합니다.
누구나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는, 빠르고 편리한 세상이지만 제한된 시각으로 제한된 정보만을 취득하고,
타인의 생각을 자기 생각인 양 착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을 왜곡하고 수정하지 않으며,
잘못된 정보를 신념화하고 그것을 혐오와 증오로 표현하며, 단단한 벽을 세워 스스로를 그 안에 가둡니다.
(물론 나 역시 스스로 그러한 지도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벽들을 부수는 망치가 필요합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관계론에 기반해 보면 ‘연대’란 힘을 모아야 할 사람들의 ‘관계’이며, ‘상생’은 그 관계를 만드는
힘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마도 선생님께서는 저희에게 더욱 ‘연대와 상생’의 망치로 ‘혐오와 증오’의 벽에
과감히 맞서라고 하실 것만 같습니다.
- 더불어숲 회원 허 병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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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92번째 편지] 되돌아보는 일에 대하여 -최훈 2026. 07. 09. |
[샘터찬물 492 번째 편지]
되돌아보는 일에 대하여
신영복 선생님의 학문과 삶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키워드는 ‘관계론’입니다.
선생님은 서구 중심의 근대성이 가진 ‘개인주의’와 ‘존재론’적 한계를 극복할 대안으로
동양 고전의 지혜를 빌려 관계론을 제시했습니다. 서구의 근대 철학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처럼
독립된 개개인의 '존재(Being)'를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선생님은 '관계(Relationship)'가 존재를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나'라는 사람은 고정된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내가 부모, 친구, 사회, 자연과 맺고 있는
관계의 총합이라는 뜻입니다. 한자 인간(人間)을 예로 들면 사람은 홀로 서 있는 '人'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間)'에 존재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본 것이지요.
이러한 ‘관계성’을 깨닫는 한 방법으로 ‘성찰(省察)’을 강조하셨습니다.
“성찰이란 나와 다른 사람, 나와 세계의 관계성을 깨닫는 것이고, 현재와 과거, 현재와 미래가 맺고 있는
관계성을 각성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배타적인 존재성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더 넓게 다른 것과의 관계성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닫는 것이 성찰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관계성에 대해 깊이 통찰하고 있는 인디언의 예를 들기도 합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말을 멈추고 달려온 길을 되돌아봅니다. 영혼이 따라오기를 기다립니다.
공부는 영혼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처음처럼>
한국은 구한말 세계사의 흐름에 뒤처지면서 이후 일제 강점 시기와 전쟁으로
우리 역사상 가장 비참한 시절을 겪었습니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해방 이후 가장 빠르게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이루어 내었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오는 우를 범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가 마주치고 있는 사회경제적 양극화, 물질만능, 경쟁과 능력주의, 생명 경시,
인륜 도덕의 피폐화입니다. 인디언처럼 한 번씩 말을 멈추고 우리가 가는 길이 맞는지 되돌아볼 여유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영혼이야 따라오든 말든 물신을 섬기고 잘만 살면 된다는 천박한 사회를 만들어 낸
것이지요. 최근의 스타벅스와 쿠팡 사태도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사전에서 성(省)자는 ‘적을 소(少)’와 ‘눈 목(目)’의 결합으로 나옵니다.
작고 세세한 부분까지 눈으로 살펴보는 것이 성이라는 말입니다. 또 갑골문에서는 目자 위로
‘날 생(生)’자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초목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본래 省자는 작물이 자라는지를 살펴본다는 의미였던 것이지요. 작물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거름은 잘 주었는지, 뿌리는 견고한지, 잎을 보고 앞으로 문제가 없겠는지 늘 고심합니다.
한 해의 열매를 보고도 내년에는 무엇을 고쳐야 할지 고민합니다. 그것이 성찰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제대로 성찰하고 있을까요?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질주하는 사회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열심히 뛰어가고 있지만 방향이 잘못되어 있다면 갈수록 목표와는 더 멀어집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붓글씨로 자주 쓰신 고 민영규 선생님의 글 ‘떨리는 지남철’도 그러한 위험을 경계한 것입니다.
방향이 맞는지 살피지 않고 기존의 방식만 고수한다면 결코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붓글씨를 가르치는 저는 초심자들에게 기본 필법의 하나로 삼절법(三折法)을 가르칩니다.
획을 한번 그을 때 세 번(사실 횟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만) 끊어서 전진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중간중간에 붓이 중봉을 유지하고 정렬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저는 이 삼절법이 인생살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삼절법은 뒤돌아보는 것입니다.
붓끝이 획의 중앙에 제대로 위치해 있는지, 붓이 너무 눕거나 눌려있지 않는지,
획이 제대로 전진하고 있는지 등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문제의 소지가 보이면 잠시 가던
붓을 멈춰 세우고 다시 정리하고 바로 세운 다음에 또 나갑니다. 사람의 일생에서도 이런 과정과 순간들이
필요합니다. 내가 제대로 살아오고 있는지, 지금 내 자세는 바르게 되어 있는지 뒤돌아보고,
성찰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붓글씨를 통해서도 삶을 배웁니다.
뒤돌아본다는 것은 바쁜 현대 사회에서는 비효율 혹은 뒤처짐으로까지 인식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비록 늦게 가는 일이 있더라도 때때로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더디 가도 함께 가야 합니다.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써 보았던 붓글씨의 글귀로 마무리합니다.
“성찰과 각성,그 자체로서 이미 빛나는 달성입니다.”
-더불어숲 서여회원 두메 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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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91번째 편지] 수승화강(水昇火降)으로 가는 길 -이도환 2026. 07. 03. |
[샘터찬물 491번째 편지]
『주역』은 난해합니다. 나도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읽었을 리가 없습니다.
한 권으로 오래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동양고전을 제대로 읽어 보자는 각오도 없지 않았습니다.
내가 『주역』에서 찾은 것이 『주역』 독법의 관계론입니다.
『주역』의 독법이란 괘를 읽고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그 독법이 관계론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독법이 사실은 『주역』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괘를 읽는 독법 자체가 보여주는 사유의 틀이 중요합니다.
- 『담론』 62쪽
수승화강(水昇火降)으로 가는 길
주역에서 화수미제(火水未濟) 괘는 감하리상(坎下離上)으로 물이 아래에 있고
불이 위에 있는 형국을 말합니다. 이 괘가 나왔을 때는 흉한 괘로 일을 도모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운동성이 없는 죽은 괘라는 것이지요. 한의학에서는 이런 경우를 상열하한(上熱下寒)이라고 말하며,
몸이 병든 상태를 뜻합니다. 위로는 열(熱)이 치성(熾盛)하고, 아래로는 한(寒)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
문제가 크다고 봅니다.
우리 몸을 세 부분으로 나눈다면, 가슴 위로는 심장과 폐가 활동하는 공간으로 상초(上焦)라 하고,
비위가 활동하는 가슴과 배꼽 사이를 중초(中焦)라 하고, 신장과 방광이 활동하는
배꼽 아래를 하초(下焦)라고 합니다. 위에서 말한 상열하한(上熱下寒)은 상초에는 열(熱)이 많고,
하초는 냉(冷)하다는 것입니다. 하초가 차가우면 수(水)의 기운이 상초로 올라갈 수가 없고,
거기에다가 상초의 열을 하초에 내려오게 할 수도 없습니다.
이른바 수승화강(水昇火降)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수승화강이 원활(圓滑)하게 이뤄져야 오장육부가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아래에 있는 수 기운이 올라가서 머리를 차게 만들고, 위에 있는 화 기운이 내려와서
발을 따뜻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 이른바 두한족열(頭寒足熱)이라고 하지요.
이를 주역의 괘상(卦象)으로 나타내면 수화기제(水火旣濟) 괘입니다.
이 괘의 상은 리화감상(離下坎上)으로 물이 위에 있고 불이 아래에 있는 형국입니다.
길한 괘로 살아있는 상(象)이며, 운동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배탈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계절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거나 물을 마실 때, 체질에 상관없이 더운 것을 먼저 먹고
차가운 것을 나중에 먹으면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여름날 날씨가 덥다고 찬 것을 먼저 먹으면, 특히 장이 차가운 사람들은
죽음의 길로 조금씩 다가간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옛날 화롯불이 있던 시절, 겨울에 차가운 막걸리를 주전자(酒煎子)에 데워서 먹던
어른들의 지혜를 떠올려 봅니다. 건강한 몸으로 가는 길은 내 몸에서
수승화강이 잘 이뤄지도록 하는 것임을 마음속에 새겨야 합니다.
- 이도환(더불어숲 영남작은숲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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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90번째 편지] 마망과 어머니 -강태운 2026. 06. 26. |
[샘터찬물 490번째 편지]
마망과 어머니
'나는 항상 경계에 서고자 한다'라고 선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진영 논리를 배격한다는 뜻입니다만 그것은 세계가 분절. 대립 되어 있다는
세계관을 전제로 하는 사고입니다. 세계는 분절되어 있지 않습니다.
분절되어 있는 것은 우리의 인식 틀입니다. 결정론과 환원론은 단순 무식한 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고가 이러한 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 좌우상하의 그림을 굽혀서 원으로 만들어 보기를 권유합니다.
원으로 만들면 사실과 진실, 좌와 우가 서로 맞닿습니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하기도 합니다.
극좌와 극우는 같다고 합니다. 나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같은 것이라는 주장이 그렇습니다.
둘 다 동(同)의 논리이고 패권론입니다.
『주역』사상의 특징으로 소개했던 대대 원리에 의하면 물속에 불이 있고 불 속에 물이 있습니다.
자기의 반대 물을 자기 집으로 모시는 것이 바로 호장기택(互藏其宅)입니다.
동양적 사유는 결정론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모순과 대립의 통일과 조화가 세계 운동의 원리입니다.
<담론> 중에서
고즈넉한 미술관 길목에서 거대한 거미와 마주쳤다.
용인 호암미술관 입구에는 높이 9미터가 넘는 거미 작품이 서 있다.
잔뜩 웅크린 채 거미줄에 매달린 거미와 달리, 여덟 개의 다리로 땅을 굳게 딛고 서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알을 품은 듯 불룩한 배와 넓게 펼친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여성 조각가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는 거미를 통해 어머니라는 존재를 표현했다.
작품의 이름은 《마망(Maman)》이다. 프랑스어로 엄마라는 뜻이다.
거미는 자신이 만든 거미줄 안에서 움직이고, 기다리고, 살아간다.
거미줄은 외부의 위험을 피하면서 동시에 외부와 연결되는 독특한 세계다.
거미에게 거미줄은 자신을 지켜주는 세계다. 그래서 거미줄을 벗어나는 순간은 특별하다.
새로운 생명을 위해 땅 위로 내려가 알집을 만들 때가 그렇다.
거대한 거미의 위용에 취해 미처 알지 못했지만, 지금 마망은 자신을 보호하던 거미줄 밖에 서 있다.
더 이상 안전한 공간 안에 머물지 않는다. 보호 장치로부터 떨어져 나온 몸은 가장 취약한 상태가 된다.
포식자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마망의 여덟 다리는 단순한 신체가 아니다.
불안과 상처를 품은 존재가 그럼에도 자신보다 먼저 지켜야 할 존재를 향해 뻗은 울타리다.
인간 세상으로 돌아오면 이 울타리는 언제든 다른 얼굴을 가진다.
극좌는 극우와 같듯이, 보호가 지나치면 자식을 가두는 철창이 된다.
자식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마음은 본능에 가깝다.
그러나 부모가 살아낸 시간은 그 울타리의 모양을 바꾸기도 한다.
어떤 경험은 울타리를 더 촘촘하게 만들고, 어떤 기억은 그 높이를 지나치게 높인다.
그렇게 내가 세운 울타리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보지 못하면, 보호와 구속의 경계도 흐려진다.
내가 지키고 있다고 믿는 대상은 정말 누구일까. 혹시 나 자신은 아닐까.
- 더불어숲 회원 강태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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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89번째 편지] 논물 속 구름 들추고 -조희연 2026. 06. 18. |
[샘터찬물 489번째 편지]
논물 속 구름 들추고
담천이라 아직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는 일 없이 앉아서 땀만 흘리는 이곳의 여름이 몹시 부끄러운 것입니다만
아무리 작고 하찮은 일이더라도, 새 손수건으로 먼저 창유리를 닦는 사람처럼,
무심한 일상사 하나라도 자못 맑은 정신으로 대한다면
훌륭한 ‘일’이란 징심(澄心) 도처에서 발견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형님께서도 어려움이 많으시리라 생각됩니다.
저녁에 등불을 켜는 것은 어려운 때 더욱 지혜로와야 한다는 뜻이라 믿습니다.
우용이·주용이에게 그림 그렸습니다.
-저녁에 등불을 켜는 것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첫 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다시 펼쳐 읽기 시작한 지 두 달이 지났습니다.
누렇게 바랜 책의 모퉁이를 접으며 글 속 시간을 더듬고 있습니다.
‘영호’의 책이 어떻게 제 책장과 인연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1988년 9월 1일에 인쇄되어 5일에 발행된 햇빛출판사의 책, 3,500원 너무 헐한 값에도 아랑곳없이
세월의 무게가 더해져 묵직한 힘으로 압도됩니다. 말은 정갈하고 몸가짐은 꼿꼿하며, 정은 낮은 곳을 향하고,
생각은 매 순간 깊이를 더해 허투루 책장을 넘기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는 동안 아꼈던 민들레는 다문다문 잎사귀만 덩그러니 남고,
논물 맑은 곳에 벼들은 제법 굵어져 녹색이 더욱 짙어갑니다.
피고 지고, 가고 오는 계절 속에 책과 나만 있는 듯합니다.
깊은 울림은 파문이 일어 멈추지 않고 물무늬를 새깁니다.
사방이 벽, 꿈조차 징역살이인 삶은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혀 옵니다.
그러나 자신의 슬픔보다 타인의 수많은 비참함을 보듬던 갇힌 곳에서의 한 생이 척박한 땅에서
온전히 뿌리를 내리고 강인한 힘으로 걸어 나와 휘지 않는 근원의 힘을 바라보게 합니다.
논물 속 여름 저녁이 깊어 갑니다.
낮게 깔리는 구름에도 뻐꾹새 소리, 개구리 소리는 목을 곧게 세워 맑은 생각을 깨우고,
이 저녁 집집마다 켜는 불빛에서 어둔 밤을 밝히는 지혜를 배웁니다.
벌레 먹은 사과를 깎다가 문득,
꽃은 바람 끝에 길 내고
나방은 어둠 속에 길 내고
애벌레 한 마리
햇살을 달고
사과 속에 갇힌 어둠 밝히고 있었다
사과 한 알 온몸으로 길 내어주고 있었다
좁고 어두운 길
구부러져 휘어가도
중심은 늘 너를 기다리고
길 아닌 길
길 없는 길에
칡덩굴 하나 휘고 있었다
둥근 허공
텅 빈 어디에 길 있는지
냇바람 흔들며
어둠 속에 꽃을 달고 있었다
나뭇가지 홀로 뻗는 곁에
덩굴손 허공에서 길 잃어도
이내 이끌리는 중심의 중력
휘어도 휘지 않는 건
날고 있어도 나는 줄 모르는
익숙한 날갯짓 같은 것
갈 길 잃고 머뭇거릴 때
솔가지에 내려앉는
저녁 새 소리
뻗어가는 모든 것에 길 있다고
온몸으로 길 내어 주고 있다고
- 더불어숲 회원 조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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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88번째 편지] 씨뿌리는 사람 - 서기용 2026. 06. 12. |
[샘터찬물 488번째 편지]
씨뿌리는 사람
그간 어머님, 아버님께서 강령하시오며 가내 두루 평안하시리라 믿습니다.
열여드레나 내리 비닐 창에 상화(霜花)가 만발하더니 어제,
오늘 얼음 한 점 없는 창밖으로 밝고 이른 새벽이 있습니다.
어머님께서 염려하시는 겨울 추위도 이제 큰 고비는 넘긴 듯합니다.
고중장구와족제 양춘부래답곤기
(庫中藏具臥足齊 陽春復來踏閫起)
창고 속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 농기구들도 머지않아 봄이 오면
문 열고 일어서서 들판으로 나갈 것입니다. 자(字) 모둠 해본 절구 한 짝 적었습니다.
오늘이 우수, 경칩을 넘기고 나면 헛간에 누운 농구(農具)도 손질하고 봄볕에 겨울 옷가지를 널 때입니다.
그 흔한 엑스란 내의 한 벌 없이 밤중에 찬물 먹으며 겨울을 춥게 사는 사람들 틈새에서 해마다
어머님의 염려로 겨울 따뜻이 지내는 저는 늘 옆 사람에게 죄송합니다.
봄은 내의와 달라서 옆 사람도 따뜻이 품어줍니다. 저희들이 봄을 기다리는 까닭은
죄송하지 않고 따뜻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읽고 영치시킨 책이 상당하리라 짐작됩니다.
자동차로 접견 오시는 걸음이 있으시면 차하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농구(農具)들이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삶의 간절함이자 희망입니다.
우리의 삶은 절망보다는 희망이 늘 많기에 살아갈 만한 것이고 또한 즐거운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염청서소(染靑書巢)에는 빈센트 반 고흐의 씨뿌리는 사람(The Sower, 1888년) 실물 크기의 영인본이 있습니다.
매일 아침 서실 창문을 열고 고흐의 그림을 보는 것은 하루를 더욱 희망적으로 시작하기 위한 저만의 루틴입니다.
처음에는 그림의 계절이 이른 봄의 아침인 줄 알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배경에 밀이 익어 수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는 초여름을 뜻했습니다.
고흐의 편지를 읽다 보니 고흐가 이 씨뿌리는 사람을 저녁나절에 그렸다고 합니다.
결국 이 그림은 밀이 익어가는 초여름 저녁나절 찬란하게 지는 태양 빛을 등지고 농부가
대지에 씨를 뿌리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고흐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풍경을 사실적으로 기록하는 것을 넘어,
생명의 순환(죽음과 탄생)이라는 거대한 시간의 흐름을 자신의 강렬한 색채와
그 두께감(임파스토 Impasto)으로 표현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역경과 희망, 빈센트 반 고흐의 절망과 희망을 한참 동안 생각해 보았습니다.
희망과 절망은 마치 꽃과 그 꽃받침이 함께 존재해 씨앗을 영글게 하듯 우리의 삶을 이루는
기본적인 음양(陰陽)적 요소라 생각했습니다. 주역(周易)의 이치와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 더불어숲 나무 서기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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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87번재 편지] 연천 태풍전망대에서 쇠귀 선생님의 〈베를린의 장벽〉을 떠올리며 -배기표 2026. 06. 05. |
[샘터찬물 487번재 편지]
연천 태풍전망대에서 쇠귀 선생님의 〈베를린의 장벽〉을 떠올리며

얼마 전, 함께하는 연구회 선생님들과 연천으로 평화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남과 북이 가장 가까이 마주하고 있다는 태풍전망대에 올랐습니다.
철책 너머 가까운 곳에서 작업 중인 북한 군인들의 모습도 육안으로 보였습니다.
북녘의 산하와 사람들을 바라보며, 새삼 우리가 딛고 선 이 땅의 허리가 잘려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흐르는 임진강과 불어오는 바람에는 아무런 경계가 없건만,
우리의 발걸음은 차가운 철책선 앞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었지요.
태풍전망대에서 철책과 마주하는 동안,
쇠귀 선생님께서 독일의 통일과 우리의 분단을 비교하며 두 나라의 '분단선'이 지닌
공간적 차이를 짚어주신 글귀가 떠올랐습니다.
"베를린에서 느끼는 첫 번째 감회는, 분단 독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은 우리의 판문점과는 달리
독일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독일의 수도 베를린의 한가운데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이목이
쏠렸던 곳에 세워져 있습니다. 산골짝의 판문점과 녹슨 기찻길을 먼 곳에 두고 있는 우리와는 달리
독일의 장벽은 독일인들의 가슴에서 일상의 아픔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독일의 통일은 독일인들의 가슴에서 한시도 떠날 수 없었던 절실한 과제였습니다."
독일의 베를린 장벽은 도시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었지요.
사람들은 매일 아침 출근길에, 창문을 열 때마다 일상에서 그 장벽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분단이 이처럼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 안에 있었기에, 그것을 극복하고 허물코자 하는 열망 역시
삶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 우리의 분단선은 일상생활의 공간과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분단이라는 엄혹한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일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철책선이 눈앞에서 멀어진 만큼 분단에 대한 아픔도, 평화에 대한 절실함도,
통일에 대한 고민도 우리 삶의 바깥으로 밀려나 버리는 것은 아닌지요.
어떻게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분단을 우리의 일상 속으로 불러올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이 현장이든, 영상이든, 사진이든 철책을 한 번이라도 더 눈으로 보고,
관련된 글을 읽으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 일상에서의 작은 노력이
서로를 잇는 첫걸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쇠귀 선생님은 같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직도 분단의 고통을 조금도 벗지 못하고 있는 우리 처지로서는 통일 독일에서 확인하는 활성과 약진은
부러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통일에 앞서 먼저 이산과 증오를 청산해야 할 뿐 아니라,
막대한 분단 비용을 청산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선진국 진입이 가능하다고 믿는 허상을 깨트리는 것이
먼저이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우리의 통일이 이데올로기 대립이라는 낡은 모순을 넘어서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면서 "독일의 통일, 그것은 분명 우리가 모델로 삼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꾸준한 교류와 협력을 통하여 먼저 민족적 신뢰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사실만은
배울 수밖에 없는 모델임이 틀림없습니다."라고 하셨지요.
최근 북한이 수십 년간 이어온 '우리 민족끼리'라는 통일 노선을 폐기하고,
남북 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로 공식 규정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또 태풍전망대에서는 남북 교류의 상징이었던 노래 '반갑습니다'가 북한에서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는
씁쓸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우려 장벽을 높여가는 지금, 가만히 '반갑습니다'를 흥얼거리고,
'비둘기야 높이 날아라'를 듣는 것. 이런 작은 행동이 바깥으로 밀려난 분단의 현실을 내 일상 속에 불러오는
나만의 일상의 실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올해는 더불어숲 벗들과 함께, 일상에서 길러낸 평화의 마음들을
나눠가면 좋겠습니다. 분단의 철책을 마침내 녹여낼 그날을, 오늘 여기서 미리 불러봅니다.
- 더불어숲 회원 배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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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86번째 편지] 학교 놀이터에서 - 김한식 2026. 05. 28. |
[샘터찬물 486번째 편지]
학교 놀이터에서
"오늘은 5학년하고 1학년이 노는 날인데, 6학년이 왜 들어왔어?"
"지난번에 우리 노는 날에 5학년도 와서 놀았다고요."
"그럼 5학년들이 잘못한 거네. 선배들이 모범을 보여주면 어떨까?"
"저기 여자애들도 나가야 해요. 왜 우리한테만 뭐라 그러세요? 공정하게 해야죠."
"알았어. 쟤들한테도 나가달라고 얘기할 거야."
얼마 전 새로 생긴 학교 놀이터가 인기가 많아서 요일별로 사용 학년을 나누어서 운영하던 중에 있었던
6학년 남학생들과 대화한 내용입니다. 모두가 매일 같이 놀면 이런 일이 없었겠지만,
한정된 공간에 많은 학생들이 몰려서 위험할 수도 있어 규칙을 정해서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기르는 것이 학교의 중요한 목표임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서 그런 태도를 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아이들의 욕망이 집중된 곳일수록 이런 갈등은
자주 일어납니다.
아이들은 흔히 공정에 대해 민감합니다. 문제는 공정 뒤에 있는 자신의 이익을 감추는 일입니다.
"다른 애들도 그랬는데, 왜 우리한테만 그래요?"
"여자애들한테는 뭐라 안 하고 남자한테만 그러잖아요."
공정을 내세우면서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부분, 공동체에 피해를 주는 잘못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외면하려는 태도를 보여서 마음이 아픕니다.
"이처럼 무사(無私)하기 때문에 공평(公平)할 수 있고
공평하기 때문에 이치가 밝아질(天理明)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집단이기주의와 이해관계 집단의 주장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그 주장과 논리가 사사로운 것이기 때문이지요."
- 신영복 고전 강독 《강의》 논어 편 중에서
6학년 남자아이들 모습에서 20대 남성들이 겹쳐 보이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공정을 내세우면서 상대방의 어려움을 살피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우는 어른으로 자랄까
걱정이 앞서게 됩니다. 놀고 싶은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주면서 좀 더 부드럽게 이야기 나눴다면 어땠을까?
규칙을 세우는 과정에서 아이들과 충분히 이야기하면서 규칙을 정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학교는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곳이어야 하고, 학생은 민주적인 절차를 경험하면서
나의 권리와 상대의 권리가 부딪힐 때 어떤 과정을 거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배우며 성장해야 합니다.
이런 고민이 학교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에서 함께 해 나가길 바랍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가르침처럼 보다 무사(無私)한 구성원들이 공평(公平)을 이야기하면서
사회가 좀 더 밝아지길 희망합니다.
- 더불어숲 회원 無愁 김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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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85번째 편지] 타인의 행복은 자신의 행복의 조건 - 노병준 2026. 05. 22. |
[샘터찬물 485번째 편지]
타인의 행복은 자신의 행복의 조건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무지와 질병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오랜 역사를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과 방향에 있어서 우리는 실패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더 많은 자유는 언제나 더 큰 구속과 불평등을 동반함으로써 자유의 의미를 회의하게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소비하고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이러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예술과 문화소비마저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고 있을 뿐 아니라
욕구 그 자체를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자본운동 속에서 우리의 자유는 언제나 더 큰 욕구 앞에서
목마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발전의 원리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자유와 행복의 원리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는 현실이
그것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그런 점에서 평등이 자유의 최고치라는 당신의 말을 믿습니다.
생각하면 이것은 ‘타인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평범한 양식(良識)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등은 자유의 실체이며 내용입니다. 자유는 양적 접근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일 뿐입니다.
<나무야 나무야> 중에서
지울 수 없는 시대의 아픔이자 민주공화국의 정체성을 각성시킨 5․18 광주민주항쟁(이하 5․18)이
올해로 46주년입니다. 새삼 어느새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생각하던 5․18의 의미를 돌아보면서 선생님께서는 5․18에 대해 어떤 말씀을 남기셨는지
가진 책들을 뒤적여 보기도 하고 보도기사들을 살펴보았습니다만, 여기에 언급할 만한 구체적인 내용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아마도 5․18 기간 수감 중이셨기 때문에 5․18이 가진 역사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는
언급하시되 구체적인 내용의 언급은 삼가시지 않았나 추측할 따름입니다.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학생들을 시작으로, 계엄군이 일반 시민들까지 가혹하게 탄압하자,
당시 광주 시민들은 무차별적인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맞섰습니다. 그것은 피로 얼룩진 학생들과 죄 없이
폭행당하는 시민들의 고통을 자신의 불행의 조건으로 받아들인 시민들의 평범한 양식으로 만들어진 연대입니다.
저는 우리 민주공화국의 정신이 정치적인 민주화나 방임적 자유주의를 넘어, 이제 1980년 광주 시민들이 보여준
그리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자유의 최고치인 평등을 지향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K-민주주의를 말하는 우리의 현실은 열악한 현장의 외국인 노동자, 방치된 아동 등 우리의 불편과 고통을
전가시켜 불행한 결말을 맞는 사회적 약자들의 소식을 쉽게 접하는 것입니다.
최근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이 또다시 정치적 이해관계로 좌절되었습니다.
반세기를 넘기기 전에 헌법 전문 수록을 통해 민주공화국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보편적 가치로서
5․18 정신을 새기는 것은, 시대의 소명이자 K-민주주의 시대를 누리는 우리들의 의무일 것입니다.
- 더불어숲 회원 노병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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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84번째 편지] 스승의 날에 ‘스승’을 생각하며 -허병철 2026. 05. 15. |
[샘터찬물 484번째 편지]
스승의 날에 ‘스승’을 생각하며
“모든 존재는 인과 과의 관계에 있으며, 동시에 과와 인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배우는 제자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또 가르치는 스승의 입장에 서있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은 스승이면서 동시에 제자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강의』 ‘나비 꿈’에서
“사람은 스스로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 ‘스스로 도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음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아라공의 시구를 좋아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983.3.29.에서
학창 시절을 떠올릴 때면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가 생각납니다.
80년대 학교는 반공과 병영화 교육(교련)이 필수였고
체벌과 폭력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참 이상한 공간이었습니다.
교권은 체벌권이었고, 학생 인권이란 말은 듣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존경스러운 선생님도 계시긴 했습니다만,
대개는 시류에 체념하거나 편승하시는 분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스승’과 ‘제자’라 할 만한 관계 형성은 어려웠으며,
저의 인생의 ‘스승’을 만나고 싶었던 어릴 적 꿈도 막연한 공상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생전의 신영복 선생님을 뵙지 못한 저로서는 선생님과 직접 친분이 있었던 많은 분을 부러워하면서
그나마 남아있는 자료를 통해 여러 상상을 해 보곤 합니다. 과연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어떤 스승이셨을까. 관련된 여러 이야기가 많지만, 그중 최근에 읽은 탁현민의 책
(『사소한 추억의 힘』 2023. ‘나의 스승, 나의 친구’ 편)에서 선생님의 진면목을 일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 ‘스승’이란 “병아리가 알 속에서 우는 소리를 낼 때, 밖에서 껍질을 쪼아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어미”와 같은 분, 또는 “그 병아리에게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분”이 아닐까,
바로 그분이 선생님이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스승’이란 말에 참 어울리는 분 같습니다.
책에서 나오는 구절 중에 ‘엄밀한 의미에서 스승은 목표가 될 수 없어요.
다만 참고될 뿐이에요. 그러니 각자가 부단히 새로운 길과 방법을 찾아가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제자이면서 누군가의 스승으로 살아갑니다’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일방적인 ‘교육-피교육의 관계’가 아니라 실체성, 존재성의 바탕에서
상호 긍정적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라 생각됩니다. 물론 스승의 역할은 우선 무언가를 ‘가르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만,
가르치는 것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고 ‘함께 비를 맞는 것’이 되니
이러한 ‘스승’의 상은 매우 중요한 인식의 전환이며, 삶의 통찰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스승의 날에 ‘스승’으로서 다시 선생님을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남기신 ‘가르침’에서
나는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가, 과연 잘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합니다.
우리 더불어 숲에서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라 저마다 서로에게 스승과 제자이면서
함께 연대와 희망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안한 삶,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인생이란
벽을 끝없이 넘어가야만 하는 우리에게 현명한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불어숲 회원 허 병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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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83번재 편지] 한송이 팬지꽃 - 최 훈 2026. 05. 08. |
[샘터찬물 483번재 편지]
한송이 팬지꽃
바야흐로 5월입니다. 나무 가득 흰 밥풀을 붙이고 있는 이팝나무가 달밤 아래 하얗게 빛납니다.
포슬눈으로 시작하다 어느새 함박눈으로 변해 내리는 겨울의 하얀 풍경은 동화 속의 순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역시 사람들은 추운 겨울보다는 따뜻한 봄을 더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2월의 흰 눈 속에 벌써 노란 얼굴을 내미는 복수초를 시작으로 봄까치와 노루귀가 수줍게 피어나면 새봄이 왔다는 반가움에 마음은 설레기 시작합니다. 이어 자연이 마련해 둔 꽃차례대로 매화에 살구꽃 복사꽃 피고 산수유와 개나리 진달래가 연이어 피어나면 봄 들판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우리들의 마음은 싱숭생숭 바깥을 향하게 됩니다. 마침내 흐드러진 벚꽃이 허파에 한껏 바람을 불어넣는 4월이 오면 명자꽃, 황매화에 수선화, 라일락까지 꽃향기에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잡기 어려워집니다. 다행히 작고 하얀 여러 종류의 조팝나무꽃들이 마음을 가라앉혀주어 이제 곧 여름이 오리라는 걸 눈치채게 해 줍니다. 그렇게 5월이 우리 앞에 왔습니다.
5월에는 내가 좋아하는 쪽동백꽃도 오롱조롱 피어날 것이고, 아카시꽃과 찔레꽃 인동초꽃 등 향기가 더 진한 꽃들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누구나 만나고 싶은 꽃을 때맞춰 기다리기만 하면 언제나 만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로 어딘가에 갇힌 사람들입니다.
신영복 선생님도 20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감옥은 외부와 단절된 공간이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제한되어 있지만 자연의 동식물을 접하기도 어려운 곳입니다.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바뀌는 자연의 풍경을 마주하는 것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일 수도 있지만, 내가 땅 위를 밟고 서 있다는 사실과 대지와 맺고 있는 유대감과 안정감을 확인시켜 주는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감옥은 실천이 배제된 외발걸음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자연과의 연결성마저 최소한으로 억제된 공간인 것입니다.
감옥 생활 10년이 지나서야 선생님은 조금씩 자연의 일부분과 조우하게 됩니다. 1978년 선생님은 개미 한 마리가 물어다 주었을지도 모르는 작은 풀씨 한 알이 옥창 좁은 곳에서 한 뼘도 넘게 자랐음을 발견합니다. 그 이듬해에는 어디선가 날아든 민들레씨 하나를 언급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1980년 5월의 엽서에서는 작은 비닐화분에 담아 온 팬지꽃이 여남은 개의 꽃을 피워낸 것을 보고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한 줌도 채 못 되는 흙 속의 어디에 그처럼 빛나는 꽃의 양식이 들어 있는지… 흙 한 줌보다 훨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내가 과연 꽃 한 송이라도 피울 수 있는지"
세상을 이루는 기본 요소로서 우리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을 말하곤 합니다. 땅과 물과 햇빛과 공기입니다. 한 송이 팬지꽃이 몸담은 작은 비닐화분 안의 얼마 되지 않는 흙 속입니다. 꽃이 피기 위한 조건인 수화풍도 지(地)가 있은 연후의 일이고 보면, 우리가 늘상 밟고 다니는 땅과 흙이 모든 생명의 어머니라고 하는 말이 절대 상징적인 비유에 그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웬만한 절에 모셔져 있는 지장보살(地藏菩薩)도 바로 이 대지에 감사하고 든든하게 생명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발현된 것일 겁니다. 흙을 들여다보던 선생님은 곧바로 나는 과연 꽃 한 송이라도 피울 수 있는지 스스로를 되돌아봅니다. 팬지꽃 한 송이를 들여다보며 부끄러워하고 겸손해하시던 선생님은 우리가 알다시피 출소 후 많은 꽃송이를 피워 내십니다. 가족이라는 관계에서, 학생들과 동료 선생님들과의 관계에서, 서도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우리 사회의 낮은 곳과 연대하면서..
감동적인 팬지꽃과의 만남 한 달 후, 이번에는 작업장에 메리골드 한 포기를 데려왔습니다. 물이 부족해 목을 걸치고 죽어 가던 꽃을 장송의 의례에 가까운 심정으로 흥건히 물을 뿌려 쓰레기통 옆에 치워 두었는데 얼마 후 놀랍게도 힘차게 팔을 뻗고 일어서 있는 꽃을 발견합니다. 선생님이 그 힘든 감옥생활을 이겨내는데 작은 풀씨 한 알과 팬지꽃과 메리골드와의 만남이 얼마간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저 혼자만의 생각일까요. 이 꽃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선생님의 핵심적인 사유라고 할 수 있는 ‘관계론'이 더 굳건해졌다고 생각한다면 저의 과한 상상력일까요.
선생님은 이미 70년대 중반 서예에 매진하면서 ‘서도의 관계론'이라는 우이 서예의 기본 철학을 이미 정립하고 있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만, ‘서도의 관계론’과 ‘사람의 관계론’을 넘어 ‘자연의 관계론’으로 확장할 수 있었던 데는 자연과의 만남에서 느낀 생명의 경이에서 일정 부분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이후 선생님은 ‘잡초를 뽑으며(1984.9)’에서 잔디만 남기고 잔디 외의 풀은 사그리 뽑으며 육군사관학교 시절과 남아연방과 운디드니의 인디언에게까지 사고를 확장합니다. 단지 인간이 그 이름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잡초로 규정한 풀을 뽑으며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으로 쇄도합니다. 이미 1968년에 잡초로 규정되어 뿌리까지 뽑힐 뻔했던 당신의 상황을 거시적으로, 역사적으로 되돌아보고, 날 때부터 이미 지니고 있었던 천부의 인권과 당당함으로 당신을 힘차게 세우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그 후에도 선생님은 ‘입장의 동일함'이 관계의 최고 형태임을 확인하시고(1984. 11), 출소 후 세계를 주유하면서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히말라야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남겨 주셨습니다. 히말라야 사람들은 정상을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사실과, 히말라야의 어둠과 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궁극적으로 자연이 허락하는 문명의 크기를 생각하기를 권유합니다. 또 아마존 지역을 방문하신 후에는 ‘인간적인 사람’이라는 말이 이제는 더 이상 칭찬이 못 되며 차라리 ‘자연적인 사람’이 칭찬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시게 됩니다(더불어숲, 1998). 선생님은 이미 ‘사람의 입장’을 넘어 ‘생명의 입장’에서 관계론을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일찍이 신라의 최치원 선생이 풍류도의 핵심 이념으로 ‘접화군생(接化群生)’을 말했듯이, 생명의 원리는 관계성과 순환성, 다양성에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물과 무생물을 막론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순환하고 변화하지 못하면 썩게 되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획일화되면 굳어지고 진화하지 못하게 됩니다. 나만 따르라고 겁박하는 것은 관계를 무너뜨리고, 변화를 거부하고 다양성을 배제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생명이 자라날 공간은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가 약자에 더 관대해져야 하는 이유와 세상을 더 다양하고 평등한 곳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도 드러납니다.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5월, 들판으로 나가 꽃들에 눈길을 주어 보세요. 들판의 꽃씨 하나에서 우주의 비밀을 발견해 내는 기쁨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내가 우주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 찾아보시기를 권합니다. 지상의 꽃 하나가 피어나면 밤하늘의 별 하나도 반짝이고, 그 별빛은 지구의 어느 곳에서건 우리의 머리 위에서 똑같이 빛납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듭니다.
-더불어숲 회원 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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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82번째 편지] 내 몸의 주권을 회복하는 일 -이도환 2026. 05. 01. |
[샘터찬물 482번째 편지]
내 몸의 주권을 회복하는 일
저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다른 체제가 아닌 자본주의 체제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자본주의 상품 구조가 갖는 엄청난 규정력,
이게 얼마나 우리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느냐에 대한 철저한 반성 없이는 어떠한 전망도,
어떠한 운동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철저한 반성과 더불어 우리의 사상을 튼튼하게 꾸려 나가려는 노력 없이는 과거의 답습은 물론
또 한 번 좌절을 겪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판단합니다. 민주화에 대한 것이든 우리 사회의 구조에 대한 것이든
어쨌건 철저한 반성이 없는 한 운동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353쪽.
『동의보감』은 430여 년 전에 나온 책입니다. 국보(319호)로도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2009년)된 이 책의 서문에 나오는 글입니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지만, 최첨단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도 눈여겨 볼 만한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의 질병은 모두 조리(調理)와 섭생(攝生)의 잘못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수양(修養)을 우선으로 하고 약물은 그다음이어야 한다.”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본의 상품 구조가 도시를 넘어 시골 구석구석에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수양을 우선으로 하고 약물은 그다음이어야 한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 많은 사람이 약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배가 조금만 아파도, 기침이나 콧물이 나더라도
먼저 병원부터 찾습니다. 내 몸의 주권을 병원이나 약국에 맡기는 일들을 오늘도 무수히 겪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 몸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관리를 스스로 해야 합니다.
동의학은 체험 의학입니다. 직접 실천하고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특히 몸에 붙여놓은 자신의 습관을 먼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습관에도 여럿 있습니다.
이른바 숨 쉬는 것에서부터 먹는 것, 잠자는 것, 싸는 것, 마음 씀씀이, 행동거지,
말버릇에 이르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내가 내 몸에 이들을 어떻게 붙이는가에 따라
내 몸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성현의 말씀으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자왈子曰 성상근야性相近也 습상원야習相遠也” (『논어』 양화편),
곧 “사람이 타고난 성품인 본성은 비슷하지만,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따라 서로 멀어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내 몸의 주권을 찾는 일은 딱 하나! 알게 모르게 붙인 내 몸의 습을 먼저 고쳐,
병원이나 약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입니다.
- 이도환(더불어숲 영남지역작은숲지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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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81번째 편지] 콜럼부스의 달걀 -강태운 2026. 04. 23 |
[샘터찬물 481번째 편지]
콜럼부스의 달걀
콜럼부스의 달걀은 발상전환(發想轉換)의 전형적 일화입니다.
발상의 전환 없이는 결코 경쟁에 이길 수 없다는 신자유주의의 메시지로 오늘날도 변함없이 예찬 되고 있습니다.
아무도 달걀을 세우지 못했지만 콜럼부스는 달걀의 모서리를 깨트림으로써 쉽게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발상 전환의 창조성이라고 하기보다는 생명 그 자체를 서슴지 않고 깨트릴 수 있는 비정한 폭력성이라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감히 달걀을 깨트릴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달걀이 둥근 모양인 것은 그 속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모(角)지지 않고 둥글어야 어미가 가슴에 품고 굴리면서 골고루 체온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타원형의 모양으로 만들어 멀리 굴러가지 않도록 하거나, 혹시 멀리 굴러가더라도 다시 돌아오게 한 것 모두 생명을 지키기 위한 고뇌의 산물입니다.
그러한 달걀을 차마 깨트리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과 그것을 서슴없이 깨트려 세울 수 있는 사람의 차이는 단지 발상의 차이가 아닙니다.
인간성의 차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은 콜럼부스 개인의 이야기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그것을 천재적인 발상 전환이라고 예찬하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콜럼부스가 도착한 이후, 대륙에는 과연 무수한 생명이 깨트려지는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생명이 무참하게 파괴되는 소리는 콜럼부스의 달걀에서부터 오늘날의 이라크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곳곳에서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처음처럼』 - “콜럼부스의 달걀”
우리는 절대적 진실이 무너진 시대를 산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세상을 본다. 같은 사건도 누구의 자리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진실이 된다.
식민지 지배를 ‘근대화’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폭력과 수탈’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재개발을 ‘발전’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에게 그것은 ‘파괴’다. 절대적인 진실은 없다. 저마다의 진실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진실이 다르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데미안 허스트: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 전시가 논란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죽음의 진실에 다가가려는 성찰보다, 죽음을 소비 가능한 대상으로 보이게 하는 작품 방식, 개별 존재의 고유함이 아니라,
시각적 아름다움을 가진 오브제로 읽히게 만드는 구성. 이 전시를 둘러싼 불편함에는 이유가 있다.
진실이 없다는 말이, 모든 것을 허용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사람마다 진실이 다르다고 해서,
인류가 어렵게 지켜온 보편적 가치를 해치는 일까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약자를 짓밟는 일,
말 못 하는 동물을 수단화하는 일, 강자에게 아첨하는 일, 손길이 필요한 곳을 외면하는 일까지 ‘나의 진실’이라는 말로 덮을 수는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분별이다. 사랑도 분별이 먼저다. 내가 하려는 일이 이 시점에서, 이 상황에서, 우리 사회에 정말 유익한가.
내가 내민 손은 시간과 맥락, 도덕과 가치에 맞게 닿고 있는가. 현실을 직시해야 할 자리에서 미래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은지,
미래를 지향해야 할 자리에서 현실에만 머물고 있지는 않은지. 손길이 필요한 곳에서는 주저하고, 잡지 말아야 할 손은 덥석 잡고 있지는 않은지.
그렇게 약자에게는 엄하고, 강자 앞에서는 한없이 너그러워지고 있지는 않은지.
진실은 다를 수 있다. 다만 그 진실은 분별이라는 대지 위에 뿌리내릴 때만 의미를 가진다.
지금은 콜럼버스의 시대가 아니다. 선을 넘어도, 우리는 너무 많이 넘었다.
- 더불어숲 회원 강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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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80번째 편지] 차가운 땅도 생명을 품고 - 조희연 2026. 04. 17. |
[샘터찬물 480번째 편지]
차가운 땅도 생명을 품고
당신은 유적지를 돌아볼 때마다 사멸하는 것은 무엇이고 사람들의 심금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를 돌이켜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새로이 읽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라고 하였습니다,
‘과거’를 읽기보다 ‘현재’를 읽어야 하며 ‘역사를’ 배우기보다 ‘역사에서’ 배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는 강과 산이 절묘하게 조화된, 이른바 산수대우의 땅입니다.
남한강 상류의 맑은 물이 유유히 흘러오다 갑자기 물길을 돌려 뼘으로 그린 듯 동그랗게 남겨놓은 솔숲과 백사장이 그림 같습니다.
산과 강이 서로를 아끼며 벗하는 자연의 우정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산수의 아름다움보다 단종의 유배와 죽음을 먼저 봅니다.
어린 유배자가 시름을 달래던 소나무가 500년 풍상에 늙어있고 그리움을 연으로 띄우던 노산대에는 단종의 한이 서려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청령포는 유괴되고 살해된 한 어린이의 추억에 젖게 합니다. 무고한 백성의 비극을 읽게 합니다.
역사의 응달에 묻힌 단종비 정순왕후의 여생이 더욱 그런 느낌을 안겨줍니다. 궁중에서 추방당한 그녀는 서울 교외의 초막에서 한 많은 생애를 마칩니다.
그녀의 통곡이 들려오면 마을 여인들도 함께 땅을 치고 가슴을 치며 동정곡을 하였다고 합니다.
핏빛보다 더 진한 자줏빛 물감을 들이며 가난한 한 포기 민초로 사라져 갑니다.
동정곡을 하던 수많은 여인의 마음이나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체를 수습했던 영월 사람들의 마음을 ‘충절’이란 낡은 언어로 명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동정은 글자 그대로 그 정이 동일하였기 때문입니다. 같은 설움과 같은 한을 안고 살아갔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후략)
『나무야 나무야』 ‘역사를’ 배우기보다 ‘역사에서’ 배워야 합니다 - 중에서
만화방창, 봄이 지천입니다. 겹겹이 벚꽃은 아쉬워 떨어져 내리고, 동백 붉은 꽃잎은 뚝뚝 화단에 마른 흙먼지를 덮습니다.
여기저기 민들레의 심장이 샛노랗게 뛰고, 봄에 찾아든 새 소리에 모란은 자주 꽃 색을 피우느라 분주합니다.
웅크린 나뭇가지에 내민 초록 잎이 나무의 날갯짓처럼 자유로워 더불어 저도 설렙니다. 들썩이는 마음에 집 안 산세베리아 화초를 베란다로 옮겼습니다.
봄볕을 잎 가득 채우려니 싶어 덩달아 흥성거렸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하얗게 변해버린 잎에 대해 알았습니다.
그늘이 제 집이구나……. 응달의 눈이 꾀죄죄한 몰골로 봄의 한낮에도 남아 있던 이유,
사내아이의 오줌 자국처럼 눈 녹은 자리에 늦된 나무가 꽃을 피운다는 시 한 구절, 차가운 땅도 생명을 품고 길러냅니다.
천만 관객을 모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인기는 여전히 식을 줄 모르고 사람들을 불러 모읍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말에 꼭 봐야 한다는 애정 어린 진심이 정겹게 들립니다.
청령포가 멀리 보이는 도롯가에 길게 늘어선 줄이 영월 사람들이 놓았다던 섶다리로 보임은 무슨 까닭인지,
긴 기다림의 끝에 가 닿는 곳이 어디일지 생각해 보게 합니다.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것은 왕의 서사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왕과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울고 웃습니다.
비운의 왕에게서 모두를 잃은 어린아이의 외로움을 봅니다. 흘리지 않는 눈물에서 내 아이의 울음을 봅니다.
그리하여 그 곁을 지키던 사람들의 마음과 하나가 됩니다. 어떤 이는 오르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내려놓으며 살아가는 생의 단편,
부서짐에도 견뎌야 하는 시간을 무엇이라고 명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서져 반짝일 수 있음은 또 어쩐 일일까요.
본질은 같고 형태만 다를 뿐, 이 시대에도 정이 같나 봅니다. 영화 한 편에 실린 사람들의 이야기에 너나없이 변을 쏟아내고 맛깔스러운 사투리에도 인정이 푸집니다.
정이 동일하다던 님의 말이 새삼스레 다가옵니다. 동정, 같은 설움과 같은 한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네 삶에 그늘진 응달에서 봄이 늦도록 녹아든 눈처럼 힘이 되는 말입니다.
오래도록 생각하던 청령포에 몇 해 전 다녀왔습니다.
강으로 에둘러진 외딴섬처럼 그대로 그곳에 있었습니다. 강으로 내려가는 비탈진 언덕과 둥글게 흐르는 강,
강 위를 오가는 배와 사람들, 빗물에 쓸려온 듯 여기저기에 놓인 돌들이 노을 진 백사장 대신 손을 맞았습니다.
책 속 사진은 온데간데없이 상전벽해 속에 여전히 시간은 흐르고 강물 위로 출렁이던 윤슬, 그 너머 솔숲은 그늘 아래 고요했습니다.
주인 없는 집 마당을 걸으며 잠시 출타한 주인을 기다리듯 앉아 쉬었습니다.
노산대에 올라 절벽 아래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잠시 고단함을 덜었습니다. 와류와 냉수대가 숨은 음지의 땅이기 전에 그곳도 사람을 품고,
숲을 길러내고, 새소리를 불러 고요를 벗해주는 땅이었습니다.
태초로부터 생명을 길러낸 대지의 너른 가슴이었습니다. 사람을 살게 하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었습니다.
우문현답을 이제야 보냅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새로운 시작의 문을 엽니다, 선생님. 당신이 쓴 글에서 님을 만나고 읽고 생각을 배웠습니다.
실천의 장에 서지 못하는 소심함에도 내 이웃과 온정을 나누며 통정하리라던 마음은 변함없이 강을 타고 흐릅니다.
생명을 품고 길러내는 일이 사람에게 고작 백 년이라면 이렇듯 자연은 태초의 시간부터 오늘,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까지 흘러가겠지요.
청령포 엽서가 오늘 사람들에게 가 닿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 또 한 사람의 손에서 한 구절 한 문장이 숨을 쉬듯 읽히기를 희망합니다.
이곳에서 바름과 균형의 정치를 바라며 쓴 당신의 혜안이 오랜 세월을 돌아 돌아 님의 가슴 울리기를 바랍니다.
낡은 언어와 낡은 생각에서 벗어나 같은 설움과 같은 한을 나누기를 꿈꿔 봅니다.
그리하여 그늘진 땅이 생명을 품고 길러내는, 더디고 지난한 시간이 봄 싹을 틔우고 있음을 전해 봅니다.
- 더불어숲 회원 조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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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79번째 편지] 선(善)의 본질 - 서기용 2026. 04. 10. |
[샘터찬물 479번째 편지]
선(善)의 본질
계수님한테서 느껴지는 이 ‘철학에 의하여 지탱된 소박함’은 비록 지극히 짧은 상면에서 확인된 것이기는 하나
그 바닥에 그만한 온축(蘊蓄)이 없고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그런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계수님의 써 보내지 않은 하소연이 조금도 염려되지 않습니다.
오늘은 다만 내가 읽은 어느 시나리오의 대사 한 구절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려 합니다.
이 구절은 한 여인이 그 사람을 자기의 반려자로 결심하게 된 이유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Because I really conceived that I could be a better person with him.”
그 여인은 “그이와 함께라면 보다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그와 일생을 함께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 시대의 수많은 우상(偶像)을 깨뜨리고
인간의 진실을 꿰뚫어 보는 뛰어난 통찰이며 양심이라 느껴집니다.
이 구절은 물론 그이를 통하여 자기가 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발돋움하고자 하는
자신의 성장 의지를 뜻하는 것입니다만 관점을 바꾸어본다면 반대로
그이가 자기로 인하여 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더 넓은 함의(含意)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선(善)의 본질은 공동선(共同善)이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계수님의 하소연’ 중에서 -
“Because I really conceived that I could be a better person with him.”
“그이와 함께라면 보다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인생을 동행(同行)할 나의 반려자로 인해 내가 좀 더 훌륭한 사람이 되고
또 나로 인해 그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된다면 삶은 서로에게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 될 것입니다.
결혼뿐만 아니라 직업 선택에서도 이에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
내가 선택한 직업이 자신을 보다 나은 사람으로 인도한다면 인생에 있어 크나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붓글씨를 업으로 삼아 살며 크고 작은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며 지금까지 왔지만,
붓글씨가 나를 좀 더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없었다면
아마 여기까지 걸어오지 못했을 거로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 굳은 믿음으로 묵묵히 나아가 나의 가정생활 그리고 서예술(書藝術)이
좀 더 진선미(眞善美)에 가까워지기를 추운 겨울을 겪고
새로이 피고 돋아나는 꽃들과 신록을 바라보며 약속해 봅니다.
- 더불어숲 회원 서기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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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78번째 편지] 이란이 있어 참 다행이다 -정연경 2026. 04. 03. |
[샘터찬물 478번째 편지]
이란이 있어 참 다행이다.
2003년 미국-이라크전쟁이 터진 이후 미국의 다음 표적이 어디냐 하는 불안이 심각할 때였습니다.
부시가 이라크 침공 명분을 대량살상 무기 보유인데 침공 후 생물, 화학, 핵무기의 어떤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라크 점령 후 부시는 이란과 북한을 함께 ‘악의 축’이라고 규정하고 제재하고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신영복 선생님의 정세 분석이 기억납니다.
“전쟁의 숨은 이유는 석유 때문이다.” 하면서 그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이라크가 중동 산유국 중 처음으로 석유 대금을 유로화 결제로 시작한 게
달러의 기축통화를 붕괴시키는 조짐으로 미국은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 시작은 이라크가 미국의 꾀임으로 1980년에 시작해 8년간 끌려간 대 이란전쟁이었습니다.
종전 후 이라크는 800억 달러가 넘는 외채로 부채 상환액이 석유 수입의 절반을 넘어 파산 상태가
후세인이 1990년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후 후세인은 친미에서 반미로 돌아 2000년부터 달러를 ‘적국의 통화’라고 부르며
석유 대금의 달러 결제를 거부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미국의 패권은 페트로 달러의 위기로 오고
유럽(EU)이 미국의 말을 안 듣는 시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군사력이 미국에 종속된 유럽은
지금까지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이 모든 게 신자유주의 때문이다.”라고 신영복 선생님은 그 기원을 설명했습니다.
각 나라의 각자도생은 실업을 막기 위해 ‘수출만이 살길이다’이다 보니 수입해 줄 나라는 돈을 찍어내는
미국밖에 없고 회복할 수 없는 막대한 재정적자를 버텨주는 것은 달러가 기축통화이기 때문입니다.
이란은 미국의 경제봉쇄와 위협에 2006년부터 석유의 유로화 결제를 현재는 위안화 결제도 하고 있습니다.
어떻든 오바마 정부 때 핵 합의가 타결되어 2015년부터 서방의 경제제재가 풀렸습니다.
그 당시 북한은 왜 그렇게 못하나 하며 안타까워했는데 2018년 트럼프가 등장하면서
핵 협약은 파기하고 북한에도 시비를 걸어 김정은과 트럼프는 ‘우리도 핵 있다’라며 치킨런을 하다
‘노딜’ 상태로 지금까지 오고 있습니다.
지난 3년간 한반도가 언제든 터질 수 있는 화약고였음이 드러나면서
윤석열과 트럼프가 만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거립니다.
2003년 1월 북한이 이라크 전쟁 직전 NPT(핵확산방지조약) 탈퇴했을 당시 모인 더불어숲 사람들이
다음 전쟁이 어디일지 걱정되어 신영복 선생님께 물었을 때 말하기 힘들어하시면서
“이란 국민에겐 참 죄송하지만, 한반도는 이란이 있어 참 다행입니다.”
- 더불어숲 회원 정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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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77번째 편지] 함께 맞는 비 - 김한식 2026. 03. 26. |
[샘터찬물 477번째 편지]
함께 맞는 비
사람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 '스스로 도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음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아라공의 시구를 좋아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함께 맞는 비’ 중에서
작년 4월부터 동두천 보산 지역에서 이주 배경 청소년들과 함께 붓글씨 공부를 했습니다.
서여회 회원분들 여섯 분과 함께 매주 일요일 오후를 함께 보냈습니다.
우리는 '꿈꾸는 붓'이라는 멋진 이름도 만들었습니다. 붓글씨를 통해서 아이들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정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스무 명 가까운 아이들과 만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아이들 부모님은 대부분 아프리카 출신이고
아이들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합니다.
대부분 우리 말과 영어를 자연스럽게 하지만 글을 쓰는 건 서툰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붓을 잡고 획을 긋는 법도 배우고, 마음속 이야기도 나누는 시간을 이어갔습니다.
먹물을 온통 바닥에 뿌리기도 하고, 선생님의 한 마디가 아이들의 스무 마디에 묻힐 때도 많았습니다.
수업보다는 수업 후 간식 시간이 이 친구들이 모이는 이유인 것은 비밀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속상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수업을 마칠 때도 있었습니다.
'내가 여길 오려고 포기한 게 얼마나 많은데, 왕복 세 시간이 넘게 전철을 타고 왔는데.' 하는
본전 생각을 애써 누르며 복잡한 심경으로 휴일을 마무리하는 때도 많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칫솔 한 개를 베푸는 마음도 그 내심을 들추어 보면 실상 여러 가지의 동기가
그 속에 도사리고 있음을 경계하셨습니다. 시혜자라는 정신적 우월감, 측은지심을 바탕으로 한 동정.
이런 마음이 보일 때마다 저는 새삼스럽게 놀라면서 아이들을 그저 아이들로만 대해야지 하며
마음을 다잡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0개월을 보내고 지난 2월 말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바쁜 부모님들은 끝내 전시장을 찾지 못하셨지만, ‘엑소더스’ 신부님과 활동가님, 난민 활동가분들과
이주민 자활을 돕는 '함께' 관계자분들, 더불어숲 회원분들과 지역 활동가분들이 함께 자리해주셔서
작품 속 아이들의 진심에 놀라워하시며 함께한 선생님들의 노고를 넉넉히 감싸주셨습니다.
꿈붓 친구들과의 여정은 전시를 끝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저 '스스로 돕는 일'을 돕는 것이라는 말씀처럼,
저희는 아이들이 스스로 도울 힘을 길러주고자 했습니다.
아이들이 그런 힘을 조금이라도 갖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저희가 더 많은 힘을 얻고 온 길인 것도 같습니다. 함께 비를 맞고자 했으나,
잠시 우산을 씌워주고 안락한 일상으로 돌아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꿈 붓 친구들과의 만남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연으로 꽃 피우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함께 하신 나람, 석정, 시우, 월영, 유여, 로사님 감사했습니다.
- 더불어숲 서여회 無愁 김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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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터찬물 476번째 편지] 변화의 유니폼 -허병철 2026. 03. 20 |
[샘터찬물 476번째 편지]
변화의 유니폼
“수의는 ‘변화의 유니폼’과 같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나 자신의 변화에 대한 확실한 자부심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0여 년 만에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변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과연 내가 변한 것이 사실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내가 갖고 있는 변화에 대한 생각이 아직도 근대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변화는 결코 개인을 단위로,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변화는 잠재적 가능성으로서 그 사람 속에 담지 되는 것이다.”
『담론』 ‘사일이와 공일이 편’에서
수형생활 17년째에 어머님의 병환으로 6일간의 휴가를 나오신 선생님은 수의를 입은 채 지인들을 만나십니다.
감옥에서도 자기 단련을 쉼 없이 다져오신 터라 스스로는 변화가 많이 되었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만,
오히려 지인들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그분들의 말씀은 젊은 시절의 모습을 추억하고자 ‘하나도 안 늙었구나,
예전의 멋진 모습 그대로구나’ 하는 반 농담성 말이 아니었겠는지 생각됩니다만
여기서 선생님은 이런 가벼운 농담조차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셨습니다.
“변화와 개조를 개인의 것으로 또 완성된 형태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근대적 사고의 잔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라는 깨달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변화란 무엇일까요. 선생님께선 변화란 “개인 차원에서는 가능성으로서 잠재되어 있다가 당면의 상황이 되었을 때,
함께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라 하십니다. 전혀 새로운 시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1회 완료적인 변화는 없습니다. 설령 일정한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계속 물 주고 키워내야 합니다”로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가끔 “매일이 똑같구나, 내 삶은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하면서 자조(自嘲)하곤 합니다.
실제로는 매일, 매 순간 변화하고 있음에도 말이죠. 티베트의 스승 달라이 라마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
‘나’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본래부터 ‘나’는 없다. 무아(無我)다”라고까지 합니다.
불교의 무아 사상을 제가 잘 알지 못하나 ‘변화’라는 것은 자연의 질서이자 궁극의 원리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주 만물은 항상 나(生)고 움직인다는 생동(生動)의 원리도 변화가 있어야 가능하겠지요.
문제는 어떻게 변화하는 삶을 살 것인가입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개인이 혼자일 때 변화는
그 안의 가능성으로 존재합니다. 변화는 자신이 능동적 주체로 나설 때 두드러집니다.
그러다 어떤 상황에서는 외부적으로 발현됩니다. 역사의 반역인 계엄 사태에서 우리 국민은
변화의 가능성을 나타냄으로써 위기를 극복해 내고 있습니다.
더불어 숲에서 우리는 하나의 나무로 화(化)하여 숲을 이루면서 다시 새로운 변화를 이루어 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내게로 와서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킵니다.
모든 순간, 순간들이 이어지고 모아져서 작거나 큰 변화를 이루어 내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를 위해 ‘부단한 노력’과 ‘공부’를 강조하십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자신을 채근하길 하실 수 있을까 생각도 듭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살아가는 이유를‘하루하루의 깨달음’이라 하신 말씀이 생각나면서
저는 삶이란 그 (변화하는) 순간의 기쁨을 체득하는 과정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평생 삶의 결정적 순간을 찍으려 발버둥 쳤으나,
삶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었다”라고 회고합니다. 매 순간이 변화의 순간이요,
그 찰나의 순간조차 삶의 결정적인 변화입니다. 그 변화를 누리기 위해 이 삶을 사는 것인지 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대장정에 우리는 지금 함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 더불어 숲 회원 허 병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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