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터찬물 499번째 편지]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 꽃다운 님의 얼굴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 희망봉에는 이름과는 달리 거센 바람이 쉴 새 없이 몰아칩니다.
바람에 밀려온 이랑 높은 파도가 암벽에 부딪혀 자욱한 포말로 일어섭니다. 세상을 하직하러 ‘지구의 끝’을 찾아온
노인 관광객들이 거센 바람에 밀려 발을 떼어놓지 못합니다. 이곳을 ‘폭풍의 곶’ 대신 희망봉이라고 이름 붙인 까닭이
궁금합니다.
희망봉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절망의 섬’이 있습니다. 해안에서 약 6km, 뱃길로 30~40분 거리에 있는
로벤섬이 그곳입니다. 로벤섬에는 넬슨 만델라가 구속 기간 27년 중 17년 동안 갇혀 있던 감옥이 있는 섬입니다. ……
희망봉과 절망의 섬이 서로 지척에 있었습니다.……화이트와 블랙은 단순한 색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선과 악,
희망과 절망의 대명사였습니다. 당신의 말처럼 희망은 절망의 땅에 피는 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희망이 다른 누군가의 절망이 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희망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요하네스버그에는 환희의 동상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최초로 금광을 발견한 조지 해리슨이 금광석 움켜쥔 손을 높이
쳐들고 환호하는 모습입니다. 전 세계 금의 60%, 다이아몬드의 70%를 공급하고 있는 남아프리카를 생각한다면 그가
치켜들고 있는 돌멩이의 무게와 그 돌에 담긴 환희의 크기를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골드리프시티 광산에서는 다시 이 환희의 반대편을 목격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용암이 솟아오르지 않을까 두려워지는 지하 3,300m. 나는 길고 어두운 갱도에 묻힌 그 엄청난 매장량에 놀라기에
앞서 섭씨 60도의 뜨거운 열 속에서 암벽을 깨뜨리고 있는 흑인 소년들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환희의 동상과 어둠 속의 흑인 소년을 함께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누군가의 환희가 다른 누군가의 비탄이
되고 있는 경우에도 우리는 그것을 환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어두운 지하 갱도에서 마음이 돌처럼 무거워집니다.
(중략)
아프리카 대륙에서 당신의 피아노 연주를 듣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지만 내게는 참으로 뜻깊은 일이었습니다.
……피아노는 우리에게 반음의 의미를 가르칩니다. 반(半)은 우리에게 절반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반(伴)을 의미합니다.
동반(同伴)을 의미합니다. 모든 관계의 비결은 바로 이 반(半)과 반(伴)의 여백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절반의 환희는
절반의 비탄과 같은 것이며, ‘절반의 희망’은 절반의 절망과 같은 것이며, ‘절반의 승리’는 절반의 패배와 다름없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절반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절제할 수만 있다면 설령 그것이 희망과 절망, 승리와 패배라는
대척의 언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동반의 자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반(半)은 절반을 뜻하면서 동시에 동반(同伴)을 뜻합니다 『더불어 숲』 중에서
궁금했습니다. ‘더불어 숲’의 근원이
찾고 싶었습니다. 우리를 모으는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
너무 큰 화두가 마음을 짓눌러 갈피를 잡지 못한 날이 여러 날입니다. 글자가 천방지축 아이처럼 뛰어다녀 붙잡지
못하고, 덤덤해지려 하면 할수록 어지러운 마음은 검게 칠한 나무처럼 아득히 빠져들어 갑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더불어 숲을 이루기까지 무엇이 나를 붙잡고 우리를 불러세워 관계의 집을 짓게 하는가,
그 시작의 주춧돌이 선생님이었다면 집의 완성은 절반과 절반의 만남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영해 바닷가 마을 오솔길에서 만난 할머니가 있습니다. 세월에 휜 허리와 굽은 다리로 돌길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계단에서 반을 덜어낸 높이가 휘청거리는 다리에도 편안히 올라가게 하고 있었습니다.
걷는 내내 낮은 반 계단이 고맙고, 돌 놓은 이의 마음이 반음의 높이로 지친 마음을 토닥여 주었습니다.
온전히 갖고 싶은 욕심을 덜어내니 그 자리에 다른 반쪽이 채워졌습니다. 대척점에 있는 다른 것들이 비로소 설 자리를
찾은 듯 의미가 생겼습니다. 그 경험을 시로 쓴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의 글에서 그 생각을 만났습니다.
먼 남아프리카에서 울리는 피아노 소리로.
‘누구도 온전한 섬이 아니다’라는 시구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희망 저편에 있는 누군가의 절망을 마주하고,
환희 너머의 비탄과 만나 이루는 연대의 힘이 우리를 오롯이 걷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어주는 마음이 있어 서로 함께 견디고 웃게 하는 힘이 됨을 깨닫습니다.
가끔 그런 마음이 뒤뚝이며 멈출 때가 있습니다. 타인의 성공과 환희 앞에서 절망의 힘도 커져 나의 신념이 넘어질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끝에 이는 바람처럼 태풍의 곶에서 희망의 봉우리가 함께 일어섬을 봅니다.
그것이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은어 떼의 힘으로, 때로는 쉬지 않고 솟아오르는 샘물이 아로새긴 감각으로 숲을
이루게 하는 힘임을 압니다. 동반에는 동심이 있습니다. 동심은 각자의 생각과 다양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마음에는 사람에서부터 뒹구는 돌멩이 하나까지도 함께 놓아주는 애틋한 마음이 다함없이 솟아납니다.
동심은 희망 저편의 절망을 나누어 갖는 마음입니다.
입추, 처서가 지나고 여름이 선물처럼 찾아왔다는 지인의 웃음에 8월 때늦은 폭염을 쉬이 지나고 있습니다.
늦은 비에 잠자리가 알 낳을 물을 찾는지 낮게 날고, 웃자란 풀들 사이 작은 나비 홀로 분주히 짝을 찾아다닙니다.
낮과 밤 사이에 풀벌레 소리는 더 높아지고, 그네들도 저마다 짝을 찾는 듯 소리가 더욱 애잔히 들립니다.
사랑이 눈멀고 귀먹게 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이 작은 풀벌레들에도 집 한쪽을 다 내어 주고 싶습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한용운 군말 중- 저마다의 마음 속 ‘기룬 것’들이 구름처럼 아득히 멀어 더
그립고 안쓰럽고 애처롭습니다. 어쩌면 글 속에 기룬 선생님의 마음도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우리들 속에 살아 있어 함께하는 힘이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더불어 숲 회원 조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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