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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샘터찬물 471번째 편지] 당신의 따뜻한 손으로부터 -조희연 2026. 02. 13.2026-02-20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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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찬물 471번째 편지]

 

                   당신의 따뜻한 손으로부터

 

새벽 영등포 버스 정류장 가판대에서 토큰 한 개를 샀습니다. 따뜻한 토큰이었습니다.

토큰을 손에 들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할아버지의 체온이 나의 손으로 옮아왔습니다.

할아버지의 체온을 뺏은 듯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새벽 사창가 유리 진열장 속에 여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손님도 없는 골목의 홍등 밑에 거의 벗은 몸으로 앉아 있었습니다.여자의 옷을 뺏은 듯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죄송한 마음에 이어 우리의 이마를 찌르는 것은 무엇이 이 사람들을 새벽 거리에 나앉게 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남대문 새벽시장과 사당동 인력시장의 이 시간은 이미 파장 무렵이고

청량리역과 서울역은 벌써 승객들을 가득 싣고 몇 차례나 열차가 떠난 뒤입니다.

텅 빈 광장의 모래바람처럼 우리의 얼굴을 때리는 것은

무엇이 이 사람들을 어둠 속으로 나서게 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선량하나 무력한 사람들……

주장하나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

분석하나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

생산하나 나누지 않는 사람들…… (후략)

 

       1990323일자 <한겨레 논단> 따듯한 토큰과 보이지 않는 손중에서

 

 

우리 모두 그 어디쯤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더 이상 토큰을 사지 않고 유물처럼 옛 모습은 풍경 저 너머로 슬며시 사라졌습니다.

이제 모두 디지털 세상 속에 알람을 듣고, 일기예보에 맞춰 빠르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손에 든 휴대폰은 저마다의 시선을 손안으로 거둬들이고 수많은 사람의 소리는 노이즈 캔슬링되어 선택적 소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거두어진 눈과 귀 안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듣고 보며, 무엇을 묻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삼 님의 물음에 답을 찾고 싶어집니다.

가판대와 유리 진열장, 새벽 인력시장의 사실은 상전벽해에도 변함없는 사실로 다가와 아팠습니다.

여전히 우리 속 수많은 사람의 삶의 모습임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토큰에 밴 체온을 읽어내는 손과 손의 대화는 놀라웠습니다. 저도 체온과 옷을 뺏은 듯 함께 미안해졌습니다.

참여의 장을 논하는 실천의 목소리에는 격앙된 감정이 일었습니다.

모두 당신의 따뜻한 손으로부터 시작된 생각입니다. 무엇이든 조금 더 커지려면 작은 시작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의 따뜻한 손으로부터 연민이 싹 트고,

따뜻한 손의 온기를 읽어낼 줄 아는 마음과 연대 속에 참된 모습을 볼 줄 아는 인식이 눈 뜨기를 바랍니다.

인정 있는 사람을 넘어서 손 시린 겨울바람을 함께 막아내는 사람의 나무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보이지 않는 손의 실체 없는 폭력이 새벽 아침에 동행이 될 수 없습니다.

꼬옥 간직한 풍경을 꺼냅니다. 뒤뚱이며 걷는 사람과 말이 어눌한 두 사람이 서로를 붙들고 가고 있었지요.

한 굵직한 웃음이 서로 맞잡은 손과 팔뚝에 물결처럼 리듬을 타고,

짝이 안 맞는 들린 한 발 아래에 햇볕 한 줌이 노래하듯 닳지 않은 뒤축을 받치고 있었습니다.

따스했습니다. 그때 그 햇볕 한 줌이 되고 싶었습니다.

저마다의 자리가 그런 곳이기를 바랍니다.

선량하나 무력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분석하나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부지런해야겠습니다.

 

                                                              -더불어숲 회원 조희연